아침 식사
시를 읽기 좋은 계절이 따로 있을까요. 겨울은 겨울대로 감성이 몽글몽글해지는 시를 읽기 좋은 계절 같습니다. 겨울의 초대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시집 한 권과 따뜻한 커피를 들고 햇볕이 잘 드는 도서관 카페를 찾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파랗고 눈이 부시네요. 풍경 속에 제가 담긴 것인지, 제가 풍경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래된 사진처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하얗게 사라지지 않고, 흑백과 컬러 그 중간 어디쯤 흐릿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무슨 요일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나른한 오후의 프랑스어 시간이 그렇습니다. 제2외국어는 1학년 과정이 아니었고, 3학년이 되어서는 진학과 진로로 거의 사라진 시간이라 2학년 때임이 분명합니다.
우수에 가득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던 프랑스어 선생님이 그날 읽어 준 시는 자크 프레베르의 「아침 식사」였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 시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아니, 활자가 읽히는 대로 ‘이별 이야기’로 받아들였겠습니다. 선생님이 어떤 감상을 들려주었는지조차도 기억에 없습니다. 다만, 너무도 아름답던 그녀의 불어 발음과 시에 녹아버린 몽롱하던 표정이 그 시간 속의 저에게는 더없이 낭만적이었다는 사실만 남아 있네요.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
우유를 넣었지
그이는 카페 라테에
설탕을 탔지
그이는 작은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었지
그이는 카페 라테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내겐 아무 말 없이
그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지
그이는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지
그이는 재떨이에
재를 털었지
내겐 아무 말 없이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 버렸지
말 한마디 없이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그래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렸지
자크 프레베르 저/김화영 역(2023),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민음사, pp.68-71.
「아침 식사」는 단편영화를 보는 것처럼 카메라 앵글이 그의 행동에 시선을 묶어 놓습니다. 저는 왜 흑백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와 그녀가 있는 공간이 그려지고, 이른 아침에 내리는 가랑비의 냄새까지도 느껴집니다. 그를 애절하게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있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의 무기력함과 절망감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처음 산 자크 프레베르의 시집은 『귀향』이었습니다. 여러 번 이사 다니며 잃어버렸는지, 어디에 두고 온 것인지 아무리 뒤져봐도 서재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오래된 책이라 도서관에서도 볼 수가 없네요. 자크 프레베르의 시는 때로는 쉽고, 때로는 끔찍하고, 때로는 아프고 또 때로는 너무 어렵습니다. 자연스럽지만 자연스럽지 않음이 자연스러운…, 그의 시의 활자는 쉽게 읽히지만,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매력이 있습니다.
「아침 식사」 속의 그녀는 어디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소파 위에 앉아서 아니면 침대 속에 누워서? 독자로서는 담배 연기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그이’가 참으로 얄밉습니다. 이런저런 이미지를 상상하다가 저는 여주인공으로 까뜨린느 드뇌브를 캐스팅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프랑스의 날인가 봐요.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영화 『쉘부르의 우산』도 보고 싶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저녁 식사는 보르도 와인과 함께 쉘부르의 눈 내리는 거리로 들어가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