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빠라기

달을 본 횟수가 삶의 의미를 정하지 않기를

by 블러드 피치

도서관에는 자료실과 열람실 외에도 북토크나 문화 강좌 등이 이루어지는 커뮤니티 공간, 편히 독서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북카페, 식당이나 매점이 있는 곳도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는 간단한 간식을 먹을 수 있는 무인 자판기가 놓인 자그마한 휴게 공간이 있어요. 점심시간에는 샌드위치나 도시락을 드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낯이 익은 사람끼리는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거나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살짝 허기가 져서 주머니에 넣어온 에너지바하고 커피라도 마실까 하여 휴게실을 겸한 도서관 카페에 갔다가 남성 두 분이 제 옆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일부러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들려왔다’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네요.


“어제는 안 보이시대요?”


“예~, 오후에 면접을 보러 갔다 왔습니다. 퇴직하고 한 1년 쉬면서 지내보니 딱히 할 일도 없고, 어디 소일거리라도 찾아보려고요.”


“저도 여러 군데 이력서를 내보기는 했는데 잘 안되더군요.”


“아..., 어디 어디 내보셨어요?”


“뭐 처음에는 관리직에 내봤는데 연락이 없고..., 펜대만 굴리던 사람이라 할 줄 아는 게 없어 경비라도 할까 싶어 내봐도 안 불러주네요.”


“경비는 안 돼요. 경비야 말로 전문직입니다. 그 뭐냐, 청원경찰 하셨던 분들이 퇴직하고 오고, 경찰 공무원이나 군인이셨던 분들이 오고, 전기기능사 이상에 안전 무슨 자격증에..., 저도 서류에서 바로 탈락했어요.”


“그렇군요. 그럼 어디 면접 보고 오셨어요?”


“시니어 클럽이요. 공공 일자리라 하루에 3시간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말도 마세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대기하는 사람도 많고.”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퇴직 전 공로 연수받으며 대형 버스 면허도 따고, 지게차 자격증도 따고 했는데, 소용없어요. 자격증만 있으면 뭐 합니까? 경력이 없는데...,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누가 써주겠어요.”


“공공 일자리는 공공 일자리대로 저보다 나이가 많고 소득이 적은 분들 우선이라 그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내가 몇 살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웃으면서 모른다고 하면, 그들은 나를 한심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나이쯤은 알고 있어야지요.”

그들이 이렇게 말하면 나는 아무 말 없이 모른 채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몇 살이냐는 것은 곧 몇 번 달을 보았느냐는 뜻이다. 이것을 세고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해롭다. 보통 인간들은 일생에 몇 차례 달을 보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셈을 맞춰 보고 이미 많은 세월이 지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제 나는 곧 죽을 거야."

그러면 더 이상 기쁨을 느낄 수 없고 얼마 후 진짜로 죽게 된다.

에리히 쇼이어만 저/김범경 역(2006), 빠빠라기, 하서 출판사, pp.92~3.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삶에서 나이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도서관 카페에서 나눈 두 분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이를 기준으로 퇴직을 맞이하고 그 숫자에 맞추어 사회적 쓰임새를 박탈당하는 현시대의 상황을 아프도록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조직에 몸담아 경력을 쌓아왔을 두 사람 모두 단시간 일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운 것이 퇴직자들의 현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무거워졌어요.


나이란 『빠빠라기』 속의 투이아비 추장이 말한 것처럼 단지 인생이라는 흐름 속에 잠시 찍히는 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일자리를 찾으시는 두 분뿐만이 아니라 모든 퇴직자가 퇴직 후의 시간을 할 일이 없어 다시 일자리를 찾는 게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는 자유의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퇴직을 맞이하기 전에 기업에서 실시하는 공로 연수 프로그램이 실질적인 삶의 전환을 도울 수 있도록 더욱 충실해져야겠죠. 사회 적응 프로그램도 있어야 합니다. 어느 공공기관에서 이사로 퇴직하신 분이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을 줄 몰라 반나절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명예나 사회적 지위의 유효기간은 조직의 꼬리표가 사라짐과 동시에 소멸됩니다. 퇴직자들이 과거의 영광이나 나이라는 숫자의 감옥에 갇혀 있지 않도록, 그리고 퇴직이라는 시간이 설렘이 될 수 있도록 안전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도서관에서도 한몫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