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모 Mar 24. 2016

양 한마리

내가 아닌 네가 원하는 것을 그려주기.


2.
그래서 여섯 해 전에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가 고장을 일으킬 때까지 나는 가슴을 열어놓고 진실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나지 못한 채 혼자서 살아왔다. 엔진이 고장난 것이다. 그런데 기술자도 승객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수선을 나 혼자서 해보려고 작정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겨우 여드레 동안 마실 물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니까. 첫날 밤, 나는 사람 사는 곳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사막에서 잠이 들었다. 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뗏목 위의 표류자보다 나는 더 외로운 처지였다. 그러니 해가 뜰 무렵, 작고 야릇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양 한마리만 그려줘!"
"뭐라구?"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후닥닥 일어났다. 두 눈을 비비고는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정말로 이상하게 생긴 조그만 사내아이가 나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에 실린 것이 훗날 내가 그를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근사한 그림이다.
물론 내 그림이 모델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탓이 아니다. 내가 여섯 살 적에 어른들 때문에 가로서의 장래를 포기하고, 속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하는 보아구렁이밖에 그림이라고는 도무지 배운 일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나는 그의 느닷없는 출현에 눈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사람 사는 고장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그런데 이 어린 친구는 길을 잘못 든 것 같지도 않았고, 몹시 고달프다든가, 배가 고프다든가, 목이 마르다든가, 무서워서 벌벌 떤다든가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사람 사는 고장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아이다운 표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내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넌 거기서 뭘하고 있는 거냐?"
그러니까 그애는 무슨 아주 중대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만히 같은 말을 되뇌었다.
"아저씨......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너무도 이상한 일을 당했을 때에는 그것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 사는 고장에서 수천 마일 떨어져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참으로 엉뚱한 짓이라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과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나 나는 특히 지리니 역사니 산수니 문법이니 하는 것만을 배운 일이 문득 생각나서 약간 화를 내며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아,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양은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그릴 줄 아는 두 가지 그림 중에서 하나를 그려 보였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보아구렁이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어린 친구는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언제 뱃속에 코끼리가 들어 있는 보아 구렁이를 그려 달랬어? 보아구렁이는 매우 위험한 거야. 그리고 코끼리는 너무 거추장스럽고. 우리집은 아주 작아. 난 꼭 양이 필요해. 양 한마리만 그려 줘."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양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틀렸어! 이건 벌써 잔뜩 병이 들어 있는걸. 다시 하나 그려줘."
 그래서 나는 또 그렸다.
 그러자 어린 친구는 관대하게도 생글생글 웃었다.
"이봐, 아저씨...... 이것은 양이 아니잖아, 뿔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또 다시 그렸다.
 그러나 이것도 먼젓번 것들처럼 퇴짜를 맞았다.
"이건 너무 늙었어, 난 오래 살 수 있는 양을 갖고 싶어."
 기관을 뜯어야 할 일이 급해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 이그림을 아무렇게나 끄적거려 놓고 한마디 했다.
"이건 상자야, 네가 갖고 싶어하는 양은 이 속에 있다."
 그러자 뜻밖에도 어린 재판관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게 바로 내가 갖고 싶어하던 그림이야! 이 양은 풀을 많이 줘야 할까, 아저씨?"
"왜 그런걸 묻지?"
"우리집은 아주 작으니까 말이야......."
"그거면 넉넉할 거야, 내가 준 양도 아주 작은 것이니까."
 그는 머리를 숙이고 그림을 들여보면서 말했다.
"그렇게 작지도 않아...... 양이 잠들었어......."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왕자를 알게 되었다.




내가 아닌 네가 원하는 것을 그려주기.


예사롭지 않은 어린왕자의 등장으로 비행사는 적잖게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묵묵히 어린왕자가 원하는 양을 그려줄 때까지.

어른으로서의 아이를 향한 기다려줌이 느껴진다.

우리는 얼만큼의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마음을 진득하게 받아줄 수 있을까.

뭐든지 빨리빨리 해치워버리기 바쁜 일상속에서.

어린왕자의 두번째 이야기는 "조금더 천천히"라는 숙제를 내게 안겨주는 것 같다.

또 하나,

비행사는 코끼리를 삼켜버린 보아 구렁이를 볼줄 아는 어린왕자가 아마도 반가웠을 것이다.

어느새 어른으로 (여기서 말하는 지리니 역사니 산수니 문법이니 하는 것만을 배운일)

비행사 자신안에 묻혀야했던 순수했던 어린날의 감성들이 다시 되살아나듯

마지막 상자에 담긴 양의 그림은 정말이지.

나에게 상상으로 바라볼수 있는 눈을 가르쳐주는 것 같다.

모처럼 봄햇살을 받고 있는 나는,

어린왕자의 한구절 한구절이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 같아.

힘든일의 고단함을 녹여주는 것만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B 612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