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가장 서툰 방식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주 많이.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왜였을까?
거슬러 올라가 보니, 일본 소설에 한창 빠져있던 20대 초반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척하는, 그 시니컬한 주인공들이 멋있어 보였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무심한 척’하며 살아봤다.
확실히, 무심한 편이 상처를 덜 받기는 했다.
그리고 그렇게 '척'하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모습이 진짜 내가 되어 버렸다.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면 참 무방비한 사람이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억지로 끼워 맞춰 이해하고,
한번 마음으로 들어오면 다시 밀어내는 일은 나에겐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상처를 받고 천천히 쌓여갔다.
별일 아닌 듯 웃었지만, 돌아서면 작게 스멀거리는 그런 종류의 상처들.
어느 날부터 나는 마음의 문을 반쯤만 열어두기 시작했다.
‘관심 없는 척하기.’라는 가면 하나 걸어두고.
마치 사람을 너무 좋아해 경계심 없이 마구 다가가던 강아지가, 조심성 많은 고양이가 되어버린 것처럼.
고양이가 된 나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털을 잔뜩 세우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내려다본다.
아주 빠르게 상대를 스캔하고,
내 마음속 기준에 따라 ‘호/불호’를 나누고,
그에 맞는 버전의 ‘나’를 꺼내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거의 무조건 ‘불호’다.
그렇게 벽을 쌓고 상대를 지켜보다,
‘봐라, 역시 그럴 줄 알았지’ 하는 순간이 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이미 내 안에서 그 사람을 완성시켰으니까.
이렇게 고양이로 위장하고 살면
상처를 받아도 티가 덜 난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너무 빨리 벽을 쌓아놓은 탓에
뒤늦게 “아, 저 사람… 꽤 괜찮은 사람이었네”
하고 아쉬움이 남았던 적도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던 ‘불호의 기준’은 사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다.
감추고 싶은 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
그 모습을 타인을 통해 보게 될 때, 더 날카롭게 반응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호’라고 느끼는 사람의 기준 중 첫 번째는 바로 '선입견 없이 무해하게 다가오는 사람'이다.
결국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겠지.
내 마음을 내가 모르고 살고 있으니
산다는 건, 참 쉽지 않다.
하지만 요즘 나는
내 마음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려 애쓰고 있다.
다시 예전처럼,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며 달려가는 강아지가 될 순 없겠지만,
개냥이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젠 웬만한 상처는 스스로 회복할 만큼 단단해졌으니까.
나는 오늘도,
고양이와 강아지 사이 어디쯤에서
나를 천천히 길들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