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엄마 없는 아이: 조각난 기억들

by 모모

나는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다.

언제부턴가 잊지 않으려 애써 간직해 온 기억들마저, 모두 조각조각 나 있다.


기억이란 함께 공유하고 곱씹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추억이 되어 머릿속에 오래 저장되는 법이다.

하지만 나에겐 어린 시절을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 스스로가 그 시절을 들춰내기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잠을 자며 엄마 이야기를 해주곤 하셨다.

영상을 찍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던 시절, 엄마는 카세트에 마이크를 연결해 우리가 노래하고 노는 목소리를 담아두셨다.

외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그 녹음테이프를 듣고, 듣고, 또 들으셨다.

우리 목소리 사이로 엄마의 음성이 들릴 때면 수없이 되감기를 반복하며 엄마 목소리를 들으셨다.


하지만 그 모든 회상의 끝은 늘 울음이었다.


한꺼번에 두 딸을 잃은 할머니의 심정이 어땠을지,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고 사무치게 보고 싶었을지.

그렇게라도 딸의 흔적을 붙잡아두고 싶으셨을 할머니의 마음을 그 어린 내가 알 턱이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울며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꽉 끌어안는 그 반복되는 슬픔이 거북하기만 했다.

할머니의 품속에서 나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에게 엄마와의 기억은 곧 울음이고 슬픔이었다.

그래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엄마와의 기억을 마음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내며 묻어버렸다.


그럼에도 찰나의 기억들은 불쑥불쑥 고개를 든다.

제법 앞뒤 맥락이 이어지는 짧은 영상 같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희뿌연 안갯속에 갇힌 단편적인 장면들이다.

마치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처럼, 잘려 나간 필름 조각들이 제멋대로 이어져 돌아가는 기분이다.

어떤 기억은 너무도 흐리고 아련해 때로는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다.


나의 조각난 기억이 어느 정도 퍼즐을 맞추게 된 것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40여 년이 지나서였다.

상처가 상처인지도 모르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지냈던 수십 년의 아픔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던 그해.

마흔 중반이 된 우리 자매는 그제야 처음으로 함께 엄마를 추억했고,

나는 내 머릿속에 떠도는 파편들에 대해 물었다.


두 살 많았던 언니는 나보다 기억하는 것이 많았다.

그 덕에 나의 단편적인 장면에 서사가 생겼고, 허구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던 뿌연 장면들에 비로소 색이 입혀지고 숨이 불어넣어졌다.


그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종종 엄마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암묵적으로 금기시했던 어린 시절과 서로의 상처를 꺼내놓았다.

그해, 나는 지독하게 가슴앓이를 했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참 많이도 아팠다.

하지만 그 상처투성이의 나를 용기 내어 마주하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다른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엄마 잃은 작고 가여운 아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큰 사랑과 귀여움을 온몸으로 받으며 해맑게 웃고 있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나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무한한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 없는 티'가 나지 않도록, 우리 삶에 '그늘' 한 점 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낸 것은 오직 그들의 지극한 마음 하나였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상처를 애써 숨겼던 게 아니라, 그 상처가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정한 사랑과 해맑은 기쁨 같은 눈부신 감정들이 이미 그 자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 없어 가여웠던 그 어린 날들이,

사실은 내 생애 무조건적인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마지막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따뜻한 기억 덕분에 나는 이제나마 나의 이야기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이제 조각난 기억들 사이에 남아 있던 고마운 얼굴들을 하나씩 꺼내 보려 한다.

이제는 관계가 소원해진 이도 있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기억을 놓아버린 사람도 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는 내 마음을 꼭 말해야 할 것 같다.

당신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밝게 자랄 수 있었다고.

나도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푸는 어른이 되겠다고.

당신들이 준 사랑을 내 삶의 어딘가에서 이어나가겠다고 말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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