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엄마 없는 아이: 아빠라는 우주

아빠의 무릎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했던 아이

by 모모

나의 조각난 기억 속에서,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 첫 번째는 바로 아빠다.

나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준 사람.

세상이 무너져도 어디선가 나타나 나를 구할 것만 같은 나의 슈퍼맨, 아빠 이야기다.


조금 더 일찍 글을 쓸 마음을 먹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뒤늦은 후회가 남는다.

이제는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보듬어 줄 기회조차 기억 저편으로 흩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아빠는 기억을 잃었다.

그렇게 소중하게 품었던 딸들조차 이제는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 아빠는 치매 환자다.


# 아빠와 나의 <딱따구리>


엄마가 없던 그 시절, 나는 한글을 잘 읽지 못했다.

당시 난 <딱따구리> 만화 영화를 엄청 좋아했는데, 주제가가 끝나자마자 그날의 제목이 나왔다.

문젠 그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제목을 난 읽어낼 수가 없다는 거다.

광고 하나 놓치지 않고 눈 빠지게 집중하던 나였기에, 첫 제목부터 막혀버리는 건 정말이지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언니를 불러보지만 귀찮은 듯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할머니는 저녁 준비로 한창인 시간.


그때 현관문을 열고 아빠가 들어선다. 나의 구세주!


"아빠! 딱따구리 시작했어!"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게 부르면, 아빠는 군화 끈을 허겁지겁 풀어 던지고 한달음에 안방으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나를 번쩍 안아 아빠 무릎에 앉히고는 다정하게 제목을 읽어주셨다.


부엌에서는 할머니가 요리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아빠의 무릎 위에서 딱따구리를 본다.

그때의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아빠와 함께 보던 딱따구리는 나에겐 곧 사랑이었다.

온종일 그 순간만을 기다리던, 아빠가 조금이라도 늦을까 봐 초조해하던 그때의 마음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 나의 대나무숲


엄마가 돌아가시고, 언니와 나는 번갈아 가며 아빠와 같이 잤다.

처음엔 셋이 다 같이 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한 명씩 아빠와 온전한 시간을 보내고자 순번을 정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아빠랑 자는 날이면, 아빠는 다음 날 졸린 눈을 부여잡고 출근하느라 꽤나 고생하셨을 것이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나는 재잘재잘 말이 엄청 많았다.

그날 있었던 하루치 이야기를 아빠에게 다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TV에서 본 광고 이야기까지 하며 말이다...


"아빠, 내가 오늘 TV에서 피노키오 책상을 봤거든? 그게 엄청 좋은 거래.. 어쩌고 저쩌고.."


끝도 없는 내 수다를 아빠는 단 한 번도 끊은 적이 없었다.

나보다 아빠가 먼저 잠든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아빠는 나에게 '대나무숲'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주고, 무엇이든 쏟아내도 괜찮은 세상 유일한 존재.


아이를 키워보니 그때의 아빠 마음이 어렴풋이 짐작된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 잃은 어린 막내딸의 하루를 지켜내셨다.

나의 하루를 함께 나누고,

내가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밤을 내어주시면서.


# "난 너희를 혼낼 수가 없었어"


남편과의 만남을 반대하던 아빠가 결국 결혼을 허락하며 내게 하신 말씀이다.

아빠는 엄마가 떠난 그날 이후, 자신에게 약속했다고 한다.


'난 이 아이들에게 사랑만 주겠다. 엄마 잃은 아이들의 마음에 다시는 상처를 주지 않겠다.'


평생 그 약속을 지키며 우리를 키웠는데, 딸의 결혼을 반대하며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아빠를 가장 아프게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자라면서 아빠에게 혼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빠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중학교 무렵 이사를 하면서 아빠와는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다.

일이 많아 주말에 오지 못하는 날이면, 아빠는 평일에 잠시라도 들러 자고 있는 우리 머리맡에 편지를 써서 책상 위에 올려두곤 하셨다.

자고 일어나 아빠의 편지를 발견할 때면, 아빠가 잠시라도 우리를 보러 다녀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아빠가 꾹꾹 눌러쓴 글자들에서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방패를 느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나에게는 아빠가 있다. 나를 지켜줄 나의 슈퍼맨, 우리 아빠 말이다.


글을 쓰며 과거를 떠올려보니 나는 참 행운아였던 것 같다.

우리에겐 우리가 전부였던 아빠가 있었고,

또 우리를 모른 채 하지 않고 지켜주려 했던 많은 이들이 곁에 있었으니까.


지금 아빠에게 과거의 기억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 아빠와 함께 있어도 난 아빠가 그립다.

아빠를 느끼기 위해선 사진첩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아빠의 표정과 목소리를 꺼내야 한다.


아빠가 내 어린 시절을 충만한 사랑으로 지켜주었듯,

이제는 내가 아빠의 남은 인생을 그 사랑으로 지켜내고 싶다.


아빠의 하루를 평안하게 온전히 지켜내면서.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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