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축구에 빠져 살던 아들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야구다.
이제 아들은 아빠와 나란히 앉아 야구 프로그램을 보고 야구 이야기를 나눈다.
타자와 투수가 되어 종일 공을 던지고 배트를 휘두르는 연습을 하더니, 급기야 야구공과 글러브를 사서 ‘캐치볼’을 시작했다.
캐치볼이라니.
남자 형제가 없던 나는 남자들이 캐치볼을 하며 노는 걸 대학생 때 처음 봤다.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간격을 두고 서서 끊임없이 공을 주고받는 모습.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내 눈엔 그게 그렇게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가 없었다.
공을 엄청나게 빠르게 던지는 것도 아니고, 멋진 폼을 연습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고들 있나 싶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요즈음 머릿속이 온통 야구로 가득 찬 아들은 내게 종일 설명한다.
“엄마, 공을 잡는 방법이 네 가지 있거든? 이렇게 잡으면 말이야...”
그립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구질도 완전히 달라진단다.
그걸 수없이 반복해야 자기에게 맞는 법을 터득하게 되고, 비로소 잘 던지고 잘 받게 되는 모양이다.
집안에서는 글러브를 길들인다며 글로브를 공으로 연신 내려치고, 발로 밟아댄다.
또 둘이 호흡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예전에 그토록 무의미해 보였던 캐치볼이 결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이제는 그 사소한 공놀이를 위해 정성을 다해 공을 들이고 몰입하는 두 남자의 뒷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한다.
역시,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언젠가 숲해설가와 함께 수목원을 돌아본 적이 있다.
그전까지 내게 초록색 잎과 알록달록한 꽃들은 그저 눈과 마음을 정화해 주는 ‘힐링 아이템’ 일뿐이었다.
예쁘고 싱그럽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던 존재들.
하지만 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니 그들의 생김새 하나하나에도 치열한 서사가 담겨 있었다.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전략이자, 번식을 위한 수많은 ‘삶의 이유’들.
꽃잎에 새겨진 점박이 무늬와 나뭇잎에 돋아난 까칠한 털, 서로 다른 두 종이 이웃처럼 붙어사는 사연까지...
그렇게 숲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나무와 꽃들이 달라 보였다.
이제 그들은 내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배경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소중한 생명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연이 경이로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물론 지금 그 설명들을 다 기억하진 못한다.
다만 이제는 스치는 작은 들꽃에서도 그들만의 스토리를 상상하며 걷곤 한다.
나무와 꽃들이 나에게 전보다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달까.
그 이야기들이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기에, 나는 마음이 힘들 때마다 그들을 찾아간다.
이런 발견의 기쁨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이어진다.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하든, 마음을 나누다 보면 아주 작더라도 반드시 하나는 새로운 걸 얻고 배우게 된다.
대화를 통해 '앎'이 늘어난 만큼 나의 세계도 넓어지고 새로워진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참 좋다.
그렇듯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묘한 쾌감을 준다.
세상은 모두에게 똑같은 풍경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얼마나 깊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내가 ‘아는 만큼’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며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공들여 배운 만큼 세상이 선명해진다는 사실만큼은 꽤 정직하고 공평하게 느껴진다.
무언가 하나라도 더 알게 된 날이면, 내 세상에는 새로운 창문 하나가 더 생긴다. 그래서 어제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흥미롭다.
오늘 하루를 지나고, 나는 또 무엇을 더 보고 느끼게 되어 있을지.
세상을 산다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