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시를 보면 원시시대 때 가족이 함께 지내는 시간, 놀이... 가족의 유대는 더 많았고 깊었다고 한다. 노등은 그 날 먹을 만큼의 사냥을 하면 되었기에 하루 3~4 시간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도 사냥시간을 줄이고 노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발명한 게 아닐까.
현재 아프리카 피그미나 남미 원주민, 자바 섬과 호주 애보리진인 들의 삶은 그 원시시대의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고도 한다.
이들을 점령한 서구 백인들은 이들의 삶에 대해 단지 게으르고 더럽다고 하며 문명화시키려 강제적 수단을 사용했다. 우선 옷을 입게 한 것이었다. 부자유를 강압으로 입혔다. 한편 약탈을 하고자 이들에게 마약이나 술을 먹여 나태하게 해놓고는 역시 게으름을 탓하며.약탈과 학살을 정당화 했다. 그 대표적인 인간이 콜럼버스다. 우리는 어렸을 때 이 학살자를 위인전애서 그를 처음 만났다. 콜럼버스는 나치가 유대인 등 600만 명을 죽인 그 수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많은 중남미원주민을 학살하고 여러 민족을 멸망시키기까지 했다.
인간의 오랜 조상의 모습을 우리마당의 고양이들에게서 본다.
"저렇게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
문명이 붙여진 이래 인류에게 평화는 추구만 할 뿐 끝내 쟁취하지 못할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평화는 우리 몸의 DNA 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으로 꼬리뼈의 흔적과 같은 것인가.
회귀할 수 없는 희망을 부질없이 부여잡으려 하는 허욕이 되고 만다. 무수히 많은 평화회의니 정상 간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세계 도처에서 평화는 번번이 깨지고 있는 작금의 인류를 보면서 평화추구는 단지 방사선으로나 추정될 100만 년 전의 원시본능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과거회귀... 좋았던 옛시절에 대한 그리움... 낭만을 위하여... 단지 그 본능은 남아있어 그 DNA 속의 평화를 염원하고만 있는 것일까, 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고양이들의 세계를 보며...
사람이 절대 우선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들고 더불어 함께 가야할 자연으로 깨닫게 한다.
이 좁은 마당에 밤나무 잎들 사이로 뭔가 움직여 보니 바람이 아니라 새들이다. 그 아래 마당에선 고양이들이 뛰어놀고 새와 고양이 사이엔 나비며 잠자리며... 자유와 평화는 저들이 누리고 있단 생각도 한다.
77. 어미 향한 새끼의 마음
젖을 먹이다가 일어나 돌아 걸어가는 어미를 보는 가야금.
하픔을 하며 어딘가 가는 어미의 뒷모습을 고개 돌려 바라보는 새끼의 심정이 여러가지로 보인다.
그 중 하나 고마움.
나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야금이의 눈과 그 위 못에 찔린 상처가 많이 아물어가고 있다.
그렇게 자주 핥아주더니... 결국 해내는구나.
이래서 일 것이다.
고마움이 든 건 내가 꺄니에게도 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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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가족을 매일 만나면서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면 고양이와의 감정나눔으로 내게도 깃들고 있는 평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