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씨 May 26. 2023

공교육이 나쁘냐고?

더 대단하고 특별하려고 대안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야, 자기가 한국을 잘 몰라서 그런데..."



벌써 한 시간 째다.

대안학교를 보내기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전화와서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떠한 개념을 한참동안 설명한다. 기나긴 설명 안에는 한국의 문화도, 한국의 교육도, 한국의 미래도 다 담겨 있다. 결국 그녀가 내게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이가 대안학교를 가게 되면서부터 나는 갑자기 보통 평범한 엄마에서 조금 다른 엄마가 되었다. 나는 그냥 하룻밤을 더 잤을 뿐인데, 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뭐라 말로 꼬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잠자코 시간을 두고 한 번 보자는 그런 소회가 담긴 눈빛이랄까. 나의 선택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생각이 많았다. 거주지에 소속된 초등학교를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 속에서 자신이 결정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나 보다. 이미 결정한 것을 다시 점검해보면서 그 결정에 가치가 부여되었다. 가치를 부여하니 옳다는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을 가지니 마음이 평안했다. 마음이 평안하니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설득. 그녀가 나를 설득하는 지점에 와서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나의 선택이 불편했구나. 한국에서 친밀감은 곧 동질감이구나. 내가 그녀와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온 것이구나.



한국인처럼 생겼지만 한국인처럼 생각하지 않는 나에게 이런 생각의 흐름은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모른다. 물론 귀국 전보다 훨씬 더 다름을 깊이 수용하고 인정하는 분위기는 형성되었지만, 언제까지나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한해서인 것 같다. 즉,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 내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이 아닌 거리감이 뚜렷이 느껴지는 '어느 공간의 어떤 사람들'의 다름이 이해되는 것이 아닐까. 친밀하기 때문에 생각도 선택도 동일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제서야 나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달라진 시선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보내고 싶은 이유가 뭐야?"


그녀가 물었다.


"이게 우리 가정의 정체성에는 맞는 길이어서."


"그게 무슨 뜻이야? 자기야, 요즘 공교육도 엄청 좋아. 선생님들 퀄리티가 얼마나 높아졌다구. 요즘 교실도 얼마나 깔끔하고 직관적으로 해놨는데. 창의교육도 많이 하고, 시스템이 정말 좋아."


"알아. 시스템이 안좋을 것 같아서, 선생님들 가르치는 스킬이 부족해서, 창의교육을 못할까봐 대안학교를 보내는 게 아니야. 나와 아이의 정체성의 색깔이 비슷하길 바래서 그러는 거야. 한국 정서와 세계 어떤 나라들의 정서가 섞여 있는 나의 정체성의 색깔과 한국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의 정체성의 색깔이 비슷해지면 좋겠어서 그런 거라구. 그래야 우리가 같은 페이지에서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나는 아이랑 계속 대화하고 싶은데, 내가 아이를 이해하지 못할까봐 또는 아이가 나를 이해할 수 없을까봐, 그래서 나는 조금이라도 정형화된 한국 정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대안학교를 선택한 거야. 애가 커도 계속 대화하고 싶어서."



그녀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계속되는 질문에 대답하며 조금 커진 내 목소리가 신경쓰였다. 내가 먼저 말을 할까,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그냥 그렇게 복잡한 것은 몰라. 근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그게 맞겠지."


엉거주춤하듯 무언가 편안하지 않게 전화를 끊으며 나도 마음 한 켠이 불편해졌다. 다 이해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공교육이 나쁜 것도, 공교육에 가면 대화가 안된다는 것도, 공교육이 싫어서도 아닌데. 왜 공교육을 결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공교육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걸까. 그냥 다른 건데. 그냥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우리 가정의 정체성과 좀더 잘 맞다는 건데. 왜 같은 길을 걷지 않으면 친해질 수 없는 걸까. 왜 같은 선택을 해야만 같은 범주에 속해 있어야만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더 대단하고 특별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대안학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공교육을 특별히 싫어해서도, 선생님들을 못믿어서도 아니다. 대안학교라고 무조건 좋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대안학교를 졸업하면 대단히 창의적인 일을 할 거라는 보장은 또 어디 있는가. 대안학교의 선생님은 무조건적으로 성품이 뛰어나다는 것은 보장 가능한 것인가. 아이가 만나야 하는 사람들, 겪게 되는 사건들 이 모두는 사람 사는 곳이면 다 비슷하다. 어딜 가도 이상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며 내가 그 모두를 통제하거나 관여할 수 없다.



나는 그냥 결이 같길 바랄 뿐이다. 나와 남편과 아이들의 결이 같길. 결이 같은 사람이 되길. 그래서 언제나 서로 생각하고 대화하는 것이 즐겁길. 공교육이 더 나쁜 것도, 대안학교가 더 좋은 것도 아니다. 그냥 우리 가정의 정체성이다. 우리 가정의 색깔이다. 우리 가정의 삶이다.



친밀감은 동질감이어야 하는 그녀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아마 그 생각에 균열이 가는 것이겠지. 나는 묵묵히 옆에서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같은 생각이 아니더라도, 같은 길을 걷지 않더라도 친밀할 수 있음을. 곁에서 기다리며 보여준다. 한국문화는 참, 어렵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른 초등학교에 가는 것은 어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