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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달 Oct 09. 2020

힘들어야 힘이난다

독일 노인슈반슈타인 성 드로잉

2020.10.9.금


온라인드로잉 모임을 하고 있다. 그림이라곤 그려본 적이 없는 내가, 중년의 나이에 난생처음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게 2월이니.. 어느새 8개월이 지났다. 새벽달람쥐 덕분이다. 남고 미술샘인 달람쥐를 만난 인연으로, 그가 이끌어주는대로 매주 만나 그림을 그리다보니 어느새 드로잉은 내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귀한 놀이가 되어 버렸다. 온라인드로잉모임은 70여명에서 시작했는데, 매주 주어지는 미션의 그림을 그려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수십명의 엄마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명절에 전 부치다가도 그림을 기어코 그려서 탈락하지 않고 살아내고 있다.


매주 주제도 다양하다. 강아지그리기, 풍경그리기, 남자배우 얼굴 그리기, 모닥불 그리기(불을 어떻게 그리냐고요 ㅠㅠ), 영화포스터 그리기, 발레리나 그리기(근육 표현, 몸의 비율 폭망), 내가 사랑한 꽃 그리기, 나의 최애 음식 그리기, 내가 사랑한 여행지 그리기, 데이비드 호크니 할아버지 따라 그리기.. 까지 용케 잘 따라왔다. 그런데 이번주 주제는 독일의 노인슈반슈타인 성 그리기다. 헐.. 어쩌라고..


이걸 도대체 어떻게 그리란 소리냔 말이다. 늘 흰 종이 앞에서 그 주의 미션드로잉을 할 때마 드는 생각이, 이번주도 망했네. ㅇㅔ휴. 모르겠다. 걍 대충 하자. 써바이벌을 하고 싶으니. (이 집단에서 절대 낙오되지 않을꼬야. 난 10년 후 프랑스르부르박물관에서 그림 그리고 있어야 하니껜)


날마다 드로잉을 하는데, 주로 늦은 밤에 그린다. 나나 남편이나 술을 좋아해서 술한잔 하면서 남편은 테니스나 골프 경기를 보고 난 그림을 그린다. 예전에는 늘 일(유튜브편집)에 치여 저녁 먹고는 서재로 들어가 쳐박혀 일만 했는데, 요즘은 자기 옆에서 그림도구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니 남편이 좋아한다. 엄마가 항상 고픈 어린아이처럼, ‘엄마는 여기 내 옆에 앉아 있어. 나는 레고 만들고 있을께’ 하는 아이처럼 늘 그렇게 마누라를 옆에 두고 싶어하는 남편이 참 부담스러웠는데, 드로잉이 큰 일을 해냈다. 나도 방해꾼(?) 없이 그림을 그리고 남편도 마누라를 옆에 두고 가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으니 윈윈이다. ‘넌 니가 좋아하는 그림 그려. 내 옆에만 앉아 있으면 돼’ 하는 남편이 짠하면서도 고맙다. (아 또 삼천포로..)


그렇다. 그렇게 내가 그리는 그림들은 공교롭게 다 ‘취중드로잉’. 첫 시작은 말짱한 정신이지만.. 막판에 가면 술기운이 도는 건지, 그림그리는 그 순간이 행복해서인지..  서서 춤추면서 그린 적도 있다. (상상하니 이상한 주사다) 그러나 이 망할놈의 성 그림은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구도를 잡을 길이 없었다. 성의 아랫부분부터 그려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너무 크게 그리다보니 윗성이 잘리고.. 오른쪽 집중해서 그리고보니 너무 커서 왼쪽 대칭부분은 어쩔.. 정신이 아찔해지고. 자꾸 지워야 하니 짜증이 나고. 안되겠다 싶어서 아이패드에 사진을 가져와 그리드 선을 그렸다. 대칭과 구도가 맞지 않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하는 이 성질머리도 문제다. 구도를 깬 화가들의 그림도 있는데 난 왜이렇게 구도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그리드선을 그리고 자로 재듯 그리니 그나마 안정감 있는 구도가 잡혔고. 나는 절망에서 아주아주 코딱지만한 크기의 작은 희망을 보고, 그래 포기하지 말자. 완성은 하고 보자.라는 마음으로 꼬량주 한잔, 마라탕 한 국물을 마시며 그림을 그려갔고.. 영원히 끝맺음 못할 것 같은 그림은 끝내 완성 되었다.



난 가보지도 못한 성이건만, 성의 구석구석을 어설픈 펜놀림으로 그리고 있자니, 나는 어느새 이 성문을 열고 저 정원을 걷다가 저 모퉁이 계단을 올라 성의 뒤쪽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저 꼭대기 탑에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초록의 장관을 내려다보는 상상도 하게 되고.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지? 나무를 좀더 세세히 그리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고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나서 위에서 그림을 내려다보니, 오마이갓. 오빠, 이게 정말 내가 그린거 맞아?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잠깐만, 이제부터는 내가 뒷처리 할께. 넌 구경이나 하셔’ 하고 완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 힘들고 어렵고 막막해서 몇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던 것이 불가 2시간 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남편이랑 주식 얘기, 트럼프 얘기, 사람들 얘기 하다가 어느새 완성한 그림이 놀랍기만 하다.


이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다시한번 깨달은 것이 있다면, “힘이 드니까 힘이 나는구나.” 이 힘든걸 해내니까 뿌듯한 성취감이 배가 되는구나. 그리기 쉽고 늘 그리던 그림이었으면 이토록 기뻤을까? 앞으로는 그 어떤 힘든 미션이 주워져도 ‘난 못해’ 포기하기보다 오늘의 기억을 떠올릴 것 같아. ‘해보니 되잖아. 안된는 건 없던데. 잘못그린 그림은 없던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드로잉을 완성한 내가 참 대견하다.

넌 참.. 뭐랄까. 뭐든 한다면 해내는 인간이구나.

네가 나라서 참 좋아. (참고로 저 취한거 아니고 대낮에 아메리카노 마시면서 글 쓰고 있어요.)


여러분, 힘들면 더 기를 쓰고 ‘마무리’ 하세요.

그러면 그 덕에 여러분은 계단 몇개를 단숨에 뛰어 넘게 되요.

영어도, 운동도, 글쓰기도, 드로잉도.


힘이 들어야

힘이 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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