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극세사 이불 하나면 충분한 37개월
"율이야, 너무 더워."
37개월 율이가 고개를 젓는다. "안돼~ 내 이불!"
제작년 겨울, 따뜻하게 자라고 산 극세사 이불. 작년 무더위에도 율이는 그 이불을 덮고 잤다.
"시원한 냉감이불 어때? 베개도 있어." 새로 산 냉감 세트를 보여줬지만 율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어. 이불~"
에어컨을 틀어놓고 두꺼운 극세사 이불을 덮는 모순.
하지만 율이에게는 전혀 모순이 아니다.
평소에는 이불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놀러 나갈때도, 어린이집 갈 때도 그냥 간다.
하지만 1박을 자는 여행 때는 다르다. "이불 가져가야 해!" 율이가 확실하게 말한다.
할머니 집에 갈 때도, 하룻밤 어디든 자고 올 때도 반드시 이불을 챙긴다.
아이만의 기준이 있는 것 같다.
율이에게는 이불 나눔의 룰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이불 귀퉁이를 내어준다.
"엄마, 조금." 이불 끝자락을 내 쪽으로 살짝 밀어준다.
"아빠, 여기." 아빠에게도 귀퉁이를 양보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안 된다. "내 꺼!" 이불을 꽉 움켜쥔다.
몇 달 전, 그 이불이 품절되었다. 똑같은 제품을 찾아 인터넷을 뒤졌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괜찮아. 똑같은 회사에서 나온 새로운 극세사 이불이 있어."
같은 브랜드, 같은 극세사 소재. 색깔만 조금 다른 새 이불을 주문했다.
'아이가 좋아할 거야.' 논리적으로 생각했다.
새 이불이 도착했다. 포장을 뜯으며 율이에게 보여줬다.
"율이야, 새 이불이야! 똑같은 극세사야, 더 부드러워."
율이가 잠깐 만져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돼."
"왜? 똑같은 거야. 더 예뻐."
"싫어. 내 이불."
새 이불을 밀어내고 헌 이불을 꽉 안았다.
'똑같은 재질인데 왜?' '더 깨끗하고 새것인데?' '합리적으로 생각해봐.'
내 머릿속은 물음표 투성이다.
하지만 율이에게는 합리성이 중요하지 않다.
냄새가 다르고, 감촉이 다르고, 무엇보다 추억이 다르다.
생각해보니 그 이불과 함께한 시간들이 많다.
처음 혼자 잠들기 시작한 밤들, 아플 때 엄마와 함께 덮었던 시간들, 무서운 꿈을 꿨을 때 꽉 안고 있던 순간들.
율이에게 그 이불은 단순한 침구가 아니라 안전감의 상징이었다.
3개월 후, 현재
새로 산 극세사 이불은 아직도 새것 그대로 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옷장 위에 놓여 있다.
가끔 "이거 써볼까?" 물어보면 율이는 여전히 고개를 젓는다.
말은 느리지만 자기 의사는 확실한 아이.
논리보다는 감정으로, 이유보다는 느낌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37개월.
새것보다 익숙한 것을, 완벽함보다 편안함을 선택한다.
어쩌면 이게 더 지혜로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율이가 이불 귀퉁이를 내밀었다.
"엄마, 조금."
그 작은 나눔 속에 율이만의 사랑 표현이 담겨 있다.
말로는 "사랑해"라고 하지 못하지만 이불 귀퉁이로 마음을 전한다.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기준이 있다.
어른이 보기엔 비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아이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율이의 극세사 이불처럼.
새것보다 소중한 게 있고, 완벽함보다 의미 있는 게 있다는 걸 37개월 율이가 가르쳐준다.
오늘 밤도 율이는 그 이불을 덮고 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불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고민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