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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Oct 26. 2020

당신은 "여전히" 빛나는 사람

당신과 내 안의 신성한 빛에 경배합니다 

나마스테


요가를 처음 시작했던 날, 수업을 마치며 선생님이 “나마스테”라고 인사했다. 함께 수업을 듣던 사람들이 따라서 인사하는 걸 듣고 뒤늦게 엇박자로 “...스테”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요가를 하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인사 “나마스테”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로 인도에서의 인사말이다 혹은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경배드립니다”라는 뜻 정도로 알고 있었다. 요가를 시작한 후 매일 “나마스테”라고 인사하지만 정작 그게 얼마나 멋진 인사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 안에 무슨 신이 있을까. 내게는 뜻에 닿지 못한 인사였다.


그런데 마이솔 수련을 시작하고 나서 매트 위에 선 이들이 정말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없는 아사나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감탄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바뀌었다. 수련을 하러 가면 자주 보는 얼굴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마스크 너머의 얼굴을 상상하며 눈인사를 하는 정도지만, 그렇게 마주치는 눈빛에 요즘 자꾸 내 마음이 담긴다. “어쩜 그렇게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나오세요. 어쩜 그렇게 열심히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처음엔 그저 누군가처럼 아사나를 잘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었는데, 요즘에는 이름조차 모르는 그들의 부지런함이 닮고 싶어졌다. 조금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성스러워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수련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 안에도 신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렇게 집에 돌아와 “나마스테”를 검색해보다 머리를 딩- 한 대 맞고 만다. 


인도 사람들은 신성한 빛이 모두의 심장 속에 존재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저마다의 빛을 지니며 살아간다는 게 너무나 근사하게 들렸다. 그 글귀를 읽는 순간, 수련실에서의 장면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문을 열고 들어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장면은 매트 위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서 있는 낯선 이들의 뒷모습이다. 표정도 없는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그 강인한 에너지를 보는 일이 나는 좋았다. 그 힘을 그대로 받으며 매트 위에 설 때, 그들 존재 하나하나가 매트 위에서 빛나는 것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빛이었구나. 


얼마 전 올린 글의 조회 수가 하루 만에 만 이천을 넘게 찍었다. 그다음 날도 만 명이 넘는 이들이 브런치를 다녀갔다. 며칠간 바쁘게 울리는 알람에 처음에는 의아하다 조금 무서워졌다. 그리고 다시 부끄러워졌다. 뭔가 발가벗고 있는 나를 들킨 기분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그렇게도 많이 읽혔구나 싶었다. 위로를 받았다는 말에 나 역시 부끄럽지만 위로받았다. 그래서 어느 새벽, 친구에게도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또 어느 새벽엔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다 아침에 헤어졌다. 또 어느 새벽엔 친구에게 “걱정 끼쳐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러다 “세상에 뭐가 미안하니” 혼자 중얼거리다 마음은 또 “빛”에 멈추었다. 얼마 전 “난 다시 빛날 거야”라며 슬프게 읊조리던 친구의 한 마디가 마음에 툭 하고 걸렸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람들이 너무 착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세상에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는 만만한 상대를 찾아 탓하게 된다.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그 대상은 쉽게 자신이 되어버린다. “다 나 때문이다” 생각해버리면 쉬우니까. 나 역시 얼마 전 일을 다 마치고도 작가료를 받지 못 하는 일을 당하며 “내가 왜 계약서를 안 썼을까” 자책하며 며칠 밤을 지새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 나 때문이라 생각하고 덮어버려도 어두운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마음이 빛이 들 때가 있다. 


요즘 날이 추워져서인지 입맛이 떨어졌다. 하루에 한 끼 대충 허기를 채울 만큼 먹고 끝내거나, 그마저도 메뉴 고민이 귀찮아 아무거나 주워 먹고 마는 날들이었다. 수련 시간이 다가오자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집 앞 빵집이었다. “그래 대충 빵이나 먹고 때우자” 그래서 빵 하나를 주문하고 계산을 하려는데, 주인아저씨가 세상 밝은 미소로 빵을 건네주며 한마디 했다. “아이고 아직 따뜻해요. 맛있게 드세요” 그 순간 대충 때우려던 끼니를 누군가 나 대신 챙겨준 기분이었다. 참 이상하게도 그 한 마디가 온종일 마음에 남아 빵 대신 내 마음을 뜨끈하게 달궜다. 


또 어느 날엔 가을을 선물 받았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집순이인 탓에 요즘 동선은 집-요가원의 반복일 뿐인데, 간만에 친한 작가 언니를 만나 밥을 먹었다. 카페를 찾다 가정집을 개조한 것 같은 낯선 카페로 들어섰다. 2층 테라스에 우리만 앉아 잠깐 콧바람을 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 마당에는 감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올라와 감을 두어 개 따더니 자기 새끼 자랑하듯 홍시를 먹어보라고 권했다. “상주에서 가져와 심은 감나무예요. 약도 안 쳤어요” 커피 마시러 갔다가 난데없이 갓 딴 홍시를 먹으며, 그녀의 호탕한 웃음을 들으며, 마음에 막혀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터진 듯했다. 아 그래 가을이었구나. 높이 뻗은 감나무를 따라서 덕분에 하늘을 올려다본 하루였다. 맑은 가을하늘이었다. 이렇게 하늘을 본 게 얼마 만이더라. 당연한 것들을 잊고 살면 누군가 한 번씩 툭 하고 튀어나와 귓가에 종을 울린다. 




문이 있다. 종종 열쇠를 잃어버린 문 앞에 서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마음으로 매트 위에 서게 될 때가 있다. 사는 게 팍팍하고, 내가 너무 못나 보이고, 무언가를 망쳐버렸다는 마음으로, 어두운 마음을 질질 끌고 매트 위에 설 때마다 선생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꼬리표처럼 달고 있다. 어두운 마음엔 그게 밑도 끝없이 없이 “하세요”로만 들릴 때도 있었다. 


얼마 전에 “가르바 핀다사나”와 "쿡쿠타사나" 진도를 받았다. 솔직히 누군가 하는 걸 볼 때면 쉬워 보였던 아사나였다. 뭐 그냥 가부좌 틀고 그 다리 사이로 양 팔을 쑥 집어넣어서 만들면 되는 거잖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웬걸, 막상 그 자세를 받고 나니 가부좌를 튼 다리 사이로 손가락 한  마디도 들어가지 않았다. 당황했다. 이미 겪은 부자피다사나, 숩타쿠르마사나처럼 누가 봐도 어려워 보이는 동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찰나의 동공 지진을 아마 선생님도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또 “해봐요. 할 수 있어요”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안 된다니까요. 제가 안 되는 걸 보여드릴게요’ 하는 마음으로 손을 꾹꾹 구겨 넣었는데 하다 보니 또 손목까지 들어가는 거다. 그제야 선생님은 “하다 보면 팔꿈치까지 들어갈 거예요. 그렇게 되면 손을 턱에 괴고” 하며 웃었다. 이게 정말 팔꿈치까지 들어가는 날이 올까. 

가르바 핀다사나 / 쿡쿠타사나


다음 날도 겨우겨우 구겨 넣으며 ‘와 이게 그래도 손목까지는 들어간다’ 신기해하며 다음 자세로 넘어가려는데 그런 나를 선생님이 또 멈춰 세웠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더 깊이 넣어야 하는데” “정말 더 안 들어가요” “팔에 물 뿌리고 해보세요” 피가 안 통해서 창백해진 손바닥을 보며 또 오기가 생겼다. 팔에 물 뿌린다고 이게 또 쑥 들어가냐고요. 그런데 또! 물을 뿌리고 나니 팔꿈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깊게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할 수 없다고 자신했던 순간들이 머쓱해졌다. 내가 또 나를 믿지 못했구나. 살다 보면 나를 믿어주는 말들이 빛이 될 때가 있다. 그 말에 큰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더라도. 


그래서인지 요즘 수련을 하며 한 가지 깨닫는 게 있다. 결국 마음이구나 하는 것이다. 매트 위에선 마음이 곧 사건이 된다. 두려워 멈칫하는 마음이 포기하게 만들거나, 욕심내는 마음이 통증을 만들거나, 딴 곳에 있는 마음이 매트 위에 나를 휘청이게 만들거나, 매트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중심엔 내 마음이 있었다. 그제야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들이 그렇게도 반복해서 말하던 “집중하라”는 말이 어쩌면 모든 열쇠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열쇠는 마음을 바라보는 일이다. 


매트 위에서는 내가 곧 세계가 된다. 기댈 것도 의지할 것도 믿을 것도 의심할 것도 미워할 것도 모든 대상은 온통 나뿐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남은 숙제는 내가 나를 믿는 것이다. 욕심내지 않되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을 미워하지 않되 자만하는 일 없이 믿어주는 일. 그리고 이 과정을 포기하지 않기.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중심을 찾아가는 일이 매트 위에서의 숙제임을 깨달으며, 결국엔 이 모든 게 인생의 숙제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요즘 느낀다. 어쩌면 그게 내 안의 신, 내 안의 빛을 깨우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수련을 마치고 나면 나도 아주 조금은 빛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너무 힘들어서 시작한 요가인데, 거기에 자꾸 생을 바로 세우는 무언가가 있다. 매트 위에 설 때마다 자꾸 마음에 면죄부를 얻는다. 그래서 가까운 이들에게 요가하라는 말을 자꾸 하게 된다. 하지만 요가가 아니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 안의 빛을 깨우는 길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빛을 잃어 간 곳에서 빛을 만나며,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아주 조금은 힘이 되기를 감히 바라며 인사를 건네본다.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빛을 마주하는 날이 오기를.
우리는 모두 빛나는 존재이기에, 나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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