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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Oct 30. 2020

마음은 왜 이리도 미친년 널뛰기를 하는지

마음아 멈추어다오

매트 위에 선 선생님들을 볼 때면 그 온화한 미소와 여유로운 에너지가 좋았다. 닮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매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 역시 그 여유로운 에너지를 갖고 싶다는 갈망이 똬리 트는 것 같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여유롭고 강인한 에너지를 갖게 되는 날이 올까, 상상하는 힘으로 서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여유롭고 강인한 에너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세계에 있는지, 한낱 인간인 나의 마음은 옅은 바람에도 쉼 없이 일렁인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은 아쉬탕가 마이솔 수련 대신 하타 수련을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늦잠을 잔 나는 수련 시간을 놓쳤고 12시에 가까운 그 숫자들을 보며 화가 났다. 또 잠만 자느라 하루를 까먹었구나. 남들은 부지런히도 살던데 난 뭘 그렇게 부지런히 잠만 자는 걸까. 나의 못남에 이유를 붙여가며 화를 냈다. 속이 성할 리가 없었다. 


속풀이가 가능한 행위부터 찾았다. 먹는 데 크게 흥이 없는 인간이지만 우울해질 때면 태국 음식을 찾곤 한다. 이상하게도 태국 음식을 먹을 때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었어도 배가 불렀을 양을 한 끼 식사로 뚝딱 해치우게 된다. 오늘도 기본 2인분에 달하는 푸팟퐁커리에 큼지막한 공깃밥에 맥주 두 병까지 뚝뚝 해치우며 ‘아 맛있다. 맛있으니 행복하다’ 단순한 사고를 하며 늦게 일어난 하루를 달랬다. 사장님은 “오늘 쉬는 날이신가 봐요”했다. 자주 가는 곳이지만, 내 직업을 알 리 없으니 오늘 월차쯤 썼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저 요즘 매일 쉬는 날이에요. 백수거든요”라는 말이 목 끝을 간지렀지만 대신 “네 그래서 오늘 먹부림하러 왔어요”했다. 그렇게 몇 초, 우리는 함께 웃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같았다. 


다시 상승세를 탄 기분을 안고 뭐라고 끄적이는 하루를 보내야겠다 생각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노트북을 펼쳤지만, 이게 웬걸. 고작 두 병 마신 맥주는 나를 한껏 몽롱하게 만들었다. 오늘 거의 12시간을 내리 잤기에 커피는 마시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었건만, 술을 깨겠다고 별수없이 커피를 진하게 내려 마시며 ‘이거 마셨으니 오늘 또 늦게 자겠구나. 내일 또 늦게 일어나서 자신을 한심해하겠구나’ 그러다 또 화가 났다. 여전히 손에 쥔 커피는 식지 않았다. 내 마음도 식지 않았다. 


마음은 왜 이리도 미친년 널뛰기를 하는 걸까.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미친년 널뛰기하는 이 마음은 아킬레스건 같은 거라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서너 번 꾹꾹 참으면 남들 눈엔 그저 조용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니까. 그런 이유로 나는 자주 ‘말없이 조용한 아이’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로 삼십 N이 흘렀다. 

수련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버려 할 때를 지나 너덜너덜해진 운동화처럼, 이제 와 하는 빨래조차 과분한 존재가 된 느낌으로 수련을 하러 가곤 한다. 수련을 하러 갈 때의 마음은 대체로 ‘내 존재 오늘 하루도 파이팅’ ‘공기가 참 맑다. 하늘이 푸르다’ 따위와는 전혀 반대 점에 있다. 사는 게 왜 이리 힘들까,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꺼내 보기 싫어 걸음걸음마다 질질 끌고 어두운 그림자가 읽힐까 조마조마해 하며 요가원에 간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나오면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것 같다. 마음이 어둡지만은 않은 인간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매트 위에 서는 일이 자꾸만 내 마음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 되곤 한다. 자신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매트 위에서 보내는 시간에 집착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요가를 가지 못한 게 나는 그렇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요즘 자주 자문한다. 요가를 시작하고 평생 요가를 하는 삶을 살고 싶다 꿈꾸지만 언젠가부터 요가를 하는 행위 자체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글 쓰는 사람인데, 마치 요가 하는 게 전부가 된 사람인 양 우선순위가 뒤죽박죽된 느낌이다. 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매트 위에 서는 걸까. 요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나빠지는 알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을 따라 걸으며 멀미가 났다. 


그렇다고 매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고요한 것만도 아니다. 내 몸은 왼쪽 오른쪽 불균형이 심해서 오른쪽은 전혀 안 되는 동작이 왼쪽에서는 잘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오른쪽으로 뭔가를 하면 ‘매일 하는데 아직도 안 되다니 언제 될래’ 조바심이 나다가, 왼쪽으로 하는 아사나를 하면 ‘그래 왼쪽은 믿는다. 대충해도 될 거란 걸’하며 자만을 한 움큼 삼키게 된다. 가장 큰 예가 마리차사나이다. 특히 마리차사나C의 경우는 왼쪽 오른쪽 차이가 큰 게 오른쪽으로 하면 등 뒤로 손가락을 겨우 걸게 되는 반면, 왼쪽은 손목까지 휙휙 잡히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할 때면 구부정한 허리를 어쩌지 못해 가쁜 숨을 쉬다가, 왼쪽으로 돌면 허리가 또 쉽사리 펴지곤 한다. 내 몸에 불균형이 이리도 심했단 말인가. 

마리차사나 C, 마리차사나 D

처음에는 그 불균형을 알아챈 것 자체가 그저 신기했는데, 요즘엔 자꾸 균형을 찾는 일이 내 숙제구나 싶어 또 불안해진다. 그렇게 왼쪽 오른쪽 전혀 다른 불균형을 받아들이다 ‘왼쪽은 이렇게 잘 되는데 오른쪽은 왜!’ 속상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빈야사를 이어간다. 하긴, 인간의 몸도 왼쪽 오른쪽이 이렇게 다른데, 마음이라고 균형을 잡는 게 쉬운 일일까. 그런데 왜 그 마음의 균형은 도무지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있는 걸까. 예전에 어느 수련 시간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몸에 좋다고 챙겨준 무언가를 귀찮다는 이유로 식탁 밖으로 대충 밀어내듯, 뻔하디뻔해서 어려웠던 그 말을 나중에 이해하자 싶어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읽으니 뻔하디뻔한 내 감정의 흐름도 결국 욕심 때문이었나 싶은 의문이 든다. 좋을 때는 좋은 기분이 좀 오래 갔으면 좋겠는데, 그 마음은 왜 그리도 찰나인지 그래서 나는 금세 또 인형을 뺏긴 아이마냥 서러워서 마음이 시큰해진다. 방금 전에 나는 기분이 좋은 아이였는데, 그 마음을 곱씹는 나는 금새 또 차게 식은 아이가 된다. 양극단의 마음을 품은 나는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진 아이인 걸까. 이런 맘을 알 리 없는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 “너 점점 평온해지는 거 같아”라고 하면 부끄러워서 가방을 잽싸게 들고 집으로 도망가고 싶어진다.


마음도 찰나의 순간을 따라 흘러가는 걸 언제쯤 조급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이런 마음은 왜 생기는 걸까, 가만히 들여다봤다. 남들은 다 별일 없이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별일이 없어서 진짜 못사는 것만 같고, 누군가 잘나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축하하는 마음과 별개로 내가 한심해지고, 나에게 상처 준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망했으면 좋겠다는 악담을 속으로 퍼부으며, 어휴 나 진짜 구리다 들키지 말아야지, 그러다 다 용서하자 한낱 스쳐 간 인연일 뿐이야 하다가 나는 정말 왜 이럴까 하며. 혼자서 나의 죄질을 높였다가 줄였다가 북 치고 장구 치며 마음속 감옥에서의 날을 연장하게 된다. 방금 전엔 분명 기분이 좋았던 건 같은데 왜 또 이렇게 됐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에 빠지며 말이다. 그러면서 자꾸 ‘욕심’ 눈에 보인다. 가졌던 순간을 더 길게 유지하고 싶거나, 갖지 못한 순간을 빨리 끝내고 싶거나, 결국엔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인간이었구나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나이만 많이 먹었을 뿐 내 안에 나는 여전히 어리기만 한데, 어른아이라는 핑계로 못남을 철없음으로 포장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맥주 두 병에도 쉽사리 잠들지 않는 술기운을 떨치기 위해 커피를 마시며 맥주를 마시던 순간 행복했던 나를 생각한다. 그 술기운이 깨지 않아 화가 나는 나도 곱씹어본다. 정말 고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 흐르듯 순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마음이 언제까지 흔들릴지언정, 흔들리는 나를 조용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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