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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Mar 30. 2024

거꾸로 들어야 바로 볼 수 있는 시집

엄지용 시인 시집(<제목은..(후략)>), ‘독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제목은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이름도 제가 정하지 못한 걸요>, 엄지용, ‘독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나는 저 사람이 나를 기억하게 하는 법을 알고 있어     
저기 저 종을 울리면 돼     
종소리 하나에 나는 고작 침을 흘리지만    
저 사람은 매번 나를 떠올릴 거야     

그걸 기억하렴    
누군갈 길들일 때는    
너도 길들여질 거라는 걸   
(시 “개의 파블로프” 중)



병원에 가면  
나는 꽤 괜찮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어디가 아프냐 묻고   
어떻게 아프냐 묻고   
언제부터 아팠냐 묻고     

병원에서 첫 번째로 받는 치료는  
바로 저 물음들이라는 걸  
나는 어른이 되고서 알았다.  
(시 “병원” 중)

- 엄지용 시집, <제목은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이름도 제가 정하지 못한 걸요> 중 발췌          


거꾸로 들어야 읽을 수 있는 시집입니다. 내지가 전부 거꾸로 편집되어 있어서 책을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책을 뒤집어서 들어야 하죠. 시인은 자신의 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책 하나 거꾸로 들었다는 시선이 두려워 정작 나를 거꾸로 두고 살고 있진 않은지 경계합니다. 경계를 두지 않으면 경계할 필요 없고, 구분 짓지 않으면 구분 지을 필요 없다는 걸, 서른여섯을 앞둔 겨울에도 배워가고 있습니다.  


경계와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픈 철학을 담은 독특한 책, 작가의 의도가 담긴 디자인과 편집에 반해 단번에 책을 구입했습니다. 시집이라는 점도 책을 선정하는 데 한몫했습니다. 시는 소설, 에세이 등을 비롯한 각종 줄글 장르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간결하게 독창적이며, 단시간에 일렁이게 하죠. 시는 힘이 셉니다. 다른 어떤 글보다도요.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책의 디자인만으로도 사람을 이토록 사로잡는 작가의 글은 어떠할지. 얼마나 뒤집힌 시각으로 세상을 풀어갈지,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엄지용 시인의 시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시인의 시가 그러한 것처럼요. 촌철살인처럼 마음에 와 박히는 시도 있고(개의 파블로프, 거짓말, 비행), 언어의 말맛을 살리는 시도 있으며(춤), 마음을 여러 의미로 뜨듯하게 덥히는, 여운을 머금은 시(순간, 화장, 목격자 등, 한때)도 있습니다. 일상의 순간을 담은 시(아내의 슬리퍼, 빵, 5학년 여름)도 있지요.     


매 시를 읽으며 시인의 하루들을 엿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시는 참 독특한 장르입니다. 소설에서는 작가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에세이에서는 작가가 전면에 드러나지만, 시는 그 중간에 있습니다. 상징과 은유로 가려지긴 하지만, 시인은 모든 시에서 자신으로 존재하죠. 시인을 보지 않고 시만 보려 해도, 영영 작가를 옆으로 밀어둘 수는 없습니다. 시의 화자는 대부분 일인칭이고, 시인은 예외 없이 그 ‘일’에 해당하니까요. 하지만 에세이만큼 정밀하진 않기에 시에서는 작가가 어렴풋합니다.      


그래서 시에서 시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를 물음표를 머금은 채 읽게 됩니다. 결국 시에 이르게 된, 작가의 사사로운 사정을 궁금해하면서, 흐린 부분들을 모아 시인을 짐작하는 것이죠.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은 시집 속 엄지용 시인은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엄지용 시인의 시는 일상에서 유쾌하고 따스하며, 추상에서는 깊고 먹먹합니다. 일상을 담은 시에는 빛바랜 필터가 얹어져 있었고, 추상적인 생각을 풀어낸 시는 겨울빛 고독을 머금고 있었죠.     


일상을 다루는 시인의 시는 세밀합니다. 시인이 경험한 나날들이 눈 앞에 펼쳐진 듯 선명하죠. 아버지와 함께 걸어간 빵집(빵), 집안을 이리저리 오가다가 슬리퍼를 벗어 두고 외출한 아내(아내의 슬리퍼), 비 오는 날 하굣길에 아이를 데려온 엄마들과 엄마를 만나 신이 난 아이들, 그리고 엄마가 오지 않아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또 다른 아이들의 모습(5학년 여름) 등, 시를 읽다 보면 어느새 시 안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한 편의 연속적인 드라마를 보는 듯하죠. 그리고 그 안에는 언제나 따스한 마음이 있습니다. 빵집을 핑계로 아들과 좀 더 이야기하며 걷고 싶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 급하게 어딘가로 향한 아내의 슬리퍼를 매번 다시 현관으로 가져다 놓는 남편의 마음,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듬는 마음 등, 누군가를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반면, 추상적인 생각을 담은 시에는 진하게 덥히는 알싸함이 있습니다. 한겨울,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술을 마시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는 마음. 그들을 걱정하고 위로하면서도 동시에 상황을 냉철하게 포착하고자 하는 마음. 어떤 슬픈 고독을 치열하게 간직하고 기록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엿보였습니다. 위에 인용한 시 ‘개의 파블로프’처럼 그리고 ‘병원’처럼, 신선한 아이디어로 한 줄의 묵직함을 건네는 시인의 시에는 서늘한 듯 뜨거운 강인함이 있었습니다.      


시를 통해 알게 된 엄지용 시인은 강단 있게 따뜻한 사람인 듯했습니다. 추천사에서 그의 오랜 벗(이자 배우자)이 밝힌 것처럼 파도를 끌어안을 수 있는 역량과 잔잔히 잠재울 수 있는 깊이를 동시에 간직한 사람인 듯했죠. 유쾌하고 유연하지만, 인내하고 곱씹을 수 있는 사람. 엄지용 시인의 시는 시인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이유


독서관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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