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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Aug 06. 2024

인용문이 없는 지식인의 글

<산책자>, ‘북셀러’에서 우연히 만난

인용문이 없는 지식인의 글,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배수아 옮김


그는 매력적인 사내입니다. 얼마나 매력적이냐면, 오로지 글만으로 당대 유명 지식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그의 문체를 모방하게 하고, 자신을 뒤따르는 독자들에게 그의 글을 읽어보라 권하게 만들며, 그를 찬미하는 희곡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그의 열렬한 팬 중에는 유독 유명인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연예인의 연예인처럼, 유명인의 유명인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그가 유명했냐고요?

글쎄요.     


그가 사망한 지 백 년이 지난 현재, 지구 반대편에 사는 타국의 독자가 그의 이름을 알 정도라면 당연히 유명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얼굴도 모르는 다른 시대의 사람이 이름을 안다는 건 그가 ‘그저 그런 인물’의 범주는 이미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요. 만약 그가 현재 자신의 명성이 이토록 광범위해졌다는 걸 알았다면 기뻐했을까요. 음, 잘 모르겠습니다. 글에서 받은 그의 인상은,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할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군요. ‘나 살아생전에 좀 이렇게 내 책을 읽어 주지. 가난뱅이 꼴 못 면하고 힘들게 살았는데, 이제야 나의 진가를 알아봐?’라며 분노하지 않으면 다행일 듯합니다.     


전 세계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유명해졌고, 책도 많이 팔렸는데도 분통을 터트리다니. 고인에 대한 모독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책의 저자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의 글에서 받았던 인상으로 미루어 보자면 말이죠. 그는 모든 문장에서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아주 진솔한 사람이거든요. 부나 명예에 목매는 걸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이고 말이죠.     


헤세, 카프카, 벤야민, 엘리네크 등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작가이자 지식인들이 애정했던 작가, ‘발저’는 놀라우리만치 직선적인 문장을 구사합니다. 그의 이야기의 인물들은 꾸밈이 없으며, 매 순간 초라하고, 볼품없고, 나약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말투 또한 반어법과 냉소로 일관하죠. 대표적으로 <헬블링 이야기>에서 주인공 ‘헬블링’이 있는데, 그는 지각을 일삼고, 자주 몽상에 잠기며, 노동을 선호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책을 자주 읽지만, 지식을 얻기보다는 독서하는 자신에 도취하기 위해서, 허영을 과시하기 위해서 책장을 넘깁니다. 그래서 그는 그르 현명하지도 못하죠. ‘영리하다고 상상할 때만 영리하고, 영리함을 정말 입증해 보여야 하는 순간이 오면 즉시 영리하기를 멈춰 버리는 인간상이 아닌지(p.30)’ 스스로를 자주 의심하거든요. 허례허식이 강하면서도 자조적인 인물인 것이죠.     


이런 자조적인 어투는 발저의 산문에서도 종종 눈에 띕니다. <신경과민>, <최후의 산문>, <내가 까다롭나요?> 등의 발저의 글 곳곳에는 돈을 벌지 못하는 작가, 원고를 써서 근근이 먹고 살던 근현대 작가의 위태로운 심리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권력과 좀처럼 친해지지 못하는데, <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한 신사의 초청을 적극적으로 거절하면서 소위 ‘상류층’이 암암리에 휘두르는 권력과 은근한 위계질서를 꼬집습니다. 어쩌면 자신에게 큰 금액을 후원해 줄지도 모르는 ‘높으신 양반’인데도 거침없이 그가 속한 무리의 행태를 비판하죠.      


그렇다고 발저가 매사에 배배 꼬인 사람이냐면, 우습게도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사랑(p.42)’이 무엇인지를 묘사할 수 있으며, 스무 살 청년에게 ‘더 힘세고 덜 신중한 자들이 증오할 만한 것들을 사랑하라.(p.127)’라고 조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학자들은 대개 비정하기 때문에 피하도록 하라(p.127)’라는 조언도 덧붙이지만요. 그는 세상을 충분히 아름답게 해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엄청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죠. 그의 산문 <주인과 고용인>에 나오는 다음의 두 문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세상을 관통해 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생각에 주인이 주인인 이유는 재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고용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용인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입술에서 그 질문이 나오기 때문이다.
(p.59)


‘주인’과 ‘고용인’을 가르는 그의 이분법적인 정의가 놀랍지 않은가요. 백 년이 넘은 글이지만, 작금의 현대 사회에 적용해 보아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문장입니다. 당대 지식인들이 발저를 사랑했던 이유는 아마도 이런 직설적인 통찰력과 솔직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비록 단도직입적이고, 깐깐하며, 일면 괴팍하기는 하지만, 그의 언어에는 매 순간 ‘그’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죠.     


이를 방증해 주는 대표적인 지점이 바로 ‘인용문’입니다. 발저의 글에는 ‘인용문’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근대 유럽 지식인의 글치고 굉장히 보기 드문 특징이지요. 시기를 막론하고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글에서 자신의 ‘얼마나 많이 아는지, 얼마나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인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유명한 누군가의 이름이나 글을 인용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덩달아 바빠지죠. 그가 인용한 또 다른 누군가를 매번 손 바쁘게 찾아봐야 하거든요. 하지만 발저의 글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그의 생각’으로만 꽉 차 있죠. 오직 경험과 감정에서 우러나온 순도 100%의 ‘발저’만의 언어로 자신의 글을 채웠음에도 그의 글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매 순간 너무 솔직한 탓에 가끔은 그가 측은하고, 가끔은 왜 이렇게까지 자조적이고 부정적인지 짜증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이 또한 그가 너무 솔직하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400페이지에 육박하는 그와의 기나긴 산책을 마치고 나면, 종국에는 그를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나 마지막 산문인 <산책>에서 ‘산책’을 논하는 문장들을 읽다 보면, 발저의 진심이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겁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 시켜 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한다면 단 한 글자도 쓸 수가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내 일도 무너져버릴 겁니다. (p.339)


산책은 보고 느낄 만한 중요한 현상들이 늘 가득한 과정입니다. 멋진 산책길에는 형상, 살아있는 시, 마법, 그리고 온갖 아름다운 자연물들이, 비록 작은 존재들이라고 해도 꿈틀거리며 차고 넘치는 것이 보통이죠. (...)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고 아이들 같은 눈부신 자연이 선함과 아름다움의 원천으로 매번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시인은 얼마나 비참하고 빈약한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지 말입니다. (p.340-341) 


산책자는 사물을 오직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자신을 지우고 대상에 몰입하여 자신을 잃는 행위, 모든 사물과 현상에 품는 열렬한 애정은 마치 의무를 완벽하게 의식하고 수행하는 일이 내면의 큰 기쁨이자 충만함인 것처럼 그렇게 큰 행복감을 산책자에게 안겨 줍니다. (p.342)


세금 평가사가 그를 ‘매일 산책이나 다니는 사람’이라고 비하하자, 욱하는 마음에 내뱉은 산책에 대한 말들 속에는 그의 확고한 신념이 배어 있습니다. 장장 일곱 페이지에 걸친, 산책이라는 행위에 대한 열거와 산책자로서의 본분에 대해 읽다 보면, 그가 얼마만큼 산책에 진심을 다하는지를 사람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산책을 통해 주변 사물과 사람, 세상을 얼마나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죠. 그의 그런 따스한 진심을 마주하는 순간, 괴팍한 노인네 같고, 영민하지 못한 얼간이 같고, 느리고 답답한 한량 같던 그에 대한 편견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본연의 ‘발저’라는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진가를 마침내 깨우칠 수 있었죠.    

 

발저는 불완전한 세상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말라붙은 강바닥을 ‘여름이 수줍게 드러낸 대지의 민낯’ 따위로 표현하지 않고, ‘가뭄이 들어 말라붙은 강바닥’이라 바로 적을 수 있는, 불완전함을 불완전함으로 묘사하는 작가죠. 그는 굳이 수식어를 덧붙이지 않습니다. 찬미하는 시인이 아닌, 현실을 담는 시인인 셈이죠. 하지만 눈앞의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심지어 나 자신의 치부조차도 아무런 꾸밈없이 고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이라면 아무래도 좋은 면만 보여주고, 좋은 쪽으로 말하고 싶은 본능이 장착되어 있으니까요.      


고고한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발저에게 반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어떻게든 자신을 돋보이려는 사람들에게 발저의 글은 어쩌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산속의 수행자처럼, 행려자처럼, 안빈낙도하는 선비처럼. 큰 욕심 없이 하루하루를 산책하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는 성공한 이들에게서는 자주 찾아볼 수 없는, 숭고한 멋스러움이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발저에게 스며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천방지축 날뛰는 그의 글에 놀라다가도, 점차 그의 진심에 녹아들게 되죠.      


발저는 한 편의 얼룩말 같은 작가입니다. 초식동물임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성품(=성깔)을 가진 얼룩말처럼, 한 치 앞도 종잡을 수 없는, 흑과 백의 매력이 공존하는 글을 천연덕스럽게 써 내려가는 작가죠. 한량과 성실한 철학자, 성자와 악동을 동시에 품고 있는 사람. 산책자이자 예술가인 발저의 글에는 이렇듯 사람을 끌어들이는, 알 수 없는 매력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이유


북셀러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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