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내게는 남들이 붙여준 수식어가 참 많았다.
얼굴이 예쁜, 공부 잘하는, 리더십 있는, 인기 많은, 예의 바른,
과학영재, 쌤들이 예뻐하는, 잘난척하는, 그래서 재수 없는.
그 당시에는 이 수식어들이 반갑거나 내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 나중에 생각해보니 잘난척해서 재수 없는 건 확실히 맞았다.)
그것보단 내가 거기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리더십도 있어야 하고, 쌤들한테도 잘 보여야 하고...
그렇게 노력한 나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부모님께 "지나는 어쩜 그렇게~~~"로 시작하는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부모님이 칭찬을 듣는 것이 좋았다. 장녀라는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진짜 나를 드러내기보다 그 자리에 내 수식어와 가까운 나를 채워 넣었다.
사실 진짜 나는 청개구리과에 미루기 대장인 데다 감정도 굳이 숨기지 않는 스타일이다.
공부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것이 어렵고, 체험한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서 역사를 공부해도 나는 전국을 누벼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것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내 진짜 모습은 항상 너무 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보수적인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특이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진짜 나와 수식어 속 나는 수시로 충돌했다.
현실에서는 전 과목을 실생활 속에서 공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관찰이 좋고 실험이 신기해서 좋았던 과학 영재반 공부도 올림피아드 같은 시험 대비 문제를 풀게 되면서 급격히 흥미가 떨어졌다. 머리는 좋은데 왜 노력을 안 하냐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감정을 숨기는 것도 잘할 수 있었지만 나를 싫어하는 친구에게는 딱히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더니 어느샌가 나는 왕따가 되어있었다.
아무리 어른이어도 무례한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예의 바르게 대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그 속에서 점점 우울해졌다. 충분히 혼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혼나도 죽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야 느끼는 것이지만, 그때의 나는 수식어가 늘어난다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꼈던 것 같다. 노오력 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난다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회색빛이 많았던 학창 시절은 이후의 연애나 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의 나는 아주 자유로운 망나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공부하고 싶은 대로 공부하고,
사랑하고 싶은 대로 사랑하고, 대하고 싶은 대로 사람을 대한다.
회색빛 학창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니 불과 몇 년 전의 나와 비교해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자유롭고 행복하다.
누구보다 자유롭고 싶었던 나를 진짜 자유롭게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틀이었다.
망나니와 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단어가 지금의 나를 설명해준다.
여기에서의 틀은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다른 것들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경계'를 말한다.
우선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그 앎을 바탕으로 나는 주변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내가 심리적, 신체적으로 안전함을 느끼는 경계는 어디까지인지를 알 수 있게 됐다.
그 경계를 지키기만 하면 내가 나 자신을 잃는다고 느껴지는 일이 확연히 줄어드는 것이다.
그 틀 안에서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나의 경계를 무리하게 허물려고 할 때
나와 상대방에게 경고 메시지를 줄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야 나는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코칭을 하다 보면 많은 이들이 이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을 본다.
내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첫걸음은 나 자신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우선 내 모습, 내 상황을 인정하기로 했다.
평범한 것을 미덕으로 삼는 이 사회에 사는 별종 같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 또한 내 모습이고 좀 별종이어도 괜찮고 충분하다는 것을 말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마음으로 옮겨가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인내심도 필요했다. 인내심이 바닥이 나려 할 때는 내가 나로 행복해지기 위한 과정임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것처럼 나를 대해주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가지고, 정말 가지고 싶은 것은 신중히 고민하되 가끔은 과감하게 선물했다. 나 스스로에게 관대한 것은 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해야 할 때에 관대하지 못하고, 관대하지 않아야 할 때에 관대했다. 이렇게 나에 대해 왜곡되어 쌓인 인식들을 하나씩 바로잡아 가는 과정이 지난하게 이어졌다.
변화는 정말 의외의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연애를 하면서 그 누구를 만나도 '내 본모습을 보여주면 싫어하겠지?' 생각했던 나였는데, 그즈음 만나게 된 남자 친구에게 나 자신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의 내 모습처럼 좋으면 좋다는 표현을 온갖 표정으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끔은 아이처럼 울기도 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5년째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준다. 요즘도 밥을 먹다 말고 "자기는 진짜 신기해. 엄청 까불거리는데도 진지하고, 뭐든 잘 해내잖아. 너무 멋있어."라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런 말을 들을 때 당치도 않다며 몸서리를 치고 부정을 했을 것이다. 칭찬을 받으면 안 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지금은 칭찬을 들으면 고마움을 표하고 감사히 그 표현을 받아서 내 마음속에 저장해둔다. 오예! 하면서.
멋진 친구를 만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내가 경계를 통해 나를 지키고 아껴주지 않았다면
이 친구가 주는 것들을 이렇게 감사히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친구를 부담스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이제 내 수식어는 내가 결정한다.
틀 안의 망나니.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