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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바다 Aug 28. 2019

락 볼링

  음악 소리가 요란했다. 무척 와 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막상 문 안으로 들어서자 주춤거려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실내와 많은 젊은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경쾌한 음악 소리에 자연스레 웃고 떠들며 공을 날리고 있었다.

 

어벙한 채 친구 따라서 신발도 빌리고 카운터도 다녔다. 우리 일행이 가장 안쪽 11, 12라인을 얻었다. 앞쪽 벽 전체의 스크린에는 지금 흐르는 음악과 연관되는 시원스러운 장면이 나왔다. 빨강 파랑 색색의 볼링공을 무게에 따라 고르는 데 기분이 막 들떠졌다.  티브이의 볼링 프로에서 여유롭게 공을 닦는 선수의 모습 같아 보여 좋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아무 생각 없이 흥겹게 떠들고 웃으며 놀고 싶었다.

행여, 젊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아주머니가 나이도 모르고, 주책이다, 여기 물 흐리는 것 아냐, ' 고 흉볼까 봐 애써 점잖떨고 서 있었다.

 

애들 키우고 허덕거리며 사느라,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묻어두었는데 이제 애들도 컸고 시간도 되는데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렸다. 그래도 건강상으로는 힘껏 도전해 볼 용의가 있는데 괜스레 주위 사람들 눈치가 보였다.

 

옆 라인에 자식들과 같이 온 듯한 내 또래 아줌마가 공을 신나게 날리며 와장창 핀을 넘어뜨리곤, 애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 아닌가. 핀이 넘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속이 후련했다. 꼬실 파마머리에 헐렁한 바지 차림이 분명 내 또래 같았다. 멋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하고 집 나간 자신감을 찾아왔다.

까짓것 나도 와장창 핀을 요란스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두세 발 걷다가 공을 힘차게 날렸다. 에구구ᆢ 어쩌나 남세스럽게 공이 도랑으로 빠져버렸다.

 

작년에 외국어 수업시간에 ‘에브리지가 얼마나 됩니까?’라는 문장이 나왔다. ‘힘껏 치면 140이 됩니다.’라는 문장을 배우는데 선생님이 ‘에브리지가 얼마인가요?’라고 수업받는 아주머니들께 물었다. 몇몇이 120, 130점 나온다고 말했다. 나는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수업이 끝난 후  ‘요즘은 락 볼링장이 핫 하다’ 고 하면서 모두 가자고 했다.

이 나이까지 볼링장에 한 번 안 가본 것이 창피해서 바쁜 일이 있다고 둘러대고 집으로 온 적이 있었다.

 

휴가철에 가족끼리 콘도에 갔는데 지하에 볼링장이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가족끼리라면 잘 못 해도 창피하지 않을 거라 이번 기회에 좀 배워두고 싶었다. 못 쳐도 모임에 끼일 수는 있지만, 한 번도 안 해보고는 끼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녁 먹고 볼링장에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아들은 피곤 타고 외면하고, 딸은 그 나이에 엄마가 그거 배워서 뭐하냐며 오히려 주책이라고 잔소리만 했다. 남편은 원래부터 내가 뭐든지 한다고 하면 나댄다고 좋게 보지 않는 성격이라 못 갔다.

 

아들 유치원 엄마들의 모임인 오늘, 식사하면서 무심코 볼링 이야기했더니 엄마들이 '지금 갑시다'. 하며 일어나서 길 건너편 ‘락 볼링장’으로 온 것이다. 수 엄마는 치는 법을 가르쳐 준다며 잘 보시라고 하면서 공을 멋있게 날렸다.


자세가 어찌나 멋있던지 감탄하고 있는데 볼이 쭉 가다가 도랑으로 빠졌다. 모두 자세는 국가대표급인데 아깝다며 배꼽 잡고 웃었다. 빈 엄마는 말없이 공을 치는데 자세는 그다지 멋있지 않았는데도 스트라이크가 나왔다.


우리는 무슨 월드컵 4강에서 한 골 넣은 것처럼 환호를 지르고 난리를 쳤다. 원 엄마는 나처럼 마구잡이다. 티브이에서 본 것처럼 모양새 있게 수건으로 볼을 닦더니 두세 걸음 걷다가 날리고는 ‘쭈울딱’ 미끄러졌다. 벌떡 일어나더니 부끄럼을 감추려고 아픈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듯 걸어왔다.

 

모두에게 동냥 가르침을 받고 다시 잘해 보려고 공을 들고 나섰다. 설명 들은 대로 왼쪽 다리와 공을 일직선에 놓고 힘주어 던졌다. 이번엔 똑바로 가라고 있는 힘껏 던졌다. ‘터엉~’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레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공은 조금 나아가더니 역시 도랑으로 빠졌다.


 부끄러워 돌아서는데 엄마들이 모두 쓰러지듯 웃고 있었다. 나도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원 엄마가 바구니에 맥주를 사 왔다. 손에 꼭 들어오는 두께의 날씬한 병맥주였다. 병따개가 필요 없이 그냥 손으로 돌리면 되는 맥주였다. 청춘들처럼 서서, 병을 들고 건배를 하며, 머리를 약간 뒤로 젓치고 한 모금 ‘쫘악~’ 마시고 내려놨다.


 그리곤 다시 폼은 나지만 공의 행방은 알 수 없는 볼링을 치고 떠들고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한참을 놀다가 너무 크게 웃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자기들끼리 즐기고 있었다.


내가 공을 굴리는 게 아니라 던져서 레인이 부서지든지 미끄러지든지 전혀 관심 없고 각자의 일행들에게만 집중해서 놀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볼링을 치고 있는 내가, 어제보다 더 멋있어진 것 같아서 흐뭇했다.

 

밤늦은 귀갓길에 차가운 바람도 정다웠다. 현관을 들어서자 남편은 뭐하다 밤늦게까지 다니냐며 지청구를 한다. ‘락볼링장’을 갔는데 너무 재밌었다고 자랑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의 기를 죽이는 말을 한다.

‘아이고 젊은 사람들 노는 곳엔 나 많이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서 주책을 떨었네.' 하며 쯧쯧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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