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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요희비극 Feb 24. 2020

#5

  지난여름에 생일선물로 공기청정기를 받았다. 미세먼지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한여름에도 창을 열어두기 찜찜했던 터라 너무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런데 바깥공기와 상관없이 실내 공기는 항상 맑다고 표시되어서 이게 잘 작동하는 건지 몇 번이나 의심했었다. 결국 의심을 참지 못해 육안으로도 창밖이 뿌연 날 창문을 활짝 열어보았다. 그러자 곧 공기청정기 팬이 강하게 돌기 시작했다. 디스플레이에 나타나는 미세먼지 수치가 빠르게 올랐고 공기질의 단계를 표시하는 색상바도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서둘러 창을 닫았다. 그리고 공기청정기에게 미안한 마음과 잘 작동하고 있었다는 안도감으로 씰룩씰룩 웃었다. 그 후로도 이따금 평화로운 공기청정기를 볼 때면 너무 고요한 거 아닌가, 하여 일부러 초를 켰다 끄곤 했다.


  그런데 복이가 떠나고 며칠 뒤부터 공기청정기가 이상해졌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요란하게 팬이 돌아가곤 했다. 그런 현상을 처음 목격한 건 동생이 잠든 새벽이었다. 집에서도 울 시간이 필요했던 터라 동생이 일정하게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울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자고 있었지만 훌쩍이는 정도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울다가 눈물을 닦고 똑바로 누웠다. 그리고 왼손을 허리춤에 대서 팔 안쪽에 동그란 공간을 만들었다. 복이가 안겨있을 때처럼.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와 내 어깨에 턱을 괴었을 때처럼. 그런 자세가 되면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복이와 뺨을 맞댈 수 있었고, 손끝으로는 뼈가 만져질 정도로 마른 몸을 조심조심 만질 수 있었다.


  허리춤에 손을 댄 채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있으니 복이가 완전히 몸을 기대어 안겨있는 감각을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복이가 나에게만 하는 행동이었고, 내게도 그리 자주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몸의 한 곳을 기대는 정도로 안기는 건 흔한 일이었고, 나 이외의 사람에게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런 때의 복이는 조금 불편하게 해도 새로 자세를 잡고 몸을 기댔지만 온 몸을 기대고 있을 때에는 아니었다. 조금만 자세가 흐트러져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로 베개나 메모리폼으로 만들어진 복이용 침대 계단처럼 푹신한 곳이었다. 한 번 자리를 뜬 이상은 아쉬워서 다시 안아보아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복이가 온전하게 몸을 기대는 순간은 정말 소중했다. 그 자세로 얼마나 있었을까. 갑자기 공기청정기가 시끄럽게 돌기 시작했다. 조용해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공기청정기 디스플레이를 보니 평소 1과 3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미세먼지 수치가 150을 훌쩍 넘어 있었다. 창을 열지도 않았고, 초를 끄지도 않았는데. 동생이 깰까 봐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전원을 껐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와 누우면서 복인가, 복이가 왔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쯤 누운 몸을 일으켜 다시 거실로 나와 공기청정기 전원을 켜고 그 앞에 한동안 앉아있었다. 원래대로 돌아온 공기청정기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다. 한참이 지나도 잠잠하기만 했다.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면서 그새 먼지가 쌓인 복이 밥그릇을 씻고 물그릇의 물을 새로 갈았다.


  다음날 나는 새벽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 비슷한 시간에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소리가 나자마자 거실로 나와 공기청정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다음날 동생에게 이야기했다. 요즘 공기청정기가 이상해, 하고. 그 뒤로는 언제 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속으로 기다리게 되었다. 공기청정기의 소음은 불규칙적으로 발생했다. 이삼일에 한번일 때도 있었고, 하루에 두 번이나 그럴 때도 있었다. 주로 새벽이나 이른 아침이었다. 다른 시간에는 집에 잘 없어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종일 집에 있는 동생이 별 말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새벽에만 그런 것 같다고 짐작했다. 그럴 때마다 동생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방문을 닫고 나와 공기청정기의 소음이 잦아들 때까지 그 앞에 앉아있었다. 아기가 왔나 보네, 아직 강아지별에 도착하지 못했나 보네, 하면서. 취해서 들어와 침대까지 가지 못하고 바닥에서 잠들 때마다 복이가 내 곁을 지켜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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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진선

그림: 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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