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우리가 길 위에 서 있는 이유
'4시간 30분'
명절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내비게이션에는 온통 붉은색 정체 구간이 가득하고, 멈춰 선 도로 위에서 브레이크 등만이 점멸한다. 차 안에서 보낸 시간이 서너 시간을 훌쩍 넘길 때면 문득 의문이 든다. '우리는 왜 이 고생을 자처하며 길 위로 나선 것일까.' 뒷좌석에서 곤히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백미러로 훔쳐보며, 아마 이 길 위에 선 수많은 이들의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것은 나와 아내를 키워낸 부모님에 대한 무언의 고마움과 오랜 시간 고생해서라도 찾아봬야 하는 명절 의무감일 수도 일다, 하지만 내가 어린 시절 느꼈던 명절의 온기를 내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은 간절함이다. 할머니의 투박한 손맛, 시골집 마당의 서늘한 공기,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나누던 왁자지껄한 대화들. 내가 경험한 그 풍요로운 기억의 조각들을 아이들의 마음 한편에도 심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손바닥 안의 화면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대다. 화상통화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수십 킬로미터의 정체를 뚫고 직접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행위는 어쩌면 비효율의 극치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겪는 이 고생스러운 귀향길을 다음 세대에게까지 기꺼이 감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시대가 변하면 그리움을 표현하는 방식도, 가족이 모여 온기를 나누는 방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아마 우리 아이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명절을 정의할 것이다. 도로 위에서의 긴 사투 대신, 더 지혜롭고 영리한 방법으로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채워 나갈지도 모른다. 비록 풍경은 달라질지라도,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의 본질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 믿는다.
오늘도 여전히 막히는 길 위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사랑했던 명절의 한 장면을 들려줄 준비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들이 만들어갈, 조금은 더 가볍고 유쾌할 그들만의 명절을 조용히 응원해 본다.
나는 그걸 아쉬워하기보다, 기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