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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Aug 15. 2023

사서 고생! 델타트레일- 그랜드테턴

그랜드테턴

아직 펜실베니아 시간이 몸에 배어 있어서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심지어 호텔 커튼도 암막 없이 얇은 흰색 홑겹이 전부였다. 해가 새벽 5시부터 들어와 눈을 찔러댔다. 집을 떠나 여행할 때 남편과 나는 베개를 가지고 다니는데 이번에는 짐을 줄이려고 남편 베개만 넣었더니 불편해서 밤새 자다깨기를 반복했다.


원래 오늘 가려고 했던 제니호수를 어제저녁에 다녀와서 오늘은 하루가 비었다. 그래서 어제 호텔에 돌아온 후 남편과 내일 뭐 할지 결정하느라 두 시간을 보냈다. 

"엠피시어터(Amphieater lake) 어때? 10마일을 걸어야 하고 좀 힘들다고는 하는데 빙하호수까지 갈 수 있대."  

"All trial 후기를 보니 5명이 함께 올라갔는데 1명만 성공했다는데? 건장한 미국 청년들도 그런데 아이들을 데리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자."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여긴 어때 델타 트레일(Delta trail) 말이야. 여기도 좀 힘든 길이라고는 하는데 그래도 7.1마일 정도니까. 거기다 엠피시어터랑 중간까지는 길이 같아. 중간에서 길이 나뉘네. 엠피시어터가 조금 더 높이 올라가서 델타 트레일 위에 있는 빙하호수를 볼 수 있어." 

"나쁘지 않네."

"콜터 베이 옆 호수를 3마일 정도 도는 lakeshore는 어때?"  

“싫어. 호수 주위 평지만 걷는 건 시시해.”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그럭저럭 델타 트레일 Delta trail로 가기로 정해진 거다.


그래서 아침에는 뷰 포인트를 보고 점심을 먹은 다음에 하이킹을 가리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아이들이 힘들지 않게 배려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체력에 자신 있었으니까. 나름 필라테스와 요가로 다져진 몸 아닌가! 게다가 20대에는 등산 동호회도 한 몸이니, 루프를 타고 오르는 전문 산악인은 아니지만 두 다리로 걸어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엠피시어터 트레일을 포기할 때도 내심 아쉬웠다. 언제 또 그랜드 테턴에 온다고.



델타 트레일은 길이 11.9킬로미터, 높이 700미터. 이미 2킬로미터 높이에서 시작하는 거라 정상 높이는

태백산 높다. 트레일 입구는 루핀 트레일 해드다.

2시에 트레일 입구에 도착했더니 하이킹을 마치고 차 트렁크를 열고 짐을 넣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먼지와 땀이 찌든 옷을 갈아입고 등산화를 벗고 조리로 갈아 신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후련한 모습으로 간식을 먹는 사람들도 보였다. 바닥에 앉아 산만한 등산 배낭을 내려놓고 루프를 정리하는 청년들도 보였다. 그 사람들은 어디까지 갔다 온 건지 궁금했다. 루프를 쓸만한 절벽에 다녀왔던 건지도. 


루파인 미도우 트레일에서는 트레킹 코스가 몇 개 있다. 우리가 오른 하이킹 코스는 중간까지는 길이 같은데 두 갈래로 갈라져서 엠피시어터 길과 델타로 가는 길로 나뉜다. 엠피시어터는 산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가면서 빙하 호수를 두 개 거치는 코스다.



엠피시어터로 가는 길은 또 두 갈래로 나뉜다. 가넷 트레일이다. 그 길은 루프가 있어야만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아까 주차장에서 봤던 20킬로는 넘을 것 같은 배낭에 루프를 달고 먼지에 뒤덮인 젊은이들은 가넷을 올랐나 보다.


루파인 미도우는 평지라 8월의 땡볕을 그대로 쬐면서 걸어야 했다. 나는 역시 아침 일찍 하이킹을 하고 오후에 슬슬 다니는 걸 선호하지만 남편은 반대다. 남편과 아들은 일찍 일어나는 걸 힘들어해서 하이킹을 할 거면 조금이라도 빨리 일어나서 해가 없을 때 시원하게 올라가고 싶은 내 소망만큼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 이래서 친한 친구라도 신체리듬이 안 맞거나 보고 싶은 게 다르면 싸우는구나 싶은데, 우리는 이미 십 년 차 부부. 나는 조금 덜 서두르고 남편은 평소보다 조금 서두르는 걸로 적당히 넘어가는 짬밥이 생긴 나이다.

   

우리는 열심히 걸었다. 올라갈수록 점점 말수가 줄고 숨소리만 들렸다. 처음에는 미도우라는 이름답게 평지였던 길이 점점 가팔라졌다. 빙하가 깎여 만들어진 그랜드 테턴의 산은 중턱부터 돌과 바위길이다. 경사가 높아 지그재그로 오르다 보니 뭔가 약 올랐다. 걸어도 걸어도 같은 길을 걷는 것 같았다. 돌을 밟으면 미끄러지는 운동화는 때문에 무릎이 아파왔다. 주차장에서 봤던 사람들이 괜히 모두 등산화를 신고 있었던 게 아니구나 싶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납작한 타원형으로 보이던 산 아래 호수는 점점 자기 형체를 찾아갔다. 길쭉한 타원형에서 둥근 형체를 찾는 걸로 우리가 오른 고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정상이 가까웠을 거야. 그지?" 남편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어. 이제 30분만 걸으면 돼."였다. 하지만 대답은 "이제 절반 왔거든." 


땡볕을 걷다 보니 등줄기는 땀으로 다 젖었고 모자챙은 땀에서 나온 소금기로 하얗게 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속으로 좀만 더 가면 정상이야. 좀만 더 가면. 되뇌었다.

그때 산을 내려오던 사람이 경쾌한 목소리로 “헬로” 인사했다.

나는 그때 왠지 안도감을 느꼈다. 그 안도감은 초등학생 때 할머니랑 기차를 타고 서울 고모댁에 갔는데 영등포역에 내려야 할 것을 잘못해 서울역에서 내리고 우여곡절 끝에 고모부를 만났을 때의 그런 종류의 안도감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인사에서 왜 안도감을 느낀 건지 고민하며 걸었다.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던 일이 해결돼서 긴장을 풀고 느슨해지는 것. 심지어 나는 긴장을 푸는 것도 애써 의식해야 한다. 뭔가 말이 안 되지만. 

서부에 올 때마다 나는 내 시간 감각과 공간 감각이 어긋나는 느낌을 받는다.

교과서에서나 읽었던 빙하산을 마주할 때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를 달릴 때. 때론 사막에서.

이런 곳에서는 평소보다 느슨하고 쉽게 안도하는 사람이 되곤 한다.


마지막 코스는 온통 이런 돌덩어리들이었다. 그래서 어디가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바위를 넘어 어딘가에 빙하 호수가 있다는데 호수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네 발로 기어올라야 하는 곳인 줄은 몰랐다. 자칫 미끄러지면 바위 아래로 끝없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운동화는 대책 없이 바위에서 미끄러졌다. 두 손으로 바위를 꼭 잡고 몸을 낮추고 미끄러져도 떨어지지는 않게 집중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지 확신도 없이. 


바위 저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 몇을 본 건 그때였다. 아! 저기구나. 우리가 오르고 있던 바위 저쪽 오른쪽으로 가야 했다. 우리는 올라온 길을 조금 되돌아가 그 사람들이 내려온 곳을 향해 올랐다. 평지에서 지겹다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은 바위를 다람쥐처럼 네발로 재빠르고 기어올랐다. '이제야 재미있는 게 나왔네.' 하는 표정으로. 평지의 짜증은 다 털어낸 표정으로.


그랜드 테턴 에는 곰이 살고 있고 특히 델타 트레일에서 곰을 만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초콜릿이나 간식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트레일 후기에 쓰여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물만 가지고 갔다. 역시 초콜릿이나 사탕을 챙겼어야 했나. 전날 갔던 제니 호수에서 셔틀보트를 탔을 때 보트 선장님이 사람이 먹는 간식은 버리고 가는 게 좋을 거라고 해서 너무 쫄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충 먹었던 점심은 걷고 네발로 기어오르느라 에너지로 다 써버리고 몸속 지방까지 활활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이렇게 허기가 질 수가. 이제 손까지 떨릴 것처럼 허기가 몰려왔다. 아들이 구세주처럼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주지 않았다면 한참을 쉬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델타 트레일 정상에 있는 숨겨진 호수



사서 고생을 하며 오른 트래일 정상에는 비췻빛 호수가 있었다. 양말을 벗고 바위를 오르느라 수고한 발을 담갔다. 아이들도 나를 따라 발을 담갔다. 아이들과 발 오래 담그기 시합을 했는데 10초를 버티니 발이 깨질 것 같았다.

멀리 바위 위에는 미국인 커플 넷이 있었다. 겉옷을 하나하나 벗고 있었는데 겉옷 안에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빙하물에 들어가려고 작정하고 왔구나 싶었다. 이탈리아 혹은 중동사람인가 싶은 검정 머리에 체격이 큰 남자가 먼저 풍덩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으앗! 하고 비명을 지르며 바로 뛰쳐나왔다. 다음 차례는 여자친구로 보이는 백인 여자. 발끝부터 천천히 담그더니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끌어모으곤 가슴까지 몸을 담갔다가 역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다음 커플은 동시에 빙하물에 발끝부터 풍덩 들어가서는 머리끝까지 푹 넣었다. 


우리 가족과 다른 하이커 몇몇은 그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 커플들에게서 에너지와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안전하지는 않기 때문에 나는 절대 머리를 담글 생각은 없긴 했다. 나는 아직도 시원한 발가락을 꼼지락 움직였다. 실제로 빙하가 녹은 물에 머리를 담그지 말라고 읽었다. 필터 끼워진 물병이라도 물을 마셔서도 안된다고. 어떤 균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산을 내려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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