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일상
조수석 창문 밖으로 키 큰 나무들이 휙휙 지나갔다.
나무가 보이던 풍경은 대형 몰과 상가로, 마당이 있는 주택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이제 시작이다.’
일주일의 호텔 생활을 끝내고 아파트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쉐보레 타호 트렁크에 가득 실린 이민 가방과 캐리어가 자동차 뒷유리를 온통 가려버렸다. 후면 거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도 다리 아래에 각자의 배낭을 두고 자기 바이올린을 하나씩 껴안고 있었다. 나도 좌석 아래에는 내 배낭을, 무릎 위에는 남편 배낭을 안았다.
우리가 살게 될 곳은 이백 세대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였다. 아파트라고 해도 모든 건물이 2층까지만 있었다. 우리 집은 2층.
주차를 하고 현관문을 열자 아이들은 우당탕탕 계단을 오르내리며 배낭과 바이올린, 호텔 생활을 하며 샀던 그릇, 물과 쌀, 냄비 같은 가벼운 짐을 날랐다.
23킬로씩 꽉꽉 채운 이민 가방 여덟 개는 나와 남편의 몫이었다. 계단 위에서 남편은 이민 가방을 끌고 나는 아래에서 밀어 짐을 옮겼다. 우리의 얼굴은 온통 빨갛게 익었고 손끝은 까칠하게 갈라졌다.
“여보, 피자 시켜 먹을까?”
“그래. 시켜.”
“엄마, 밥 없어?
“이런 날까지 밥이냐!”
나는 구시렁거리며 한국에서 가져온 마지막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하나 남은 어묵을 꺼내 어묵국을 만들었다. 사실 나도 피자는 별로였다. 엄마가 만들어 준 밑반찬도 꺼냈다. 아직 식탁도, 의자도 없어서 우리는 싱크대에 서서 숟가락을 들었다. 한국에서 딱 네 벌 가지고 온 수저였다.
“엄마, 어떤 할머니가 문 두드려.”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베란다로 나가자 희끗희끗한 머리를 뒤로 묶고 둥근 돋보기안경을 쓴 할머니가 서 있었다.
“헬로.”
“이사 왔어? 내가 케이크라도 구워왔어야 했는데.”
“케이크를 구웠다고요? 아이들이 케이크 좋아해요. 정말 감사해요.”
‘루마니아 할머니는 이사 온 이웃에게 케이크도 구워주는가 보다.’ 나는 조금 감동했다.
할머니는 열여섯 살에 루마니아에서 이민 왔다고 했다. 온 가족이 짐가방 2개를 들고서. 할머니 이름은 알렉산드리아, 줄여서 샌디라고 불러달란다. 내 이름은 발음하기 힘들다면서 마음대로 '리아'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점심 먹는 중이었지? 어서 마저 먹어. 정말 만나서 반가워.”
할머니는 난간을 잡고 신중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곤 우리 부엌과 맞닿아 있는 옆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다 식어버린 어묵국을 몇 숟가락 떴을까.
“엄마, 할머니 또 왔어.”
케이크를 가지고 오셨나 내심 기대하며 베란다로 나갔다. 할머니 손에는 케이크 대신 두루마리 휴지 두 개가 들려있었다.
“오~ 스위티. 케이크는 못 구웠지만 꼭 필요한 걸 가져왔지. 선물이야.”
그제야 ‘케이크를 구워왔어야 했다는 말을 케이크를 구웠다는 말로 잘 못 알아 들었구나!’ 깨달았다.
그릇을 치우는데 또 ‘똑똑’ 소리가 들렸다.
“스위티, 장 봐야 할 것 있지 않아? 아크미가 제일 가까워. 그런데 거기는 야채가 비싸. 야채와 과일은 프로듀스 정션이 싸. 50분 걸리지만. 내일 같이 갈까?”
“50분요? 그렇게 멀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아니야, 그렇게 멀지 않아. 운전이 힘들어서 그러는 거야? 그럼 남편더러 운전해 달라고 하면 되지.”
“남편에게도 먼 거리일걸요.”
“50분이?”
“그럼요. 게다가 내일부터 남편 출근해야 해서 힘들 것 같아요.”
“오케이, 스위티.”
장 보는데 왕복 1 시간 40분을 운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똑똑.
“스위티, 장 보러 같이 갈까?”
“이런저런 서류가 많아서 힘들 것 같아요. 아이들 학교 서류, 운전면허 서류. 오늘도 너무 바쁜 하루였어요.”
“오케이.”
그 후로도 똑똑
“스위티, 이 테이블 가질래?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뭐라도 있는 게 낫잖아.”
“네. 감사해요.”
똑똑
“속옷이랑 양말 필요하지?”
“면 제품은 한국에서 많이 가져왔어요. 감사해요.”
똑똑
“샤워가운이랑 옷 가질래?”
“샤워가운만 가져갈게요. 감사해요.”
똑똑
“계단 아래로 내려와 봐. 여기 휴대용 의자 가져다 쓸래?”
“아뇨. 먼지를 닦을 엄두가 안 나네요.”
똑똑
그 후로도 할머니는 계속 베란다 창문을 두드렸다.
‘하루 종일 나한테 주려고 창고 정리라도 하는 건가? 이제 집에 없는 척이라도 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또 똑똑 소리가 들렸다.
“스위티, 전화번호 좀 알려줘.”
“전화번호요? 글쎄요. 아직 내 전화번호를 못 외워서.”
“오~ 걱정 마. 귀찮게 안 할게.”
몇 시간 후 전화가 왔다.
“스위티, 내 집으로 와 봐. 줄 게 있어.”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6인용 식탁이 놓여 있었다. 먼지 쌓인 테이블보 위에는 갖가지 약통이 가득했다. 할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싱크대에는 씻지 않은 그릇이 쌓여 있었다. 할머니가 찬장을 열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플라스틱 요거트 병, 케이크 틀, 유리 소스 통이 보였다. ‘휴~ 할머니가 케이크를 굽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했다. 할머니는 끙끙거리며 여기저기를 뒤지더니 거실로 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사진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여기 사진 누구예요?”
“내 동생이랑 동생 아내야. 동생네는 뉴욕에 살아.”
할머니는 식탁 옆 장식장 아래에서 연보라색 꽃이 중간에 그려져 있고 금테가 둘린 그릇을 꺼내기 시작했다. 소스 그릇 하나, 접시들, 파스타 그릇, 샐러드 그릇.
“이건 선물이야. 어제 케이크를 못 구워줬잖아.” 할머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건 세트니까 다 가지고 가. 이건 쓰레기 물건은 아니야. 스위티, 이웃이 돼서 정말 기뻐.”
6인용 식탁에 둘러앉아 금테 둘린 식기로 음식과 이야기를 나눴을 할머니와 할머니 가족을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가 구글맵으로 프로듀스 정션이 어딘지 찾아봤다. 예상 시간 15분 소요. 나는 15분이 걸린다는 말을 50분이 걸린다는 말로 잘 못 알아들었던 거다.
그날 저녁 미역국을 끓였다. 옆집 할머니가 준 파스타 그릇에 미역국을 담았다. 저녁을 다 먹도록 해가 지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에서 집에서 처음 맞는 늦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