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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서부 12박 여행준비

2022년 미국 서부 여행 - 필라델피아 일상

by 니나

“크리스마스 연휴에 그랜드 캐니언 갈까?”

저녁 식사 중에 남편이 느닷없이 말했다.


추수감사절 연휴 전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어디 가요?”

라고 으레 물었다.


우리 가족은 9월 중순에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크리스마스 여행을 예약해 둔 사람도 있던데, 나는 왜 그 생각은 못했을까?

12월 여행을 5월에 예약해 뒀으면 가격도 쌌을 테고 환율도 좋았을 텐데.


필라델피아의 겨울은 한국만큼 추웠다.

우리는 보스턴이나 시카고를 여행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눈이 갇힐 위험도 있고, 방한용품을 챙기느라 짐도 많아진다.

아마도 숙소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모든 활동의 의욕이 사라지고 따뜻한 숙소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따뜻한 플로리다는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도 없었고, 어쩌다 빈자리가 생겨도 가격이 평소의 2배가 넘었다.

우리는 2배가 넘는 티켓 비용을 감당할 마음은 없었다. 디즈니월드에 간다는 누구는 4인 가족의 항공권, 디즈니월드 입장료, 숙소비만으로 천만 원이 들었다고 했다.

‘그냥 필라델피아에 머물면서 주변 소도시나 가야지.’ 하면서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 심심하면 택스가 없어서 물건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델라웨어에 가서 쇼핑이나 하던지, 뉴욕이나 뉴저지에 가야지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그랜드 캐니언에 가자고 한 거다.


“거기 따뜻해?”

미국의 남서쪽으로 비행기로 4시간 반 거리. 그러니까 필라델피아보다는 따뜻하겠지 희망을 갖고 물었다.

“아니.”

“한참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왜 추운 건데?”

“고도가 높아서.”

“춥고 높은 산에 애들 데리고 가자고?”

“거의 2주나 쉴 수 있는데 고작 필라델피아 주변이나 가기는 아깝잖아. 거긴 주말에 다녀도 되니까.”


맞는 말이다.

나는 40퍼센트쯤 설득됐다.


“게다가 큰 애가 한국에서부터 늘 노래를 부르던 그랜드 캐니언이잖아. 이렇게 길게는 휴가 내기도 힘든데.”

70 퍼센트 정도 설득됐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5개월 전쯤의 일이다.

미국에 연수를 다녀온 남편의 직장 선배가 <Your Guide to the National Parks>라는 책을 선물로 줬다. 한 손으로 들기는 무거운 708페이지나 되는 백과사전 같은 책이었다.

그 책을 받은 날부터 큰 아이는 책을 정독했다. 얼마 후 책에는 가고 싶은 곳을 표시해 둔 페이지 마커가 덕지덕지 붙었다.

아이는 “미국에 가면 1번 옐로스톤, 2번 그랜드 캐니언, 3번 요세미티, 4번 글래시어…”

하고 매일 가고 싶은 국립공원 첫 번째 순위부터 열 번째 순위까지 읊어댔다.

미국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고민되고 불안한 마음 따윈 뒷전이라는 듯이.


남편이 계속 말했다.

“비행기 티켓도 평소의 두 배까지는 아니야. 게다가 비수기라 그런지 숙소는 평소보다 싸.”

90퍼센트 정도 설득됐다.


‘비수기라 숙소가 싸다니. 이 여행 정말 괜찮은 거야?’ 불안하긴 했지만.


“나랑 세희는 따라다닐 테니까 둘이서 알아서 계획 세워.”

이렇게 크리스마스 여행은 그랜드 캐니언으로 확정됐다.


“야호.”

큰아이는 환호했다.




그날부터 남편과 큰아이는 여행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2월 22일 저녁에 라스베가스로 출발.

1월 3일 저녁에 필라델피아 도착.

서부로 가는 김에 요세미티 3박 4일, 내가 노래를 불렀던 사막 횡단을 고려한 데스밸리, 그랜드 캐니언 2박 3일, 앤텔로프 캐니언 1박, 모뉴먼트 밸리 1박, 브라이스 캐니언 1박.


여행의 처음과 끝은 공항이 있는 라스베가스에서. 겨울이라 안전 문제로 가지 못하는 곳도 많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여행이라 가파른 곳은 제외했다.


벽에 걸어 둔 화이트보드가 여행 일정으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식탁에 앉아 화이트보드에 적힌 스케줄을 보고 있다가 큰 아이가 읽다 식탁에 얹어둔 <Your Guide to the National Parks>를 펼쳤다.

책 속 국립공원 페이지는 역사부터 그곳에 방문한 유명인이 했던 인상적인 말로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전체 지도, 세부지도로 이어졌다.

여행이 하루인지, 이틀인지, 삼일인지. 기간에 따라갈 수 있는 트레킹 길과 일정도, 여행을 여름에 하는가 겨울에 하는가에 따라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도 적혀 있었다.

심지어 공원 근처에 있는 숙박시설, 식당, 쇼핑할 수 있는 상점의 주소와 전화번호, 방문객 센터의 주소와 전화번호, 방문객 센터가 쉬는 날도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백과사전이었다.


우리의 주 목적지인 그랜드 캐니언을 펼쳤다.

꼭 가볼 만한 곳으로는 사우스 림과 노스 림이 있는데 노스 림은 눈이 많이 와서 겨울에는 방문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아, 그래서 사우스 림에 가는구나.”

그동안 남편과 큰 아이가 사우스 림에 대해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헬리콥터 투어는 꼭 해보라는데 우리도 헬리콥터 투어할까?”

언제가 남편이 물었다.


“맘대로 해.”

나는 얼마나 무심하게 대답했는지.


아이들을 데리고 긴 여행을 가는 일은 남편과 나 둘이서 여행을 가는 것보다 준비해야 할 일이 몇 배는 더 많다.

너무 많이 걷는 일이 없게 일정을 잘 조율해야 한다.

간식은 어찌나 많이 먹는지.

어린이 두 명 먹을거리는 성인 2명 보다 더 준비할 것이 많다.


다른 캐니언으로 이동할 때마다 차로 4시간은 기본. 특히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은 12시간 거리라서 라스베가스에서 하루 머물기도 해야 할 정도다.

운전하는 우리도 힘들지만 안전벨트에 묶여 있는 아이들도 힘들 수밖에.

창밖을 본다고 해도, 자다 일어나도 시간은 줄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겠지.

그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책도 가져가야 했다.


뒷일은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옷을 적시고 땅에 뒹굴며 노는 아이들의 옷 짐은 어른의 두 배다.

우리가 방문할 그랜드 캐니언의 사우스 림은 해발 2100m. 노스 림은 사우스 림보다 300m가 더 높다.

높은 고도 때문에 겨울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아 겨울 내내 노스 림으로 가는 길은 폐쇄된다.

그렇다고 사우스 림이 눈이 적게 오는 것도 아니다.

단 사우스 림은 좀 더 완만해서 눈을 치울 수 있을 뿐. 그래서 겨울에도 폐쇄하지 않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사우스 림뿐이었다.

눈이 얼마나 올지는 모르지만 운동화가 젖을 수 있으니 부츠도 가지고 가야 했다.

부츠를 신고 많이 걸으면 발이 피곤하니까 눈이 오지 않을 때 신을 수 있게 운동화도 가지고 가야 했다.

목도리와 모자, 핫팩도 챙기기로 했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나면 식당에 가는 것도 피곤하다.

게다가 12일 동안 점심과 저녁을 매번 사 먹으면 여행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아무리 저렴한 식사를 해도 4명이면 60달러, 팁까지 주면 금방 80달러가 된다.

그래서 가능하면 건조국이나 햇반, 김처럼 숙소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먹거리도 가지고 가야 했다.

비행기 표를 결제하고 남편과 나는 한 주는 코스트코, 한 주는 한인 마트를 돌며 먹을거리를 샀다.

코스트코에서는 건 과일과 견과류, 베트남 쌀국수 컵라면을 샀다.

한인 마트에서는 햇반과 조미김, 신라면을 샀다.

여행이 다가올수록 냉장고 속 우유와 야채는 점점 비워졌고 실온에 보관할 수 있는 음식은 점점 쌓여갔다.


남편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사면 그만인데 뭘 이렇게 샀냐고 했다. 그건 주부가 아니라 모르는 소리.

“다 쓸모가 있어." 하고 남편을 설득했다. 가방 구석구석 넣어간 햇반과 혹시나 해서 가지고 갔던 쌀 4컵은 정말 유용했다.

그때는 나도 아이들을 돌보면서 짐을 끌고 공항까지 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지만.




“모든 미국인이 봐야 할 단 하나의 풍경이 있다면 그랜드 캐니언이다.”

테디 루즈벨트라고 친근하게 불리기도 하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랜드 캐니언에 방문한 후 했던 말이다.

‘나라도 그랜드 캐니언에서 연설하면 그렇게 말하겠다.’ 생각이 들었다.

‘직접 가서 확인할 수 밖에.’




나는 20대에 중국 상해에서 2년 살았다.

중국에 살았던 이후로는 웬만한 절경에는 놀라지 않는 병에 걸렸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호수에 가서도

‘계림이 더 절경이지.’

슬로베니아에 있는 블레드 호수에서도 나는

“음. 이게 다야? 구채구가 더 좋았는데.” 하고 끝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랜드 캐니언, 브라이스 캐니언, 자이언 캐니언, 협곡을 세 군데나 간다.

협곡이라면 중국에 살았을 때 황산 서해대협곡에서도 봤다.

또다시 “역시 서해대협곡이 최고였어.” 하고 실망하게 될까.

테디 루즈벨트의 연설처럼 ‘정말 한 번은 와야 할 곳이네.’ 생각이 들까.

이번 그랜드 캐니언은 웬만한 절경을 봐도 놀라지 않는 내 병을 고칠 수 있는 여행이 될까?

테디 루즈벨트의 말처럼 미국에서 봐야 할 절경일지 기대됐다.

아니면 황산처럼 그랜드 캐니언도 두 번은 가봐야 기억에 오래오래 남게 될까?

여행을 가기 전에 쓴 일기다.


여행을 다녀온 지금, 솔직히 말하자면 그랜드 캐니언도 한 번은 더 가봐야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언젠가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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