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일상
미국에 살면서 불편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한국이었으면 핸드폰으로 클릭 한 번이면 해결될 송금도 며칠이 걸리고, 운전면허증 같이 중요한 신분증도 그 자리에서 만들어 주지 않고 우편으로 날아온다. 우편이 잘 도착하면 좋겠지만 중간에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펜실베이니아의 도로교통공단에 해당하는 펜닷에 전화하면 전화 연결까지만 한 시간이 걸린다. ‘온갖 선진 기술은 다 가지고 있는 미국이 시스템을 못 만들어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닐 텐데, 불편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래도 불편함까지는 괜찮다.
어느 날 오후 5시 누군가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페코에서 왔습니다.”
“뭐라고요?”
“페코요.”
페코는 내가 사는 아파트에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다. 미국은 한국처럼 한전이라는 공공기관이 한국의 모든 곳에 전기를 공급하지 않는다. 전기 회사가 여럿 있고 사용자가 전기회사와 계약하는 시스템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페코와 계약이 되어 있다.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여니 흑인 아저씨 한 명이 서 있었다. 딸아이도 “누구야?” 하면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카키색 웃옷 위로 ‘페코’라고 적힌 명찰을 왼쪽 가슴에 달고, 허리춤에는 한국에서 가스 검침원이 매고 다니는 것 같은 기계도 매고 있었다.
“페코 영수증 좀 보여주세요.”
계단을 뛰어 올라가 영수증을 찾았다. 딸아이는 조금 겁이 났는지 나를 도와 영수증을 찾기 시작했다. 책장을 뒤지고, 서랍을 뒤졌지만 영수증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현관문 밖에 서 있는 남자는 계속 “페코 영수증이요.” 하고 외쳐댔다.
사실 그때 뭔가 찝찝한 기분은 있었다. 하지만 한 달 전 서부 여행에서 과속으로 경찰에게 걸린 일이 있었기에 페코가 영수증을 달라고 하면 줘야 할 것 같은 조급한 마음도 있었다. 나는 육감을 믿었어야 했다.
하지만 하필 퇴근 전인 남편에게 전화했다.
“여보, 페코에서 와서 영수증 보여달라는데.”
“영수증? 이상한데.”
“몰라. 어딨는데?”
하필이면 남편은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다. 남편은 흰색 파일 세 번째 칸에 페코 영수증이 있단다. 정말 딱 그 자리에 영수증이 있었다.
“이거요?” 나는 그 흑인 남자에게 영수증을 건넸다.
“네.” 그 남자는 영수증을 하나씩 넘기며 찬찬히 봤다.
“이제 이름이랑 주소를 소리 내서 말해 주세요.”
“근데 영수증은 왜 필요한 거예요?”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한번 더 이름과 주소를 말해달라고 하고는 녹음했다. 바보 같은 나는 물론 다 말해줬다.
“나중에 회사에서 전화해서 만족도 조사할 때 만점 부탁해요.” 하고 그 사람은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이 말했다.
“그 페코 직원이라는 사람 이상한데? 여긴 중요한 건 다 이메일이나 우편으로 하지 사람을 보내진 않아.”
“그럼 영수증 어딨는지 가르쳐주지 말던가!” 나도 왠지 찝찝해서 버럭 화를 냈다.
다음날 메시지를 받았다.
‘아파트 내에 페코를 사칭하는 흑인 두 명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고 개인정보도 주지 마세요.’
영수증을 다시 보니 이름, 전화번호, 주소까지 다 쓰여 있었다. 페코 계좌까지. 미국에 사는 건 처음이라 사기꾼을 알아보는 촉도 부족했던 거다. 사기꾼을 가려내는 일은 경험으로 체득하고 싶지 않은데, 이런 것마저 경험으로 알아 가야 하다니.
같은 아파트 한국 엄마 한 명도 개인정보를 줬단다. 우리는 “이런 몹쓸 사기꾼!” 화를 냈다. 아파트에 방문했던 페코 사칭 사기꾼은 다른 전기회사에서 온 사람이라고 한다. 페코보다 더 싸고 친환경인 전기를 공급할 테니 옮겨 타라고 돌아다니는 거였다고. 사실은 다른 전기 회사면서. 구글에 찾아보니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외국인인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72시간 전에 취소해야 취소 수수료 없이 원래 쓰던 전기 회사를 유지할 수 있단다.
‘개인정보를 다 가지고 있으니 아무 때나 변경하면 어떡하나?’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변경 사항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페코에 전화했다. 한 시간 대기를 각오했지만 5분 안에 전화 연결이 됐다.
“다른 회사에서 전화나 문자가 와도 절대 받지 말고 그냥 무시하세요.” 페코 직원이 말했다.
그리고 변경사항은 없다고.
그날 달콤한 사과 시나몬롤을 구웠다. 달콤한 빵에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미국 생활에서 사기꾼을 알아보는 안목도 추가됐다. 비록 주름은 하나 늘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