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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Feb 22. 2023

요세미티 폴

미국서부여행 - 필라델피아 일상

디즈니에서 <프리솔로>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프리솔로라는 단어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로프나 기타 보호장비 없이 맨 몸으로만 절벽을 오르는 것이 프리솔로다. 겁이 많은 내가 느끼기엔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절벽을 보호장비 없이? 


게임처럼 한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던가, 보석 따위를 흡수해서 생명을 산다던가, 스프링 능력을 획득해서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정상까지 튀어 오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914미터 높이의 엘 캐피탄을 오르는 것을 성공했다. 엘릭스 호놀드라는 등반가였다. 그에게 MRI 검사를 해보니 뇌에서 공포를 느끼는 부분의 기능이 일반인보다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엘 캐피탄은 텔레비전으로 보기에도 공포를 덜 느낀다고 오를 수 있는 절벽이 아니었다. 매일의 신체 단련은 당연하고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동료 등반가들과 호놀드의 대화를 들어보면 엘 캐피탄은 다른 절벽에 비해 잡거나 디딜 수 있게 돌출된 부분이 적어 프리솔로를 하기 힘든 것 같았다. 게다가 프리솔로를 하다 죽은 등반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동료들이 호놀드를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호놀드는 프리솔로를 하는 이유를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프리솔로를 미친 짓이라고 하지만 나는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부과한 도전을 극복하는 기쁨이 있다.”

“확실히 살아 있는 기분을 느낀다.”     


우리 가족은 당연히 엘 캐피탄을 오르진 않는다. 엘 캐피탄은 허가받은 등반가가 아니면 오를 수 없는 절벽이다. 하프돔도 오르지 않는다. 겨울에는 하프돔에 가는 길이 폐쇄되어 있다. 다른 계절에도 하프돔을 등반하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 등반 시간도 10시간 정도 소요돼서 아이들을 데리고 갈만한 길은 아니다. 우리는 겨울에도 그나마 갈 수 있는 요세미티 폭포를 트레킹 하기로 했다.     




요세미티에는 헷치헷치 (Hetch Hetchy), 빅오크플렛 (Big Oak Flat Entrance), 아치락 (Arch Rock Entrance), 사우스 (South Entrance), 티오가 패스(Tioga Pass Entrance ) 이렇게 5개의 출입구가 있다. 

우리 가족은 아치락 아래에 있는 요세미티 뷰 롯지에서 하루를 묵었다.     


모처럼 부지런을 떨었던 아침이었다. 8시에 숙소에서 나와 요세미티 폴로 향했다.


“역시 일찍 나오니까 좋잖아. 그런데 비수기라 그런지 사람이 정말 없다.”

요세미티로 향하는 길에는 우리 차 한 대가 전부였다.      


크리스마스인 그날의 예상기온은 최고온도가 섭씨 16도. 맑고 따뜻한 날일 거라는 예보를 읽었다. 

“필라델피아는 눈보라가 몰아친다는데, 우리 운이 좋은 것 같아. 눈을 피해서 여행 온 것 같아.” 

“뭐? 필라델피아에 눈 온다고? 좋겠다.” 아이들만 아쉬워했다.     


따뜻한 날이라더니. 아치락 입구에서 요세미티로 들어서자 눈이 닿는 모든 것이 흰 눈세상이었다.

“눈이다!” 아이들이 환호했다.

“눈이네.” 남편과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날의 일정은 요세미티 폴 트레킹. 요세미티 폴 주차장에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요세미티로 온 20대 젊은 여행객 몇 팀이 트레킹에 적당한 외투로 갈아입고 배낭을 다시 꾸리고 있었다. 꽤나 추운 날씨였다. 산 위는 고도가 높아 더 추울 것 같았다. 얇은 외투로 갈아입었던 젊은 여행객들과는 달리 우리는 부츠를 신고 옷을 껴입었다. 그들의 옷차림이 현명했다. 요세미티 폴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더워졌기 때문이다. “바람과 해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듯했다. 주차장은 그렇게 춥더니 산 위는 해가 내리쬐고 나시를 입어도 될 만큼 더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배낭은 하나씩 벗은 겉옷으로 빵빵해졌다.      


우리는 금발 남녀, 중국인, 인도인, 한국인, 일본인.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과 어깨를 부딪쳐가며 좁은 산길을 걸었다. 등산을 할 때는 거리 개념이 달라진다.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지다가 돌길이 이어지고, 눈이 쌓인 길이 나타나고 한 명씩 줄을 지어 걸어야 하는 낭떠러지 길이 나온다. 평지에서는 쉽게 걸을 거리도 산 위에서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게다가 숨은 점점 가빠오고 안전한 돌을 밟기 위해 땅을 보다 보면 나는 왜 산길을 오르고 있는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걷다 보면 겨드랑이와 등에 땀이 나서 옷이 축축해지고 불쾌지수가 높아진다. 심지어 이 길은 겨울에도 오를 수 있는 난이도 최하, 안전한 길인데도.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는 거라 우리가 걷는 속도는 형편없이 느렸다. 젊은 미국인 여행객들은 긴 다리로 우리를 지나쳤다. 한편 보폭이 비슷했던 중국인 부부만 산을 오르는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주쳤다. 중국인 부부는 미국에 뿌리내리고 사는 이민자 같았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제 편하게 호흡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우리 가족처럼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응하느라 버둥거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도 둘은 모국어인 중국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요세미티 폴에서는 맞은편에 있는 하프돔이 잘 보인다. 그리고 다들 오르고 있는 요세미티 폴도. 여름이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천둥이 치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한다. 하지만 얼어붙은 폭포는 거대한 고드름이 되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바위가 평평하고 하프돔이나 요세미티 폴이 잘 보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중국인 부부가 쉬고 있었다. 아니면 우리 가족이 쉬고 있으면 중국인 부부가 올라와 배낭을 내려놓는 식이었다. 


중국인 부부와는 처음에는 수줍게 눈인사만 했다. 

“안녕하세요.” 몇 번 마주치자 우리는 그제야 인사를 나눴다. 그 부부와는 요세미티 폴에 오르는 동안 같은 보폭으로 계속 마주치겠지 싶었다. 

“아이들이 몇 살이에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때 이야기의 시작은 늘 아이들 나이다.

“10살, 12살이에요.”

“어머, 아이들이 산 길도 오르고 기특하네요. 우리 아들은 22살이랑 16살인데 벌써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따라가기 벅차서 우리는 천천히 따라가려고요.”     


1.5 마일을 올랐는데 2시간이 걸렸다. 산의 중턱이었다. 큰 돌이 이어지고 눈 덮인 길이 이어졌다. 남편이 길이 어떤지 둘러보고 왔다. 이제 길이 험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은 무리. 둘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있었다. 배낭에 넣어둔 스니커즈와 칸쵸도 이미 다 먹었고 물도 떨어졌다.      


산에 오르는 일은 참 이상해서 정상까지 오를 작정이 아니었는데도 발걸음을 돌릴 때면 왠지 포기한 듯한 느낌이 든다. 나만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무리해서 정상까지 기어이 올라야만 성에 찬다. 그러고 집에 오면 발목이나 발가락이 아파서 하루는 고생한다.


필라델피아에서 라스베가스까지 비행기를, 라스베가스에서 10시간을 차에서 버텨가며 힘들게 요세미티까지 왔다. ‘뭔가 대단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아 억울했다. 정상에 가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현명하게 그만둬야 할 때를 선택했다. “억지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겠지만 그만큼을 다시 내려와야 하잖아.” 남편의 말에 둘째가 어찌나 기뻐하던지.

사실 처음부터 정상을 목표로 요세미티 폴에 온 것도 아니었다.     


중국인 부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것도 그때쯤이다. 역시 하프돔이 잘 보이는 평평하고 넓은 곳이었다. “우리는 이제 올라갈게.” 중국인 부부는 우리에게 인사하고 정상으로 올랐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산했다. 그 부부는 정상까지 올랐을까.      


우리는 무사히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시간은 2시 반. 정상까지 오르지 못했다는 억울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트렁크에서 숭늉이 담긴 보온병을 꺼내 훌훌 불어 마셨다. 

“참 좋았다. 그지?” 이야기 나눴다. 

아이들은 배가 고픈 것도 잊었는지 눈싸움을 했다.     

찬 겨울 냄새와 숭늉의 구수한 냄새,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눈을 날리는 소리.

그 먼 곳까지 갔는데도 어마어마한 하프돔 보다 그런 평범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다니,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은 매번 이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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