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나 Mar 15. 2023

겨울은 역시 비수기구나!-그랜드 캐니언

미국서부여행-필라델피아 일상

“오늘 날씨는?”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루 종일 흐리고 눈이 옵니다.”

자기 전에 본 일기 예보가 엇나가길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보니 그래도 완벽한 흰 세상은 아니었다. 우리는 숙소에서 차로 5분 거리 마터 포인트로 향했다.     


난간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아이쿠.”

인도로 한 발을 내딛자마자 뒤로 넘어질 뻔했다. 간밤에 내린 눈이 꽁꽁 얼어있었다. 아침 일찍 공원 직원들이 주차장의 눈을 인도 구석으로 쌓아뒀고, 남은 눈은 사람들이 밟아서 얇은 빙판이 됐다. 한 발 한 발 걸음마하듯이 조심조심 걸어 난간을 꼭 잡았다. 모두 게처럼 난간을 잡고 옆으로 옆으로 걸었다.     

발을 헛디뎌 실수로 허우적거리다가 누군가를 실수로 쳐서 “쏘리.”를 연발했다. 모두 허탈한 표정이었다. 그새 안개는 더 짙어져 흰 안갯속에 모든 것이 가려졌다. 


흰 안개 벽. 그날 그랜드 캐니언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날이 개길 기대했을 것이다. 적어도 눈이 그치기를. 불투명한 흰 안개 대신 뭔가 보이기를. 하지만 날은 점점 흐려지기만 했다. 트래킹을 하기에도 위험한 날이었다.      

전날 밤에 그랜드 캐니언 숙소에 짐을 두자마자 우리는 같은 곳, 여기 마터 포인트에 왔었다. 전날 그랜드 캐니언에 오는 길에는 내내 눈이 왔지만 막상 그랜드 캐니언에 도착했더니 구름 한 조각 없이 맑았다. 그래서 ‘이런 하늘인데 내일 눈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별구경을 하러 마터 포인트에 온 거다. 우리는 텅 빈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차 전조등마저 꺼지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별빛만 빛났다. 나는 밤하늘이 볼 틈도 없이 내 모든 감각은 어둠에 바짝 긴장해 버렸다. 마터 포인트 구석에는 트레킹 입구가 있는데 별빛도 닿지 않는 숲은 어둠을 다 삼킨 듯했기 때문이다. 

‘저 숲에서 누가 나올까? 혹시 누군가 총을 들고?’ 뉴스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아니면 도끼를 든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공포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바보처럼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은하수, 그리고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두고도 나는 어둠에 졸아서 바짝 긴장하기만 했다. 공포를 먹는 요괴 ‘어둑시니’가 날 봤다면 어둑시니는 점점 커져서 은하수까지 닿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날 밤하늘을 보러 나간 것은 선견지명이었다. 그렇게 맑은 하늘은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명이 80세에 불과하지만 그랜드 캐니언은 20억 년. 붉은 흙이 쌓이고 또 쌓이고, 그걸 콜로라도 강이 깎고 또 깎아서 가파른 협곡을 만들었다. 협곡 덕분에 우리는 그랜드 캐니언에서 과학시간에나 들었던 선캄브리아시대부터 고생대 중생대를 거쳐 신생대까지의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흰 안개뿐. 10m 앞도 보이지 않는 흰 벽에 둘러싸였다.      


우리는 마을로 내려가 몸을 녹이기로 했다. 딱히 갈 곳이 없어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스타벅스에는 같은 처지인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사람들은 주문을 하려고 카운터 앞에서 길게 구불구불 줄지어 기다렸다. 3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카페라테와 민트초코 음료를 주문하고 다시 십 분을 기다려 음료를 받았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 바로 스타벅스였을 거다. 내가 음료를 사는 동안 아이들은 비지팅 센터에서 받은 주니어 핸드북을 완성했다. 미국의 국립공원은 아이들에게 핸드북을 제공하고 핸드북을 완성하면 국립공원 주니어 레인저 배지를 준다. 배지라도 받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았다.     


“핸드북 다했어.”

“벌써?”

“어차피 쓸 것도 없어.”     


아이들 핸드북을 펼쳤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본 것: 눈, 안개’ 

‘그랜드 캐니언에서 본 동물: 아무 동물도 보이지 않았음.’

‘그랜드 캐니언에서 들은 것 : 바람 소리’ 

‘그랜드 캐니언 날씨는 : 추웠다’

‘오늘 그랜드 캐니언에서 어떤 느낌이었나? 안개 낀 느낌’


“풋.” 음료를 뿜을 뻔했다. 하지만 보지도 않은 것을 꾸며서 쓰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개가 개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체크인 시간에 맞춰 예약해 둔 레드페더 롯지에 들어갔다. 전날은 그랜드 캐니언 내에 있는 롯지에서 묵었다. 하지만 그 롯지는 물도 졸졸 나오고, 세면대에 물도 잘 내려가지 않아 그랜드 캐니언 밖에 있는 숙소로 다시 예약했다. 여기는 물도 잘 나오고 배수 문제도 없었다.     

비록 티브이는 잘 안 나왔지만. 하루종일 추운 야외에서 눈보라를 맞다가 일찍 숙소에 들어왔는데 티브이도 잘 안 나오고. 할 수 없이 강제로 일찍 잠이 들었다.     


‘내일은 조금이라도 날이 개길.’ 

아마도 그날 밤 그랜드 캐니언에서 묵는 사람들 모두 한 마음으로 바랐을 거다.


<Thomas Moran / Grand Canyan of the Colorado River>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품. 그랜드 캐니언은 원래 이렇다네요.


작가의 이전글 생리대 찾아 삼만리 - 그랜드 캐니언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