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창립자보다 무려 두 배의 재산을 가진 중간 관리자
얼마 전에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선재 업고 튀어'라는 드라마를 아시나요? 제가 최근 들어 제일 재밌게 봤던 드라마인데, 극의 후반부에서 톱스타로 나오는 남자 주인공 류선재의 매니저인 박동석이 이런 대사를 외칩니다.
"불쌍한 K-직장인이잖아요~ 다들 이런 사직서 하나쯤은 가슴속에 품고 다녀요~"
그러면서 자기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사직서를 스윽하고 꺼내서 보여줍니다. 류선재가 사직서를 받아주겠다고 내놓으라고 하니 절대 안 내놓긴 합니다만. 하지만 류선재에게 짜증이 날 때마다 박동석은 상상할 것입니다. 평범한 매니저인 그가 경제적으로 당당하게 독립해서 자신의 톱스타에게 쿨하게 사직서를 내는, 뭐 그런 통쾌한 상상을.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승진을 위한 경쟁은 치열합니다. 하지만 임원이나 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많은 사람들은 중간 관리자급에서 커리어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 현실이 많은 이들에게 좌절감을 느끼게 합니다.
회사의 팀장이 본인 월급의 몇 배 아니 몇십 배를 받는 임원보다 더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일이 최근 미국에서 일어났다는 글이 X(트위터)에 올라왔습니다.
오늘 나는 18년 동안 근로자주식매입제도를 최대한 활용한 한 명의 중간급 엔비디아 직원(엔지니어는 아님)에 대해 알았다. 근로자주식매입제도는 직원들이 급여의 10-15%를 사용해 회사 주식을 15%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게 해주는 혜택이다. 이 사람은 현재 6,200만 달러(한화로 약 860억 원) 상당의 주식을 가지고 엔비디아를 퇴사했다 (그리고 그 직원은 회사에서 일할 동안 단 한 번도 주식을 팔지 않았다).
현재 미국 주식시장 시가총액 3위이자 '매그니피센트 세븐'(Magnificent Seven)에 포함되는 7개의 회사 중 하나인 엔비디아(Nvidia)는 인공 지능 컴퓨팅 개발을 주도하는 테크 회사입니다. 최근 AI붐으로 그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주가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아래의 차트를 보면 18년 전 저 중간급 직원이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할 당시에는 주당 35센트 하던 엔비디아 주식이 현재 약 367배(!) 오른 $128.29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엄청난 성장입니다.
엔비디아는 반도체 기업이기 때문에 핵심 인력은 엔지니어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셜미디어에 글을 쓴 사람은 860억 원의 자산가인 중간급 직원이 엔비디아의 핵심 인력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그 직원은 핵심 인력인 엔지니어들보다 낮은 월급을 받았다'라는 말 같습니다. 엔비디아라는 조직 안에서 상대적으로 평범한 업무를 담당했을 거 같은 비엔지니어 중간급 직원이 푸근하다 못해 3대가 먹고살 수 있는 퇴직금을 스스로 만든 비결은 바로 '근로자주식매입제도'였습니다.
근로자주식매입제도(Employee Stock Purchase Plan, ESPP)는 주식보상제도 (equity-based compensation plans)의 한 종류입니다. 위의 X/트위트에서 알 수 있듯이 ESPP는 직원이 본인 급여에서 일정 금액을 일정 기간(예: 3개월, 6개월) 동안 공제해 적립한 후 적립 기간이 종료되는 날에 해당 적립금으로 회사 주식을 최대 15% 할인된 금액으로 구매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입니다. 직원은 적립금으로 주식을 사고 난 후에 원한다면 또다시 같은 프로세스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저 엔비디아 직원은 이 프로세스를 18년 동안 반복한 것입니다.
주식을 구매하면 직원은 회사의 주주가 되고, 회사가 성장하고 수익이 늘어날수록 직원이 소유한 주식의 가격도 상승할 수 있습니다. 주식 가격이 상승함으로써 직원의 자산이 늘어나게 됩니다. 회사의 수익을 나누는 주주로서, 직원이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하도록 동기부여하는 것이 주식보상제도의 핵심입니다.
엔비디아 직원이 ESPP를 이용해 860억 원의 자산을 이루게 된 비결은 간단합니다.
쉬지 않고 꾸준히 내 월급의 일부분을 내 회사에 투자하고 기다리는 것.
한 줄로 요약되는 비결이지만, 생각해 보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 직원같이 하려면 적어도 다음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 엔비디아 주식은 우상향 하고 있었지만,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AI붐을 제대로 만나 직원의 자산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마치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류선재역을 맡은 배우 변우석이 9년간의 조연 시절 끝에 주연 배우로서 날개를 달은 것처럼 말입니다.
세 가지 조건이 다 만만치 않지만, 저는 특히 3번이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모든 것을 다 알고 나서 과거를 보면 쉽지만, 아이폰이 출시된 게 2007년 6월입니다. 2007년 말 세계 금융 위기가 시작되었고,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엔비디아도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엔비디아가 핫한 주식이 된 건 2020년 코로나 때부터입니다. 이 역사를 생각해 보면 아무리 회사의 경영진들이 뛰어나다 한들, 내가 나의 회사에 대해 잘 안다고 한들, 2006년부터 쉬지 않고 주식을 매입하고 기다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인이라면 한번 내 회사를 대입해서 생각해 보세요. 이건 이성적인 논리 이상의 영역입니다.
여담으로 엔비디아의 창립자 중 한 명인 Curtis Priem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의 엔비디아 지분을 처분했어야 했는데, 그 주식들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무려 70조 달러, 한화로 97조 원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뭐 그래도 현재 자산이 3천만 달러 (한화로 416억 원)이니 우리가 그의 노후를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저 중간급 엔비디아 직원이 회사 창립자의 재산보다 두 배가 많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회사의 핵심 인력도 아닌 중간급 직원이 회사 창립자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던 비결은 치열한 밸류에이션 공부가 아닌 꾸준함, 절제, 그리고 인내심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주식보상제도가 흔하지만 아직 한국은 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제도에는 리스크가 따릅니다. 회사가 성장하지 못하면 직원이 가지고 있는 주식의 가치 또한 내려갑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국의 회사들이, 특히 스타트업들이 주식보상제도를 시행하는 것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직원들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직원을 회사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만큼 강력한 동기부여가 또 어디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