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로소피아 Sep 13. 2024

CT 한 번에 3천만 원 청구하는 미국 응급실

퇴사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느낌이 싸했다.  


아니나 다를까, 비행기에서 내리려고 일어나는 순간부터 발을 내디딜 때마다 허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통증에 눈물을 흘리자, 승무원이 나를 휠체어에 태워 주었고, 항공사는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 티켓을 끊어주었다. 살면서 미국 항공사가 이렇게 일을 빨리 처리하는 걸 처음 봤다.  


남편에게 "나 잘 다녀올게~" 하고 떠난 지 몇 시간 만에, 내 집 침대에서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는 신세가 되었다.


미국은 의사를 보려면 미리 예약을 잡아야 하고, 이 예약이 보통 몇 주일, 심지어 몇 달 뒤로 잡히기도 한다. 게다가 의료 민영화 나라이기 때문에, 내 의료보험을 받아 주는 곳 ('인 네트워크', in network)을 미리 확인한 후, '인 네트워크' 의사에게 예약을 해야 보험 처리가 된다.


그래서 미국에서 갑자기 아파서 당장 의사를 보고 싶으면 응급실에 가야 한다.  


이렇게 내 생애 최초로 응급실에 가보게 됐다. 앰뷸런스를 부르면 병원비 폭탄을 맞을까 봐 남편이 나를 간신히 차에 태워 인근 응급실로 갔다.


의료진이 내 증상을 듣더니 CT를 찍어보자고 했다.  

응급실이 이렇게 상큼하진 않았는데...

CT 스캔 결과 허리 디스크는 있지만, 디스크가 터지진 않았다고 했다. 다만 주위 근육에 경련이 심하게 일어난 것 같으니 약 먹고 파스 붙이고 며칠 쉬라고 했다 (이게 소위 담 걸린 것인가? 그리고 결국 처방전은 파스인가?).  


그래도 원인을 알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사람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더니, 나도 응급실에 한 번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응급실이 집 근처에 있고 잘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음 깊이 깨달았다.  


스캔 결과를 기다릴 동안 응급입원실 같은 곳에 누워있었는데, 내 의료보험 약관에 따른 응급실 방문 비용 100달러(13만 원)를 계산하러 직원이 들어왔다. 그래, 아파도 돈은 내야지. 이건 말 그대로 응급실에 들어온 값이다. 진료 비용이 아니다.


누운 자리에서 바로 계산하니 일시불 할인이 들어가 최종적으로 80달러(11만 원)를 냈다. '나중에 또 얼마짜리 큰 청구서가 집으로 날아올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응급실에 다녀온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상하게 청구서가 더 날아오지 않아서, 보험사 사이트에 로그인해 보니 '비용 지불 완료'라고 떴다. '어라? 그때 지불한 80달러가 전부인가?' 싶어 세부 내용을 클릭하는 순간 '뭐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총 진료 비용: $22,000 (3,000만 원)

의료 보험 할인: $19,000 (2,600만 원)

의료 보험사 부담: $2,900 (390만 원)

환자 부담: $100 (13만 원)


세부내용을 자세히 보니, 응급실 이용료가 원래 13만 원이 아니라 1천만 원이었다.


의료 보험이 없었으면 정말 응급실에서 CT 찍고 3천만 원 청구서 받을 뻔했다.


미국생활 팁:
 
만약 의료 보험 없이 진료를 받았다면, 청구된 비용을 바로 수용하지 말고, 병원과 협상을 하길 바란다. 소득이 낮다면 병원에 있는 소셜워커가 도와줄 것이고, 소득이 낮지 않다 하더라도 충분히 협상의 여지가 있다. 위에만 봐도 의료 보험사와 병원 간에 합의된 할인 금액이 19,000달러이지 않은가.
 
미국에 여행 올 거라면 여행자 보험을 가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응급실 비용 세부 내용을 본 그날이, 내가 직장인이라는 것에 감사한 날 베스트 3 안에 꼽힐 것 같다.


2023년 기준, 미국 직장인들의 평균 가족 의료 보험료는 연간 23,968달러, 한화로 3,200만 원이다 (출처: KFF). '평범한' 직장인이 부담하기엔 터무니없이 비싼 금액이다. 그래서 직장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베네핏 중 하나가 의료보험이다. 회사가 의료보험비의 상당 부분을 보조해 주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정부를 통한 메디케어는 65세가 돼서야 받을 수 있으니, 부부 중 한 명은 메디케어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직장을 다녀야 가족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의료보험 때문에 파이어족 되기 쉽지 않다.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응급실에 갔던 그날을 떠올린다. 2,990만 원을 회사 의료보험덕에 아낀 그날을.


주말까지 하루 남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