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네피림
[시점: 2051년 4월 3일 밤 11시 52분. 제7 핵융합 발전소 지하 5층 접근]
나는 엘리베이터 샤프트로 몸을 던졌다.
어둠 속으로의 자유 낙하.
휘이이이잉-
바람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1.2톤의 금속 덩어리가 지하 5층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중력 가속도: 9.8m/s².
낙하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초: 9.8m/s 2초: 19.6m/s 3초: 29.4m/s
HUD에 경고가 떴다.
[낙하 속도: 초속 30m 초과] [충격 예상: 치명적]
지하 4층 통과.
샤프트 벽면에 붙은 층수 표시판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B4F]
지하 5층 접근.
아래에서 붉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상등.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보이는 것.
바닥.
시멘트 바닥.
거리 10미터.
5미터.
3미터.
나는 양팔과 양다리를 뻗어 샤프트 벽면의 가이드레일을 움켜쥐었다.
끼기기기기기긱!
티타늄 장갑과 강철 레일이 마찰하며 거대한 불꽃을 토해냈다.
마찰열.
손바닥 장갑 표면 온도: 400도.
레일이 녹기 시작했다.
내 손아귀에서 강철이 버터처럼 물렁해졌다.
하지만 속도는 줄었다.
30m/s → 20m/s → 10m/s.
그래도 여전히 빨랐다.
마찰열이 수트 내부 온도를 더 끌어올렸다.
[내부 온도: 68℃ → 71℃]
숨이 막혔다.
폐포가 익어가는 기분이었다.
목구멍이 타들어갔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기도를 태웠다.
쾅!
샤프트 바닥에 착지했다.
충격 흡수 서스펜션이 한계까지 압축되며 비명을 질렀다.
쉬이익! 푸슉!
유압 실린더에서 작동유가 새어나왔다.
무릎을 꿇은 채, 나는 눈앞에 있는 B5F의 두꺼운 방폭문을 노려보았다.
두께 30cm.
강화 콘크리트 + 강철 프레임.
표면에 노란색 경고 표지.
[출입금지 구역] [허가받지 않은 출입 시 즉시 사살] [생물학적 위험 구역]
HUD 카운트다운.
[남은 가동 시간: 6분 14초]
"마지막이다."
나는 남은 유압을 모두 끌어모았다.
팔과 다리의 서보모터가 최대 출력으로 돌아갔다.
위이이잉!
방폭문 손잡이를 잡았다.
아니, 손잡이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문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당겼다.
끼기기직!
문이 삐걱거렸다.
30cm 두께.
무게 5톤.
하지만 나는 1.2톤 수트를 입은 거인이다.
근력 × 3배 증폭 = 1,500kg 출력.
쩌적! 콰드득!
문 프레임이 휘어졌다.
볼트가 하나씩 튀어나갔다.
퉁! 퉁! 챙!
마지막 볼트가 떨어져 나갔다.
문이 열렸다.
우우웅...
무거운 문이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붉은 비상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열기.
확.
뜨거운 공기 덩어리가 얼굴을 때렸다.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끔찍한 열기.
HUD 센서가 즉시 반응했다.
[외부 온도: 48℃] [습도: 90%] [경고: 열사병 위험]
하지만 그 열기를 뿜어내는 것은 기계나 소각로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나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제7 핵융합 발전소 B5F - 생체 에너지 추출 시설]
축구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거대한 지하 공간.
천장 높이: 15미터.
면적: 약 14,000m² (축구장 2개 = 14,000m²)
그곳에는 투명한 원통형 캡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정확히 계산된 간격으로.
가로 20줄 × 세로 25줄 = 500개.
마치 거대한 건전지 팩처럼.
아니, 포도주 저장고처럼.
각 캡슐:
높이: 4미터
지름: 2미터
재질: 강화 아크릴 (두께 10cm)
내부 액체: 붉은 냉각수
그리고 캡슐 안에는...
나와 같은 거인들이 갇혀 있었다.
"이게... 대체..."
목소리가 떨렸다.
벌거벗은 채 캡슐 안에 서 있는 거인들.
신장 평균 3미터.
체중 추정 250~300kg.
그들의 몸에는 굵은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꽂혀 있었다.
열교환 시스템:
냉각 파이프 (빨간색)
가슴팍 2개소
허벅지 양쪽 2개소
총 4개의 굵은 파이프 (지름 5cm)
붉은 냉각수 순환
목적: 체열 추출 (42~45℃)
호흡 시스템 (투명)
입에 물린 두꺼운 호스 (지름 10cm)
인공호흡기 연결
쉬익... 푸우... 쉬익... 푸우...
규칙적인 기계음.
분당 15회 호흡.
강제 환기.
흡입: 고농도 산소 (O₂ 35%) 배출: 고농도 이산화탄소 (CO₂ 5~8%)
영양 공급 (노란색)
목에 꽂힌 가느다란 튜브
정맥 주사
내용물: 고농도 포도당 + 아미노산 + 전해질
배설 시스템 (검은색)
하복부 카테터
자동 배출
그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것처럼.
아니.
약물 유도 혼수 상태.
각 캡슐 상단에 작은 모니터가 붙어 있었다.
화면에 정보가 떴다.
[피험자 #042] 신장: 287cm 체중: 264kg 체온: 43.2℃ 심박수: 145 bpm 발열량: 8,200 kcal/day CO₂ 배출: 2.8kg/day 상태: 안정
8,200 칼로리.
하루 발열량.
일반인의 4배.
500명 × 8,200 kcal = 4,100,000 kcal/day.
410만 킬로칼로리.
와트로 환산하면.
4,100,000 kcal ÷ 24시간 ÷ 860 (환산 계수) ≈ 200kW.
200킬로와트.
가정 100가구가 쓸 수 있는 전력.
그리고 CO₂.
500명 × 2.8kg = 1,400kg/day.
하루 1.4톤.
온실 식물들이 광합성에 쓸 수 있는 탄소.
"진우야..."
헤드셋 너머로 선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내 수트 카메라로 전송되는 이 지옥을 보고 있었다.
"이건..."
선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인간 배터리 공장'이야."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체열로 발전소 보조 터빈을 돌리고, 포집한 CO₂를 파이프로 어디론가 보내고 있어."
"어디로?"
"경로 추적 중... 잠깐."
키보드 타이핑 소리.
빠르고 다급하게.
"...서울이야."
선호가 중얼거렸다.
"청와대 지하 150m. 지도에도 안 나오는 시설. 코드명: '에덴(Eden)'. 국가 최고 기밀 스마트팜."
"고위 관료들 전용... 식량 생산 기지."
나는 캡슐 하나에 다가갔다.
피험자 #042.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
근육질 체격.
얼굴에 여드름 자국.
턱에 수염이 자라다 만 흔적.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친구.
그리고 지금은.
보일러.
가스통.
내 머릿속에서 하얀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탁.
정부는 핵융합으로 지구를 망쳐놓고.
그 부작용으로 변이된 사람들을 잡아다.
자신들의 밥상을 차릴 온실의 연료로 쓰고 있었다.
"누구냐."
그때, 중앙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조하고 차분한 목소리.
나이 든 남성.
60대 중반.
"기간테스 알파의 방어선을 뚫고 여기까지 내려올 줄은 몰랐군."
목소리가 천장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놀라운 생존력이야. 수트 가동 시간 15분 제한을 알면서도 돌입했다는 건... 자살 행위 아닌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공장 끝.
50미터 거리.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통제실이 보였다.
폭 10미터, 높이 3미터.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내부가 훤히 보였다.
그 안에는 흠잡을 데 없는 맞춤 정장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회색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겼다.
금테 안경.
하얀 셔츠에 감색 넥타이.
손목에 롤렉스 시계.
밖의 50도 지옥과는 철저히 분리된, 에어컨이 돌아가는 쾌적한 통제실 안.
실내 온도 22도.
그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백자 찻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녹차.
"윤기호(尹基浩)."
선호가 즉각 신원을 파악했다.
"61세.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졸업. MIT 박사.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 현 국가안보실장 겸 에너지통제위원회 위원장."
"핵융합 상용화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야. 2040년부터 지금까지 11년간 이 프로젝트를 총괄했어."
나는 분노로 온몸을 떨며 통제실을 향해 걸었다.
쿵. 쿵. 쿵.
1.2톤의 발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바닥에 발자국이 패였다.
10cm 깊이로.
캡슐들 사이를 지나갔다.
피험자 #001.
피험자 #042.
피험자 #137.
피험자 #289.
피험자 #500.
500명.
500개의 이름.
500개의 삶.
지금은 500개의 배터리.
유리벽 앞에 섰다.
윤기호가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에 공포라곤 1그램도 없었다.
오직 숫자와 계산만이 들어찬 차가운 뱀의 눈.
"그 흉측한 수트를 입고도 7분을 넘게 버티다니."
그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기록적이군. 내부 온도가 70도는 넘었을 텐데. 자네, 이룸홀딩스의 백진우 대표인가?"
나는 유압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닥쳐."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유리를 깨부수고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어주마."
"부숴도 좋아."
윤기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그 전에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다. 6분 남았지? 충분해."
그가 테이블 위의 버튼을 눌렀다.
삐.
통제실 뒤편 벽면의 대형 모니터 10개가 일제히 켜졌다.
[모니터 #1: 서울 청와대 지하 스마트팜]
거대한 온실.
LED 조명 아래 무성한 상추, 토마토, 벼.
작업복 입은 사람들이 수확하고 있었다.
[모니터 #2: 초등학교 급식실]
아이들이 줄 서서 초록색 알약을 받고 있었다.
비타민-G.
쓴 표정으로 씹어 삼키는 아이들.
[모니터 #3: 식량 배급소]
수백만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수척한 얼굴들.
움푹 들어간 눈.
배급받는 것: 스테이크 200g + 알약 1개.
[모니터 #4: 농장]
벼가 3미터 높이로 자라 있었다.
하지만 이삭은 비어 있었다.
알곡이 없었다.
[모니터 #5: 병원]
영양실조 환자들.
침대가 복도까지 넘쳐났다.
[모니터 #6~10: 전국 주요 도시 CCTV]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인천.
거리는 한산했다.
사람들은 집에 숨어 있었다.
배고픔을 피해.
윤기호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자네가 이 캡슐들의 연결을 끊고 전력을 차단하면."
그가 손가락으로 모니터 #1을 짚었다.
"이 스마트팜의 식물들이 탄소 부족으로 시들어. 일주일 안에."
손가락이 모니터 #2로 옮겨갔다.
"아이들에게 줄 비타민-G 생산이 중단돼. 한 달 안에 전국 초등학생의 30%가 뇌 손상을 입어."
모니터 #3.
"식량 배급이 끊겨. 당장 내일 아침 대한민국 인구 5,000만 명 중 1,000만 명이 굶어."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한 달 후엔 폭동이 일어나. 약탈, 살인, 강간. 질서가 무너져. 문명이 끝나."
"개소리 마."
내가 으르렁거렸다.
"너희들 뱃속을 채우려는 거잖아!"
"부인하지 않지."
윤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와대 스마트팜에서 생산되는 쌀의 70%는 고위 공직자들이 먹어. 장관, 차관, 국회의원, 군 고위 장성."
"하지만 나머지 30%는 학교, 병원, 연구소로 가. 교사들, 의사들, 과학자들.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 인력들이지."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방탄유리에 손을 짚으며 다가왔다.
"지도부가 굶어 죽으면 무지몽매한 대중은 통제 불능의 폭도로 변해. 역사가 증명하잖아.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아랍의 봄. 굶주린 민중은 약탈자가 돼."
"우리는 질서를 유지하는 거다. 문명을 지키는 거지."
"문명?"
나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을 배터리로 쓰는 게 문명이냐?"
"그래."
윤기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핵융합은 실패했다. 인정하지."
그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산소는 넘쳐나. 25%를 넘었어. 내년엔 27%가 될 거야."
"바다는 죽었어. 자주색 남세균이 전 해양을 뒤덮었지."
"탄소는 말랐어. 대기 중 CO₂ 농도가 150ppm까지 떨어졌어. 식물이 굶어 죽고 있어."
"하지만 돌이킬 수 없어."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발전소 37개를 모두 끄면 어떻게 될까? 한국 전체가 정전돼. 병원, 정수장, 통신망 전부 멈춰. 일주일 안에 사망자 100만 명이야."
"그래서 우리는 '적응'을 선택한 거다."
그가 캡슐 속 거인들을 가리켰다.
"이들은 괴물이 아니야."
목소리가 낮아졌다.
"구세주지."
"일반인은 숨만 쉬어도 산소를 낭비하고 식량을 축내.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숨을 쉴 때마다 식량을 만들어내."
"체온 43도. 심박수 145회. 대사량이 일반인의 5배야. 그들이 뿜어내는 열로 터빈을 돌리고, 배출하는 CO₂로 식물을 키워."
"열역학적으로 완벽한 영구 기관이야."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네도 그 껍데기를 벗고 저 캡슐 안으로 들어가."
그가 속삭였다.
"그럼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영웅이 되는 거다. 자네 한 명이 하루에 만들어내는 CO₂로 100명이 먹을 쌀을 생산할 수 있어. 자네가 1년 캡슐에 있으면 36,500명을 살리는 거지."
"영웅?"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부 온도 74도.
땀이 이미 다 증발해버렸다.
피부가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입술이 갈라졌다.
"웃기고 있네."
목소리가 쉬었다.
"남의 피를 빨아먹고 연명하는 걸 기생충이라고 부르지."
나는 윤기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진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가 주먹을 내지르려던 순간이었다.
우구구구구궁-
발밑이 울렸다.
수트의 진동이 아니었다.
지구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행성 자체의 비명.
저주파.
3Hz 이하.
귀로 들리지 않는 소리.
하지만 뼈로 느껴지는 진동.
HUD에 경고가 떴다.
[경고: 대규모 지진파 감지] [진원지: 해운대 앞바다 15km 해저] [예상 진도: 리히터 규모 7.2] [도달 시간: 8초]
"뭐... 뭐야!"
늘 차분하던 윤기호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손에서 찻잔이 미끄러졌다.
챙그랑!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다.
녹차가 바닥에 쏟아졌다.
"선호야!"
내가 외쳤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진우야!"
선호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해일이야! 슈퍼문이 임계점을 넘었어!"
키보드 소리가 요란했다.
"지금 계산 중인데... 제길, 숫자가 미쳤어!"
"무슨 소리야!"
"핵융합으로 바닷물이 줄어들었잖아! 바다 질량이 2% 감소했어!"
"그래서?"
"태평양 지각판이 가벼워진 거야! 2%면 별거 아닌 것 같지? 천만에!"
선호가 숨을 헐떡였다.
"바다가 지각판을 짓누르고 있었어. 무게로. 근데 그 무게가 줄어들면..."
"짓눌려 있던 지각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거야!"
"지각 반동(Crustal Rebound)!"
"거기에 슈퍼문까지 겹쳤어. 달의 인력이 최대치야. 평소의 1.47배!"
"조석력이 지각을 당기고, 가벼워진 지각판이 반발하면서..."
우우우우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콰아아아앙!
B5F 전체가 흔들렸다.
콘크리트 바닥이 쩍 갈라졌다.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캡슐들이 흔들렸다.
덜컹! 덜컹!
캡슐 몇 개가 앵커 볼트가 뽑히며 쓰러졌다.
쾅! 콰당!
4미터 높이 캡슐이 바닥에 쓰러지며 깨졌다.
투명 아크릴이 산산조각 났다.
안에 든 붉은 냉각수가 쏟아졌다.
촤아아악!
거인 하나가 파이프에 매달린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이 없었다.
그리고.
벽면.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균열.
쩌적! 쩍!
균열이 벌어졌다.
그 너머로 뭔가 보였다.
파이프.
굵은 파이프.
지름 2미터.
강철 파이프.
해수 유입 파이프.
쩌적!
파이프가 터졌다.
쏴아아아아아아!
차디찬 바닷물이 초당 수십 톤씩 쏟아져 들어왔다.
압력: 5기압 (수심 50m).
분당 유량: 3,000톤.
50도의 열기로 가득 찬 지하 5층.
15도의 차가운 바닷물.
온도 차: 35도.
퍼퍼퍼펑!
물이 순식간에 기화하며 수증기 폭발(Steam Explosion)을 일으켰다.
하얀 수증기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가득 찼다.
시야 제로.
"안 돼!"
통제실 안의 윤기호가 기겁하며 무전기를 집어들었다.
"펌프를 켜! 당장 배수 펌프를 켜!"
무전기에서 잡음만 들렸다.
치지지직...
전력이 끊긴 듯 통제실 내부 조명도 깜빡거렸다.
탁. 탁. 탁.
비상등만 깜빡였다.
붉은 빛.
"진우야!"
선호가 외쳤다.
"대해일이 방파제를 넘었어! 높이 18미터!"
"발전소 전체가 잠기고 있어. 1층 침수. 2층 침수."
"3분 안에 B5F 완전히 물에 잠겨. 당장 나와!"
"이 사람들은..."
나는 캡슐들을 둘러봤다.
500개.
500명.
"이 캡슐에 갇힌 사람들은 어쩌고!"
"다 구할 순 없어!"
선호가 소리쳤다.
"그리고 네 수트 가동 시간 2분 남았다고!"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차가웠다.
수트 외부 장갑이 물에 닿으며 치이이익 소리를 냈다.
표면 온도 80도.
물이 끓었다.
하지만 계속 쏟아져 들어왔다.
무릎.
허벅지.
수트가 식어가는 건 다행이었다.
[내부 온도: 74℃ → 68℃ → 61℃]
하지만 물이 계속 차오르면.
1.2톤 쇳덩어리는 그대로 관이 되어버린다.
나는 갈라진 통제실 방탄유리 앞으로 달려갔다.
철벅! 철벅!
물을 헤치며.
지진의 충격으로 유리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그 안에서 윤기호가 나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등이 벽에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살려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가 죽으면 국가 비상 시스템이 작동 안 해. 내 홍채 인식이 필요하다고..."
"닥쳐."
나는 유압 주먹을 들어 올렸다.
"넌 이미 죽었어."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장창!
방탄유리가 거미줄 금이 가더니.
퍼드득!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이 쏟아졌다.
나는 윤기호의 멱살을 잡았다.
정장 깃.
비단 넥타이.
"켁!"
그를 들어 올렸다.
340kg 거인의 팔 힘.
윤기호는 60kg.
깃털처럼 가벼웠다.
통제실 밖으로 던졌다.
물이 차오르는 B5F 바닥으로.
철썩!
"커억! 캑!"
윤기호가 더러운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렸다.
물 속에서 일어서려다 미끄러졌다.
철썩!
다시 넘어졌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중앙 제어 패널로 달렸다.
통제실 안쪽.
천장까지 이어진 서버 랙.
깜빡이는 LED 불빛.
메인 제어 시스템.
수트 배터리 잔량: 1%.
마지막 힘을 짜냈다.
오버클럭.
120% 출력.
위이이잉!
주먹을 뒤로 당겼다.
서버를 향해.
쾅!
주먹이 서버 랙에 처박혔다.
빠지직! 퍼퍽! 펑!
회로 기판이 박살 났다.
불꽃이 튀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면들이 하나씩 꺼졌다.
[시스템 다운] [비상 전원 차단] [캡슐 잠금 해제]
치이이익...
500개 캡슐의 잠금장치가 일제히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자석 잠금.
전원이 끊기면 자동 해제.
푸슉! 푸슉! 푸슉!
캡슐 문들이 열렸다.
강제로 잠들어 있던 거인들.
약물 투여가 중단됐다.
하나둘씩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
허억... 흑...
기침.
켁! 커헉!
"진우야... 수트 전원이..."
선호의 목소리가 끊겼다.
삐이익-
HUD가 꺼졌다.
[배터리 0%] [유압 시스템 정지] [모든 기능 종료]
수트가 굳어버렸다.
무릎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나는 1.2톤의 쇳덩어리에 갇혔다.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물이 점점 더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허리.
가슴.
곧 목까지 차오를 것이다.
'여기까지인가.'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려 했다.
하지만 공기가 뜨거웠다.
수트 내부 온도는 여전히 55도.
폐가 타들어갔다.
내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 살.
웃는 얼굴.
"아빠!"
선호의 얼굴도.
"진우야, 괜찮아?"
미안해.
함께 살아남지 못해서.
그때였다.
콰앙!
굳어버린 내 수트 가슴 장갑 위로.
커다란 손 하나가 턱 얹혀졌다.
뜨거웠다.
40도가 넘는 체온.
우드드득!
누군가 엄청난 힘으로 내 수트 전면 해치를 강제로 뜯어내고 있었다.
금속이 비명을 질렀다.
끼기기직!
볼트가 뽑혔다.
퉁! 퉁! 챙!
해치가 떨어져 나갔다.
콰당!
나는 멍하니 눈을 떴다.
캡슐에서 방금 깨어난 거인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10명.
20명.
50명.
나보다 훨씬 거대한 근육질의 거인들.
신장 3미터 이상.
체중 300kg 이상.
그들의 몸에선 여전히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체온 43도.
가장 앞에 선 거인.
신장 약 3.2미터.
어깨 너비 1.5미터.
팔뚝 둘레 60cm.
허벅지 둘레 80cm.
온몸이 근육 덩어리.
하지만 눈빛은 맑았다.
약물이 빠져나가면서 의식이 돌아왔다.
그가 뜯어낸 해치 사이로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크기: 30cm.
내 얼굴만 했다.
"일어나라."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낮고 깊었다.
"형제여."
그의 눈동자에는.
정부가 약물로, 수술로, 고문으로 지우려 했지만.
끝내 지우지 못한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분노'
'생존'
'자유'
파란 불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