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를 읽고 그린 그림
올해 뉴스에서 들려온 노동계 소식들은 참혹했다. 젊은 제빵 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숨을 거두었으며 광주의 한 제조업체에서도 청년 노동자가 철제 코일에 깔려 숨졌다. 특히 제빵노동자의 사망 이후 해당 기업은 상황이 수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설비를 바로 다시 돌렸고 사람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기업 불매운동으로 이어졌다.
누군가의 자식, 학생, 친구였을 그의 죽음이 애달팠다. 한순간에 그의 꿈, 희망, 삶 모든 것이 아스라이 사라졌다. 언제 어디에서 다칠지 모르는 환경에서 일을 해야하는 사람들. 모든 노동자가 안전에 대한 걱정없이 일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를 읽었다. 쇳밥일지는 용접공이었던 그가 공고를 졸업한 후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겪은 일을 엮은 글이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진짜 너무하네" 정말 너무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작가의 개인적인 일들도 겹쳤지만 노동환경 자체가 너무나도 열악했다. 노동강도는 살벌했고 임금은 최저임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직원이 누리는 특권을 하청 직원들은 누릴 수 없었다. 거기에다 내가 다치면 누군가로 바로 대체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회사는 아쉬울 게 없었다. 사람을 바꿔끼우면 되는 일이었다. 마치 그가 조립하고 있는 부품처럼 말이다.
"진짜 너무하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한 명의 노동자로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정직원과 하청 직원 간 차별대우에 대한 문제에 관심이 갔다. 물론 노동환경들이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겠지만 책 속 현실에서는 정직원과 하청 직원 간 차별이 있었다. 정직원과 하청직원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대우가 달랐다. 임금은 물론이었다. 정직원들이 사용하는 휴게 공간은 하청직원은 사용할 수 없었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노동이 왜 다르게 인정받아야하나. 정직원과 하청직원은 동일한 노동환경에 진입하는 관문이 달랐을 뿐이다. 한 쪽은 정규적인 기회를 통해 입사하게 된 것이고 다른 한 쪽은 하청업체를 통해 그 환경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 진입 과정이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것일까. 전문 기술이 숙련되면 노동자들은 장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왜 기술의 숙련도가 기준이 되지 않고 입사 당시 관문 통과 여부가 계급처럼 되어버리는 걸까. 나에게 의문만이 남았다.
노동자들의 안전사고 이야기에도 눈이 갔다. 그들의 죽음은 누가 책임질 수 있는가. 누구의 잘못일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일 것이다. 많은 이윤을 창출해야하는 환경 속에서 기업은 노동자들에게 냉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죽어나가게만 할 수 는 없다. 정부는 법만 만들어놓고 관리에 소홀해서는 안된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졌지만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또 우리는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각자 삶에 지쳐 노동 현실을 외면하고 살고있진 않은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큰 사고가 일어나고서야 잠시 슬퍼하고 그 슬픔 마저 쉽게 소비되고 있진 않은가 말이다.
다시 쇳밥일지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천현우 작가는 노동환경과 자신의 삶에 대한 글을 쓰다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 현실이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다. 용접 일을 좋아하는 그 역시 결국에는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는 건가 싶어서 말이다. 작가 개인의 삶으로 보면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나라 노동환경의 현실을 보여주는 선택인것만 같아 아쉬웠다.
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들에 대해 그림을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