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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Aug 07. 2019

[뮤즈 모임] '금주'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글들

소재는 금주

*사진출처: <unsplash.com>




[뮤즈: 함지연 작가]


술을 마시면 그 녀석을 만나게 된다. 긴 팔다리에 검은 형체.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 엘리베이터였고 나는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어기적 어기적 근육이 뚝뚝 끊기는 소리를 내며 기어 오던 녀석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에 부딪히면서도 애를 썼다. 문은 계속 그 녀석 머리에 열렸다 닫혔다 했고 다음날 내가 발견됐을 땐 그저 술 취한 머저리가 곯아떨어진 모습이었다. 그 날 이후 그 녀석은 술을 마실 때면 가끔 찾아왔고 근 2년 사이에는 어김없이 찾아오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술을 끊어야만 했다. 수차례 실패하고 녀석과 만나게 되는 것을 반복하다 약물의 도움을 받는 중이다. 나는 불면증, 우울증, 중독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다. 술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지만 이 녀석들도 나름 헤롱한 기분을 맛보게 해준다. 그저 하루를 짧게 하기 위해, 얼른 자버리기 위해서는 과다한 불면증 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갈수록 하루는 길어지고 술이 간절하다.
 사실 나는 술이 싫다. 아니, 아주 많이 증오한다. 술은 우리 아버지를 폭군으로 만들었고 내 인생도 망쳤다. 아버지가 술을 마실 때면 나는 매를 맞아야만 했다. 주먹으로 때리는 게 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건 거의 매일이었고 마시지 않는 날에는 까칠하고 예민했다. 난 해장국을 끓이거나 토사물을 치워야 했다.
 술은 어린 시절부터 중년까지 나를 괴롭혀왔다. 처음에는 나를 멍들게 하고 두 번째는 내 영혼을 파괴시키고 세 번째로 그 녀석과 조우하게 만든다.
 처음 그 녀석을 만난 이후 두 번째로 만나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반복될수록 녀석은 자주 나타났고 누군가에게 말한다 한들 내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실패한 술주정뱅이 얘기를 누가 믿어줄까? 나라도 안 믿을 것이다.
 술은 안 먹은 지 곧 1년이다.
 죽을 만큼 생각나지만 이번에 그 녀석과 다시 만난다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매번 만날 때마다 녀석은 더 가까워진다. 처음 만났을 때는 엘리베이터 문도 통과하지 못했지만 어찌 된 게 녀석은 점점 더 빨라지고 강해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녀석은 전봇대 뒤에서 삐그덕 기어 나오더니 주저앉은 나에게 다가왔다. 녀석의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시커먼 형체였던 녀석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극도로 갈라진 피부나 대머리인 줄 알았던 머리에 긴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녀석은 정말 끔찍하다. 다시 만나면 정말 나를 죽일 것이다.
 나는 생각하지 말고 계속 움직여야 한다. 전과자인 나를 받아주는 곳은 찾기 힘들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일자리를 찾거나 그 일자리에서 개처럼 일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운다. 일이 끝나면 역시 아무 생각하지 말고 약을 입에 털고 기절한 듯 잠이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끝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일하던 슈퍼마켓에서 잘렸다. 전과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그럼에도 나를 용서할 수 없나 보다.
 술이 너무 그립고 차라리 녀석을 만나서라도 먹을 생각을 하고 있다. 어차피 안 먹어서 괴로우나 먹어서 괴로우나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다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차피 실패한 인생 차라리 여기서 끝내 버릴까. 나는 끊임없이 나를 합리화하고 술을 마실 이유를 찾는다.
 나는 집에 들어가면서 소주 다섯 병을 샀다. 오랜만에 먹는 술이라 첫 잔을 들이킬 때는 손이 떨리고 두근거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어지럽지도 않고 속이 아프지도 않고 쭉쭉 들어갔다.
 알콜 중독자는 보이는 술은 다 없애고 술이 다 없어지면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술을 찾는다고 한다. 나는 귀신같이 다섯 병을 다 비우고 새로운 술을 사 왔다. 술과 함께 약도 털어 넣으니 더욱 헤롱거렸다. 몸이 뜨거워지고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달빛이 창틀에 기울어 갈 때쯤, 녀석이 나왔다.
 “오늘도 어기적어기적거리네. 느려 터졌구만.” 난 이제 겁을 상실했나 보다.
 녀석은 주방을 지나 내 방까지 빠르게 타다닥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내가 한 말에 반박이라도 하는듯싶다.
 녀석이 내 얼굴에 대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덥디 더운 한 여름밤이 추워지고 소름이 돋았다. 녀석의 메마르고 긴 손톱이 내 발목을 지나 허벅지까지 올라왔고,
 난 처음으로 녀석의 눈을 보았는데 녀석의 충혈된 눈을 보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내 눈이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바로 나였다.




[뮤즈: 류재은 작가]


'어느 때보다 즐겁고 자신감 넘치는 한 주를 보내게 될 거예요.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아도 일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요.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멋진 시간을 보내게 될 거예요.'

이번 주 운세는 맑음이었다.
멋진 한주를 보낼 것 같아 자신감으로 시작한 한 주는 평소와 180도 달랐다.

월요일.
고객사에 송부한 자료의 오기를 고객이 발견했고,

화요일.
고객사에서 신뢰 하락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아직 수정되지 않은 시스템에 마음이 급해졌다.

시스템 수정으로 자료를 보낸 후
3개의 유관부서에 사죄했고,
간 떨리는 팀장 보고를 실시했다.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았으나,
나는 온전히 내 몫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다양한 핑계로 나를 포장하였으나,
나의 잘못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더, 하나 더 하지 않아 발생한 수많은 실수들.
수많은 실수들은
지금까지 내가 노력한 많은 것들을 갉아먹었다.

흔히들 사소한 것들이 전문성의 시작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번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전문성의 끝이 사소함인 것 같다.

사소함은 마치 결승점처럼
뛰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곳이고,
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것이기에.

오늘도 전문성의 결승선을 고민하는
한 주의 중간에서
금주의 끝은 만족스러운 완주이길 바래본다.




[뮤즈: 김다빈 작가]


“금주의 예상 업적 말해주세요. 금주의 활동 영역도 필히 적으셔야 됩니다.”
사무실에서 팀장이 외치는 말에 모두들 불안과 초조가 가득한 가운데 하나하나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고향에 가 봐야겠다. 그래도 사정을 설명하면 한 두 개는 팔릴지 몰라.”
‘나’는 내 자리에 쌓여있는 박스 무더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자! 모두들 활동 나가기 전에 좋은 영상 하나 보겠습니다.”
유튜브로 몇 번은 본 듯한 영상을 틀어주는 이야기는 ‘절박, 그리고 노력.’
[왜 다들 열심히 안 하시는 겁니까? 못하는 게 아니에요! 노력을 안 하는 겁니다!]
[어제와 똑같은 식사,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삶을 사는데 세상이 바뀔 것 같아요? 아니요! 썩어 들어갑니다!]
노력에 대한 자극을 받기 위한 쓴소리를 15분 동안 들은 뒤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잘하자, 잘해야 된다.’를 되뇌고 있었다.
그렇게 의기 충만한 상태로 모두가 나가고 오늘은 내가 판매왕이 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빌딩을 나선다.
이때는 상쾌한 아침 해를 만끽하며 누구나 다 그럴듯한 플랜을 짜게 된다.
1시간 동안 땡볕을 돌아다니기 전까지...

나의 직업은 방문 판매원이다.
원래부터 이게 장래희망이냐면 당연히 아니었다.
한때는 어릴 때부터 하나의 꿈이 있었고, 그럴듯한 미래 계획도 있었으며, 내가 성공하기를 언제나 꿈꾸며 노력해왔다.
하지만 꿈과 계획만으로 이뤄지기에 세상은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공부가 부족해서 펜대는 못 굴리고, 컴퓨터 작업도 나에겐 별천지와 같았다.
처음에 시작했던 건 흔히 노가다라 불리는 건설 현장 보조, 지방으로 내려가 기숙사에 거주하며 공장 생산직, 청소업체와 물류센터 등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같은 지하철 역, 같은 도로를 거닐며, 모두가 같이 저마다의 회사 빌딩을 오가는 데 누구는 펜대와 컴퓨터의 화이트 칼라, 그리고 우리는 회사에서 전달해주는 작업복과 같이 카트를 끄는 블루 칼라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버는 돈에는 확실히 귀천이 있는 것 같았다.
내 수익이 지금의 두 배만 넘었어도, 아마 주변에서 관심을 가져 주며 이 일에 대해 흥미를 가져줄까?
금주는 회의감만 가득한 하루였다.
기세 좋게 들어왔지만,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만 듣고서 화장품 재고는 추가로 쌓여 있게 되었으니까.

“생각 같아선 내 돈 가지고 전부 사서 평생 화장품 품평 유튜버 하고 싶다.”
“에이- 형, 그것도 스킬이 있어야 하죠.”
산더미 같이 쌓인 재고를 보고 넌지시 옆 동료에게 물었다.
“얼마 팔았는데?”
“스킨 두 개 하고, 에센스 세 개 해서 다섯 개요. 근데 세트를 팔아야지 돈이 되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어떻게 이번 달 마수걸이는 다들 하는 모양이다.
나는 10일이 되기까지 하직 하나도 팔지 못했는데.
‘어머, 얘는~ 요새 누가 돌아다니는 화장품 사니? 백화점이나 온라인 구매하지.’
‘내가 정말 걱정돼서 그래. 너 그거 오래 못한 다니까?’
‘야~ 그거 진짜 태평양이나 참존 시절 화장품 팔 때 얘기 아니냐? 우리 엄마들이나 하던...’
사과하며 못 사주는 건 양반이고, 남의 직업 품평회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만두라 하는 인물들도 가득한 사람, 하지만 모두 데면데면 하지만 넘어갔다.
미래에 고객이 될 수도 있고, 혹여라도 주변인들이 하나 사 준다면 고마워할 일이니까... 영업이란 게 이런 걸까?
블루칼라의 회사 제복을 매만지며 또다시 다음 주에 대한 일정을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팀장이 말할 것이다. ‘금주의 일정을 말해주시고, 예상 업적을 말해 주세요.’

“여러분들! 여기 돈 벌러 온 겁니다! 시간 낭비하라고 온 거 아니란 말이에요!”
실적이 부진한 사람들은 맨 투 맨으로 상담을 가지고 팀장과의 금주의 일정을 다시 계획하게 된다.
좀 더 호소하고, 좀 더 많은 공부를 해서 고객의 마음을 휘어잡으라고 한다.
휴대폰을 열어 개인정보에 전화번호와 통화 목록을 보여준다.
오늘 누구와 얼마나 통화를 했고, 전화번호부를 보고 예상 기고객이 얼마나 될까?
금주는 많이 피곤할 것 같다.
맨땅에 헤딩 식으로 휴대폰에 ‘저장만 된’ 인물들에 대한 무차별 전화가 오고 가게 될 테니까.
이렇게 극한까지 몰리다 보면 언젠가 금주의 일정이고 뭐고 품 안에 흰색 사표 봉투가 나올지도 몰라.

“살게요.”
“네, 정말요?”
“왜요? 이거 설마 불량품이었어요?”
“가, 감사합니다. 얼마나 필요하신 가요?”
“음... 일단 스킨이 새로 필요하긴 했고, 로션도 하나 있으면 좋으니까 두 개요. 아! 그리고 아기용 로션도 있어요? 우리 애가 올해 초등학교 올라가는데 피부가 건선이라 뭘 발라줘야 된다니까.”
오늘은 이상하게도 운이 좋았다.
금주의 목표와 거창한 활동계획, 그리고 이 업계에서 성공하셔서 보란 듯이 성공한 본사의 아주머니 강연까지 듣고 왔는데 계약이 트인 것이었다.
“네, 일단 스킨은 이 모델과 이 모델이 있고요. 로션은 건선용과 지성 피부용이 따로 있습니다. 이 모델에 대한 가격은 이렇고, 이 모델은....”
“이거 좀 비싸지 않나?”
“하, 하지만 필요하실 겁니다. 생활용품이니까요!”
판매가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내 인생에 모든 장사 스킬을 동원해서 겨우 계약을 이끌어냈다.
15일간의 무실적에서 이뤄진 한 줄기의 빛.... 그날 나는 화장품 세트 한 개와 어린이용 로션세트까지 판매에 성공했다.
[--님이 어제 높은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다들 박수 쳐 주세요.]
그렇게 실적 압박으로 무섭게 몰아붙이던 팀장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모처럼 주말을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수걸이 판매를 못한 자들의 교육도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좋게 좋게 흘러갈 때, 그날 밤 내일 출근을 앞두고 잠자리에 들려 할 때 전화가 한 통 왔다.
“네, 고개...ㄱ.. 아니, 어머님!”
[어머, 이거 정말 미안해서 어떡해요?]
“.... 네?”
[이 화장품, 잘 안 맞는 거 같아요. 나는 그럭저럭인데, 우리 애는 이런 로션이 안 맞는대요. 아무래도 다른 브랜드 제품을 써야 했어요.]
.... 사실 난 이때 심장이 약간 찌릿했다.
“아, 그렇군요. 그렇죠... 모든 화장품은 고객의 피부에 맞춰 써야 하니까요.”
[늦은 밤에 미안해서 어째... 그래서 말인데 일부는 환불이 될까요?]
문제 될 건 없다. 일주일 내 트러블 발생 시 환불은 당연한 조항이니까, 딱 일주일이 지나려는 밤이었지만 더 이상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피곤했다.
“네, 처리해 드릴게요.”
[미안해요. 내가 다음번에 친구들한테 말해서 화장품 필요한 애들에게 물어볼게. 네~네~ 다음에 제가 꼭 연락드릴게요.]
다음에... 나중에... 지금 당장은... 숱하게 많이 들어본 말이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
모든 걸 다 잊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회사의 전체 카톡방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팀장이었다.
[자! 이제 새 한 달이 시작됩니다. 출근하시는 대로 금주의 목표 설정과 판매 방침에 대해서 말해주시고 저판매 카운슬러들에 대한 미팅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나는 잠드려다 기절했다.




[뮤즈: 선선 작가]


술잔을 놓아도
내 마음은 놓을 수 없다

참고 또 참아도
내 마음은 참을 수 없다

몸은 해롭지 않겠지만
내 마음은 해롭다 몹시.




[뮤즈: 파랑종달새 작가]


달콤한 생각이 나는 날 발걸음도 들뜬다.
멈춰있는 이 순간이 마냥 행복하다.
세상이 요란하게 돌아가는 듯하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나.

달콤한 후회




[뮤즈: 허상범 작가]


<금주>

떠나간 이가 채운 마음을 비우는 것은
술잔을 비우는 것과 같은 일이다.
잔을 비울수록 슬픔은 목을 태우고
마음을 비울수록 추억은 선명해진다.
남은 이의 고통은 떠난 이의 추억이고
음주는 저마다의 사랑이 넘실거리는 것.
금주는 다신 사랑 않겠다는 약속,
그렇게 술잔이 비쩍 마르길 기다리는 일이다.




[뮤즈: 유피린 작가]


<금주라는 금기.>
 
술이라는 것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 그런 마력에 취한 사람은 흔하게 보일 뿐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처럼.
“그러니까 말이지. 술이라는 것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의식에 필수품이자 수질이 안 좋은 지역에서는 물을 정화시키는 수단이었잖아? 그런데 요즘은 왜 그렇게 술 끊어라, 술 먹으면 죽일 놈. 그런지 모르겠단 말이야?”
언제나 술에 대한 예찬론을 펼치는 녀석은 술이 들어가기 무섭게 다시 예찬론을 펼치며 설교를 시작했다. 내가 언제 술 먹지 말라고 잔소리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거기에 전쟁이라는 사례만 봐도 나오지. 술은 괴로움을 잊게 해주고 공포를 마비시키는 도구이지. 적당히 마시면 좋은데 왜 그렇게 술 끊어라 외치는 걸까?”
그거야 너처럼 술 마시면 조절 못하고 소리 지르듯이 외치며 자신마저 마셔버리는 사람 때문이라고 해주고 싶지만, 말하면 열 받아서 더 마셔버릴 것 같아서 참았다,
“지금 너도 그렇잖아. 항상 나하고 술자리에서 그게 뭐냐? 맥주 한 잔? 그게 무슨 술을 마시는 거야?”
방금 적당히 마시면 좋다고 안 했던가? 이 새끼 분명 취했다. 남에게 술 권유하는 시점이 만취하는 시점이다.
“나 잠깐 담배 피고 온다.”
“또? 너는 담배나 좀 끊어라.”
내가 담배 피는 것에 또 소리를 치는 것에 혀를 찼다. 나는 담배를 피지만 저 녀석은 술을 마실 뿐이다.
나는 왜 항상 저 녀석의 술자리에 끌려와서 이렇게 자리를 같이 해주는지 이제는 슬슬 의문이다.
솔직히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야.
“어 왔냐? 뭐 이리 금방 펴?”
절대로 금방이 아니다. 고작 한 까치 피는 동안 이 새끼 소주를 한 병이나 더 깠다. 그런데 내가 마신 것은 고작해야 맥주 한 잔.
이러고서 돈은 절반으로 나눠서 내는 더치페이. 이게 무슨 논리인지.
“아무튼 요즘 사회는 잘 못 되어있어. 다들 술 한 잔 돌리며 친해지고 말 트고 하는 건데, 뭔 놈의 술병만 보면 술 권유하지 말아라, 회식이야 말로 사라져야 하는 악습이다. 이래서야 사회생활하겠어?”
이거 참 흔하게 듣던 논리다. 이 녀석이 나처럼 사회 초년생이 아니라 중소기업 과장이었다면 ‘나 때는 말이야!’ 소리도 서슴없이 했을 거다.
“내 말이 어디 틀린 말은 아니지? 좀 듣지 말고 말해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화제의 전환이지만, 이미 혼자서 신나버린 이 녀석을 상대로 화제의 전환은 불가능하기에 겨우 한 모금 남짓 마신 맥주로 입을 축였다.
하지만 맥주조차도 쓰게 느끼는 내 혀가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또 그러냐? 아직 술맛도 모를 정도로 어린 것도 아니고.”
“야. 너는 그러면 담배 맛 아냐?”
“몸에 안 좋은 것을 내가 왜 펴?”
“그러는 몸에 안 좋은 것 왜 처마시냐?”
“담배 피면 폐암이……”
“술 마시면 간암 안 걸리냐? 계속 듣다 듣다 하니 거슬리는데, 그래서 술 마시면 천대받는다고? 야 따지고 봐라 건물 안에서 술 먹으면 뭐라 안 하지? 그런데 왜 담배는 죽일 놈 되냐?”
“그건 간접흡연이-”
“술 처먹고 소리 지르며 옆 테이블에 시비 거는 새끼는 그런 뭔데?”
“그건 개인 차이이고.”
“그러면 왜 담배 피는 놈들끼리 모이는 시설은 없애냐? 뭐가 술 먹는 놈 차별이야. 적당히 마시라고 하지 담배처럼 끊으라는 소리는 안 하잖아?”
“그거야 못 끊으니까 문제이지.”
“술은 쉽게 끊어지는 줄 아냐? 한 번 내기해볼래?”
뭔가 한 번 말하고 나니 속 시원하게 나온다. 이 알콜 중독자를 상대로 이렇게 시원하게 말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흥이 올라서 제안했다.
일주일 동안 이 녀석이 술을 끊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자존심이 쌘 녀석이라서 거짓말은 안 할 거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은 완전 천국이었다. 술 먹자고 부르는 놈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대망의 일주일 후. 나하고 그 녀석이 만난 것은 어느 흡연실이 딸려있는 카페에서였다.
녀석을 처음 본 순간 그 녀석이 했던 말은 한마디.
“야 술은 끊었는데, 담배 이거 필만하다. 한 대 피러 가자.”
……아무래도 이 녀석은 구제가 안 된다.




[뮤즈: 심언석 작가]


<유혹>

이런 젠장.... 머리 아파 죽겠네...
전날의 과음 때문이었을까, 예전에는 이 정도 마시면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머리도 띵하고 구역질도 난다. 제기랄, 술을 끊어야지...
냉수를 한잔 들이켰다.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에휴... 이제는 건강도 생각해서 술을 끊어야겠다.

그의 오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만 육체적으로 좀 힘든 것만 빼고.
간단한 오전 일과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거래처 최 사장과 함께 밥을 먹는데, 그는 이열치열이라며 굳이 따뜻한 국밥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이씨... 따뜻한 국밥에는 소주가 제격인데... 최 사장은 자연스레 소주 한 병을 시키며 어서 잔을 받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순간 흔들렸으나, 몸이 좋지 않아서 먹지 않겠다는 핑계를 대며 여차저차 넘어갔다. 순간 투시력이라도 생긴 걸까... 최 사장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맑은 소주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보였다. 이거 참 그놈의 술이 뭐라고...

오후 4시쯤 되었을까, 외부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음료수 하나 마시러 마트에 들어갔다. 사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맥주 한잔 해줘야 맞는 거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었고. 하지만 그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그 다짐을 벌써 깨기 싫었다. 마트 안에서는 늘씬한 아가씨들이 시원한 맥주 한 잔 하라며 판촉 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거 참...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유혹이었다.

오늘도 하루 일이 모두 끝났다. 그는 집에 와서 평소처럼 저녁밥을 차렸다. 평범한 육개장에 김치, 두부, 그리고 고추장 불고기. 전날 먹다 남은 튀김, 김치전과 함께. 숟가락을 들었는데 마침 밖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런 밥상머리 앞에 비가 내리다니... 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약 5초 간의 짧은 갈등을 마치고, 그는 기어코 집 근처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막걸리를 한 병씩 사 왔다. 소주는 일단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소주는 차가워야 제맛이지. 그러고는 막걸리를 집어 들었다. 병을 살짝 흔들고 뚜껑을 따고 잔에 따르고. 모든 동작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졌고, 어느새 차가운 한잔의 막걸리가 그의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내려왔다. 그제야 그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금주 12시간. 오늘은 그래도 나름 선방했다. 점심에 술을 안 먹었으니까.




[뮤즈: 심규락 작가]


<빨간 머리 예나의 금주> 

“한국 이름은 예나, 영어 이름은 앤 이에요! 이왕 앤 이라고 부르실 거라면, 맨 뒤에 E를 붙인 앤(Anne)이라고 불러주세요. 호호.”

또 시작이다. 말괄량이 같은 성격인 게 영어 이름은 삐삐가 어울릴 것 같은데, 수 년째 자기는 앤 이라고 우겨댄다.

“어머! 간호사님 오늘 여기 처음 오신 거죠? 엄청 예쁘시다! 남자친구 있으시죠?”

역시 삐삐가 어울린다, 아니 무조건 맞다.

“에이, 있으면서! 우리 언니가 이렇게 예쁜데, 없을 리 없죠. 호호호.”

사실, 이름만큼 크게 특별할 건 없는 것 같은 서울특별시의 강남구 어딘가, 이 병원에선 매일 아침 이렇게 수다 꽃이 재잘재잘 소리를 내며 핀다. 그것도 3년이 넘도록 3인실 끄트머리에서 소녀 혼자서 개화를 시켜댄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아무리 내 여동생이라도 말이다.

“오빠, 오늘은 다리 굽히는 각도가 조금은 더 좋아졌대! 얼른 나아서 거기 가자! 잊지 않았지? 야, 심은찬! 잊지 않았냐고 물었다!”

“또, 또 시작이다.”

정확히는 여동생 이란 단어 앞에 ‘입양된’이란 쓸데없는 철자가 붙을 때도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친동생, 친누나 같은 말들은 가족이란 개념 앞에선 사실 무의미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자칭 앤, 타칭 삐삐인 심예나는 운동장서 한창 짝피구를 할 10대 여학생이자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다. 급작스럽게 조우한 다리 수술은 동생에게 병실 침대와 휠체어라는 배경 상 오직 두 가지 선택지만 쥐여줬고, 약봉지 마냥 까보면 사실 그건 선택지가 아니라 강제성이 깃든 시험지일 뿐이었다.

“오빠야, 나 나중에 여기 졸업(삐삐는 아니, 앤은 퇴원을 졸업이라 부르곤 한다. 빨간 머리 앤은 나중에 교사가 되기에, 자신도 그 뒤를 따라가고 싶다나 뭐라나) 할 때 성인이 되면, 맥주라는 거 한번 마셔보고 싶다. 내 마지막 잎새는 닭껍질 튀김 한 겹이었으면! 호호호”

“뭐가 마지막 잎새야. 퇴원할 거야. 아, 그리고 PEI? 거기 꼭 걸어서 갈 거야. 가서 그 초록 지붕의 집도 꼭 볼 거고. 아직 성인 되지도 않았는데 술 생각하지도 말고! 그 생각 마저도 금주령을 내린다, 아주 엄격하게.”

“어허, 심 선생. 명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거 생각마저 통제하는 건 언론통제 보다 심한 거 아니오? 이 심괄괄 미치는 거 한번 보고 싶어?”

“미스 앤, 실례할게요. 약 가져왔는데 오늘은 위 보호 성분이 약간만 더 추가되었어요, 괜찮죠?”

세 번의 크리스마스를 이곳에서 함께 보내온 간호사님의 상냥한 손바닥 위에는 역시나 형형색색의 자갈밭이 펼쳐져 있었다. 동생도 알 것이다. 간호사님의 손은 친절하나, 그걸 애써 삼켜내려는 불친절한 여정에는 크나큰 인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이전에 시술되었던, 각 무릎에 8번씩 찔림과 빼냄을 반복하는 스테로이드 주사의 대바늘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굳어가는 근육에 기름칠을 해주는 그 주사는 보는 사람에게도 치과 내 사랑니 치료 그 이상의 서늘한 간담을 선사하곤 했기에.

“미스 앤, 잠시만 문밖에서 대기해줄 수 있어요? 오빠가 보호자니까 잠깐 얘기 좀 나눌게요. 최 간호사님, 잠시 휠체어 좀 도와주실래요?”

“선생님, 예나 관련해서 말씀 주실 게 있으신 가요?”

맞다, 내가 유일한 보호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릴 적 보육원에서 데려온 동생의 나이가 두 자릿수가 되던 해, 동생과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타의적 생이별을 당했고, 지금은 이 세상이 우리의 나름 보육원이 되어왔다. 다행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병원비를 조금씩은 알음알음 마련해왔다는 나름의 위로 거리 정도.
 
“예나 님이 아직도 그…… 다리 통증 관련해서 말하는 지요? 그때 말씀드렸던 Phantom Limb 증상이 아직 있나요?”

“예, 아직도 통증이 심해서 다리가 있다고 착각한 채 말하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어떤 때는 다리 재활을 하고 온 것 같이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Phantom Limb, 말 그대로 절단된 신체 부위에서 느끼는 통증 증세. 덧붙이자면 현재 예나의 진단서 한 켠에 추가된 참담한 진실이기도 하다. 다리 절단, 아니 다리와 이별하는 것. 본인의 괴로움이 제일 클 것이나, 보는 이들에게도 숨기지 못할 절망과 애써 숨겨야 하는 한숨으로 다가온다. 당사자와 그 주변인에게 이토록 가혹한 일이 또 있을까. 사탄과의 체스 게임 서, 시작부터 체크메이트를 당한 판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체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한 낙심 섞인 고민으로 몇 년을 보낸 우리이다.

모르핀 등의 화학 액체 따위는 그 얇은 바늘의 길이만큼이나 짧은 정지를 줄 뿐, 어떠한 장기적 평온을 선사해주지 못했다. 길어지는 것은 오직 흰 영수증 속 0의 가로 평수 그리고 보호자로서의 막막함,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11월의 23번째 해가 떴다.

“오빠야, 드디어 일주일 남았다! 11월 30일! 이제 곧 루시 모드 몽고메리 작가님의 생일이라고!”

“또, 또 빨간 머리 앤! 앤이 그렇게 좋니?”

“이제 이거 아픈 것만 사라지면, 얼른 캐나다로 비행기 타고 가서, PEI로 냉큼 걸어가자!”

“……”

“아 왜! 올해엔 꼭 같이 가기로 했잖아! 확 맥주 구해서 마셔 버린다? 닭 껍질 튀김!”

“갑자기 맥주가 왜 나와……”

“오빠가 내렸던 그 금주령이 캐나다서 가장 늦게 폐지된 곳이 어딘 줄 알아? 바로 <빨간 머리 앤>의 배경, 그 PEI라고! 어머머, 어쩜 이런 우연이! 역시 나의 사랑, Prince Edward Island!”

“도대체 앤이 왜 이렇게 좋은 거야?”

“앤은 성격이 참 밝아. 보육원에서 온 것도, 양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힘든 일인데 항상 씩씩하잖아? 그래야 이겨낼 수 있지!”

“금주……”

“뭐?”

“가자, 금주에 그 왕자 섬인가 뭔가에 가자고. 30일에.”

“정말이야? 이거 이거 심은찬 씨, 요새 이 동생에게 어여쁜 짓 좀 해서 점수 좀 따내려 하는군? 미스 앤이 친히 칭찬해드리지! 아쉽게도 곧 밤이 되어서 단잠을 청해야 하지만 말이야!”

동생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이미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달 마저 비스듬히 떠서 겨우내 새우잠을 자고 있을 시각, 혼자서 이불을 덮은 채 뒤로 돌아누워 남몰래 흐느끼고 있는 그 뒷모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낮에는 Anne이지만, 밤에는 환자란 상태에 정말이지도 충실히 걸맞은 모습의 동생이 그저 슬프게 다가올 뿐이다. 어금니가 숨죽여 갈리는 소리와 간혹 이불의 끝을 힘껏 잡는 그 손끝이 내뱉는 신음마저, 병명처럼 철저히 참담했고 참담하다.

“한 시간에 1,500원이나 해? 빅 삼각김밥 하나 수준이네, 이거 아까워서 원……”

달빛의 미숙한 위로를 받으며, 새벽 한가운데 발걸음이 향한 곳은 PC방이었다. 이 삼각형의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가야 한다, 내 동생이 빨간 머리 앤에게.

“1908년 출간, Anne of Green Gables …… 앤이 고아원을 떠나 그린 게이블즈로 온 이야기라…… 초록색 지붕의 집, 빛나는 호수, 그리고 철도역 등등……”

지금도 몸서리치고 있을 것이다. 아니다. 몸서리를 치고 있다. 내 동생, 검은 머리의 앤은 내가 없는 병실에서 현재 필히 그러고 있다. 다음날 아침엔 깨문 자국이 인내의 낙인이 되어 입술 끝 쪽에 남아있겠지. 그 입술을 떼면서 앤 마냥 또 싱글벙글하는 척을 하는 모습을 나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마주하게 될 것이고, 밤의 앤처럼 낮의 나 자신 역시 속으로 참아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주의 그 하루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 단 하루만큼은 말이다.

“사장님, 여기 칼라 인쇄 20장 하면 얼마예요? 아, 그리고 여기 근처에 편의점 있어요? 벽에 붙이게 스카치테이프도 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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