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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Sep 26. 2019

[뮤즈 모임] '소나무'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소재는 소나무

<출처: unsplash>




[뮤즈: 유피린 작가]


*[뮤즈 모임]'소나무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에 게시된 작품의 연작입니다.


<쫑파티>

소나무에 관련된 주제로 짧은 단막극을 만들어낸 정훈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회심의 개그였는데-”
중간중간에 넣은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한 개그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영상을 공개되고서 가장 쉽게 나오는 반응은 ‘전기톱으로 한 방에 저렇게 굵은 소나무를 자르다니, 아무리 막 나간다고 하지만 이상한데 CG 썼다.’였다.
“아니 그거 CG 아닌데 말이지.”
상식적으로 전기톱으로 한 번에 그렇게 굵은 나무를 깔끔하게 자를 수는 없다. 하지만 휘두른 인간이 절대로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건 전부 리허설대로 하지 않은 시안 탓이다. 내 잘 못으로 돌리지 마.”
나무를 깔끔하게 잘라내서 과도한 CG라는 비판의 원인을 만든 태우가 오히려 황제 역할을 맡은 시안을 바라보며 투덜거리자 정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할 거면 화려하게 한 판 뜰 것이지. 쪼잔하게 해서 오히려 어중간하잖아.”
리허설에서 합을 맞추기 위하여 베어낸 소나무들을 가리키며 정훈이 투덜거리자, 시안과 태우는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리허설대로 하지 않은 둘의 잘 못이 크다. 하지만 그 잘 못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정훈에게 있다.
나무를 자르는 씬에 들어가기 직전에 갑자기 ‘시안의 방어와 태우의 공격. 둘 중에 어느 쪽이 뛰어나냐?’라는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안 그래도 서로를 의식하는 두 사람이라서 약간 진심을 내버렸고, 그 장면이 NG라는 사실을 떠올린 시안이 서둘러 방어를 거두며 나무가 한 방에 잘려나갔다는 것이 그 장면의 전말이다.
그런 재주가 가능한 것은 벌써 제작한지 제법 된 이 시리즈의 제작 멤버가 다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초월자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제작에 CG가 들어간 적이 없다. 사향노루가 나타나고 멸종한 호랑이가 나타난 것도 CG가 아니다.
그저 타임머신을 타고 진짜를 데려와서 마법으로 조종한 것뿐이다. 출연한 사람이 황제 역할의 시안과 나무를 베는 집 주인인 태우, 그리고 같이 바둑 두는 신선 역할에 기용된 호유 세 사람뿐이지만, 사실 다른 멤버들은 스텝으로서 열심히 움직였다.
고작해야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단막극이라고 우습게 보기 힘들 정도로 바빴다.
한 명이 모든 마법을 전부 통제하면 너무 현실감 넘치고 딱 봐도 마법이라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적당히 CG 느낌을 주기 위해서 어색하게 꾸미느라 오히려 힘이 더 들어갔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 3명이 등장인물인 거냐?”
“어? 뭔 소리야?”
“다른 사람도 많은데, 하필 우리 3명은 등장인물로 발탁한 이유가 뭐냐고.”
“아, 그거? 처음에 각본 만들면서 황제 역할로 시안을 떠올렸거든? 그러니까 나머지는 자동으로 태우랑 호유까지 떠올라서.”
작위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노린 구성에 3명이 진지하게 묻자, 정훈은 진짜로 솔직하게 대답을 주었다.
딱히 별 의미 없이 당연한 연상 작용이라는 감상에 3명의 표정이 굳어진다.
“즉 우리를 세트 메뉴로 취급했다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생각해봐. 사윤 형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나머지 두 사람은 상우랑 리드맨이잖아? 그런 거라고.”
“지금 우리를 종족으로 구분한 거냐?”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정훈이 서둘러서 수습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버렸다.
“앞으로 너랑 연성, 유진을 세트로 취급해도 되는 거냐?”
“아니 잠깐, 그 두 사람을 왜 나하고 세트로 취급하는 건데?”
“네가 지금 한 말이 그 소리다.”
3명의 돌아가는 비판에 정훈은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의 멤버들은 일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다들 어느 정도 공통점을 공유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 된 시간여행자들은 그걸 ‘차원의 연속성에 의한 유사성.’이라고 설명했는데, 좀 더 자세하게 풀어놓으면 세계가 매 순간 확률에 의하여 분기하며 평행세계가 생기다 보면 결국 비슷한 조건의 세계들이 구성되게 되고, 그에 따른 세계의 문제점과 해결법도 결국 비슷하게 귀결된다는 논리다.
진지하게 고찰했다가 결국 이해를 포기한 정훈은 그냥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 내가 잘 못 했다. 사과할게.”
투덜거리며 정훈은 널려있는 소나무 중에 하나를 가볍게 발로 찼다. 이 소나무 때문에 신고가 들어가서 조사까지 받았다.
딱 봐도 수 백 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를 싹둑 잘라버리는 장면 때문에 신고가 들어간 것이다. 천연기념물에 준하는 나무를 베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심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소나무는 전부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확인되며 그냥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런 소나무를 땔감으로 써도 되는 거냐?”
“내가 알아봤는데 소나무는 어느 차원이고 간에 땔감으로 쓰면 향이 끝내주더라고. 즉 땔감이 최고야.”
리허설까지 포함하면 배를 만들어도 될 수준의 소나무를 보며 시안이 묻자, 정훈은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손을 흔들었다.
“분명 땔감으로는 안 쓸 나무라고 직접 각본 쓰지 않았던가?”
“아 몰라. 소나무는 땔감이 최고야.”
단막극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나름 감정이입이라는 것을 했던 시안과 태우가 중얼거리자, 정훈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 감독의 역할은 정훈의 입장에서 손해였다. 멤버들끼리 정한 룰에 의하여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주제도 난감해서 각본 쓰는데 고생했다.
결국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중구난방의 작품이 탄생했다는 것이 정훈의 생각이었다.
“왜 내가 감독을 하면 꼭 이런 것 걸리는지.”
다음에는 좀 다루기 쉬운 주제에 자신의 감독 차례가 돌아왔으면 하며 정훈은 소나무가 타는 향기를 맡았다.
영상의 반응을 보며 치러지는 쫑파티. 그 중심에 있는 소나무를 땔감으로 구워지는 고기에서 은은한 솔 향이 올라왔다.




[뮤즈: 심규락 작가]


<정신분열증 (精神盆裂症)>

현이 켜짐
하나의 줄거리가 울림
나는 환대가 아닌 텃새를 받고 있음에
작은 음지 한켠 만을 발밑에 단기월세 준 채
그저 묵가를 되뇌어야만 했다

이중주가 밝-켜짐
저 위에서 내리는 뜨겁고 허연게
저 소나무를 더욱이 가열차게 푸르히 무섭게 함
숫자와 모양의 사각형 피륙을 집은 것도 아닌데
목 위 안면은 없다

조율은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저 푸른 장승이 우직함과 숭고함의 골판때기라고?

안다, 알고 있다
일 것이란 것도 안다

그걸 앎에도 나의 앎이
앞으로 그대 버텨 설 수 있을 것인가

중-
두-

서 있다며
근데 나도 서있는데 말이야
조용히 직각 이어도 그 언빛을
이리로 몰고 오는 건 무슨 속셈인가

풀이 죽어야 해
그래서 죽어야 해
네 풀이
아님 나의 풀이
무언가는 죽어야 해

럼디기 덤 럼디기 덤 럼럼럼
네 낯빛 저민 둥그런 악기가
더 이상 줄 따위가 아닌
타격의 뺨이 될 때 덤덤덤

솔이 아닌 소잖아
가만히 의 우두머리
그러니 우두커니 있어야지

산마루 위 저 빛돌들을 굳이 끌고 와
이 두 다리 볏짚에게 던지는 이유가 뭐니

소 아닌 솔이잖아, 실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 인정해
네가 아님 내가 해

난 달린게 허연 소금이고
그래서 토양 위 미뢰에 대면
너무 짜거나 놀라서 뒷걸음, 화들짝




[뮤즈: ㅎㅈㅇ 작가]


*[뮤즈 모임]'소나무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에 게시된 작품의 연작입니다.


<소나무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

3
 나는 그 이후로 열병에 시달렸다. 저번엔 얼굴만 뜨거워졌다면 이제는 뇌까지 구워지는 것 같았다. 땀에 푹 젖은 이불과 아무리 갈아도 뜨거워지는 이마 위 수건은 내가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다, 하는 공포마저 들게 했다.
 “다행히 감염은 아니네요. 주사를 놨으니 곧 회복될 것입니다.” 왕진을 온 의사는 이렇게 말했고 나는 약을 하나 꿀떡 넘겨야 했다.
 그리고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안 되는 어느 경계를 표류하게 되었다.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남자가 소녀를 수도 없이 찔러댔다. 소녀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일으키고 싶었지만 내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내 몸이 느껴지기는 커녕 형체도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방관자로 온 것이었다. 뒤이어 남자는 소녀의 목에서부터 발목까지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녀가 피를 흘리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녀는 피를 주지 않았다.
난 이 모든 상황이 끝나길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소녀가 고통받지 않는 것은 물론, 고통받는다 해도 더 이상 내 눈에 보이지 않길 바랐다. 형체도 없는 몸에 눈이 달려있다면 이상하겠지만 실제로 난 내가 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 엄마, 이건 꿈일 거예요’
 그러다 소녀가 나를 보았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리면 좋으련만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깊은 슬픔이 보였다. 우리는 한동안 시선을 나눴다. 슬프지만 강렬하고 따뜻한 시선이었다.
 소녀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남자를 보았다. 나도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젊었지만 내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사방은 온통 깜깜하고 두려운데 방금의 광경을 목격하지 않을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었다. 눈에 보이는 빛은 너무 멀어 아득하고 나의 몸은 아래로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다.

4
 그 이후 나는 씻은 듯이 몸이 나았다. 어쩌면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온몸은 힘이 넘쳤으며 상쾌하고 가뿐했다. 나는 이것을 핑계 삼아 해일이 형을 도와주기로 나섰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나는 몸에 힘이 남아도니 또다시 지겨운 방구석에 앉아 책을 읽기를 거부했지만 어쩌면 그 소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아이 그럼. 나중엔 우리 손주 자산인데 실컷 보거라.”
 할아버지는 내가 해일이 형을 도와 산에 올라가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형, 형은 이 숲이 이상하단 생각이 안 들어요?” 반쯤 올라왔을 때 내가 물었다. 남들한테 말도 못 붙이던 내가 한번 앓고 나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글쎄, 아름답지만 슬픈 곳이라는 건 알지.” 형이 말했다. 무언가 의미심장했지만 난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내 안의 비겁함이 진실을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곧 이을 태풍에 대비해 어린 나무 위주로 고추말뚝을 꽂기 시작했다. 형이 할 때는 쉬워 보였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아, 이거 엇갈리게 해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묶으면 산들바람에도 무너지겠다.” 형은 차근차근 알려주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편했다. 괜히 따라온다고 했다가 도움은커녕 손이 더 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 열심히 해보려 했지만, 저번 소녀가 있던 나무에 온 신경이 쓰였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벌이 꿀을 찾든 나방이 빛을 좇든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고 있었다.
 우리가 점점 그 나무와 가까워질 때 난 정말로 그녀에게 말뚝을 묶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형은 그냥 지나쳐버렸다.
 “형, 저 나무는 말뚝 안 묶어요?” 내가 물었다. 내 목소리는 최대한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저 나무는 너무 오래됐고 약해졌어. 묶는다 해도 뽑힐 확률이 커. 말뚝도 모자르고. 건강하고 어린 나무 위주로 하는 게 나아.”
 “오래됐으면 더 보존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반박했다.
 “글쎄, 다른 나무들 봐. 다 색도 고르고 튼튼하잖아. 쟨 별로 가망 없어 보여. 언제 한번 까진 적이 있는데 송진도 안 나오더라.”
 나는 별안간 형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날은 형이 계속 말을 걸어도 무시했던 것 같다. 일에 열중한 척하며 나름의 소심한 복수를 했던 것이다.

5
 태풍이 왔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새나 들쥐 같은 하찮은 생물마저 숨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난 숨죽일 수 없었다. 난 자꾸만 불안했다. 비바람이 거세질수록 난 용수철 마냥 방에서 튀어나오고만 싶었다.
 나는 그 나무가 걱정됐다.
 아니, 그녀가 걱정됐다. 이미 나의 강박은 이성의 경계를 넘어버린지 오래였다.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이 강박은 너무도 커서 다른 생각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그렇게 나의 이성이 죽어버린 것이다.
 내 귀는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 된 것처럼 비바람 소리에 집중했다. 음울한 소리가 거센 포효로 바뀔 때, 결국 난 뛰쳐나가버렸다.
 나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달려갔다. 다른 나무들은 다 말뚝이 있는데 왜 그녀에게만 없는가, 나는 원망스러웠다.
 미친 생각이겠지만 그녀도 나를 알아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이 매우 거셌다. 이대로 내가 날아가버린다면 날아가 버리라지. 난 상관없었다.
 난 그녀 품으로 가서 그녀와 함께 운명을 맞겠노라, 생각했다.
 ‘정을 줄게.’
 그녀가 나에게 무어라 속삭이는듯 했지만 바람소리가 너무 거세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 환청일 수도 있을 것이다.

6
 나는 뒤늦게 발견되었고 마을에서는 이미 미친놈이라거나 귀신에게 홀렸다는 등 허무맹랑한 소문이 퍼져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뭐라 떠들던 내 몸이 얼마나 아프던 할아버지가 얼마나 화나 있던 상관없었다. 난 그녀와 내가 교감했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은 시끄러웠지만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더 이상의 소문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구 내 새끼. 거길 왜 나갔어? 직전에도 아팠으면서 몸 상할라 우리 강아지.” 할머니는 정말로 속상해 보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 날 이후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고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수치스럽고 화가 나있다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할아버지를 점점 더 증오하게 되었다. 마치 내가 예전에 알던 사람인 듯, 물론 우리 친할아버지니까 아는 사이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내 안의 다른 눈이 할아버지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눈은 할아버지의 어두운 과거를 책망했다. 나는 날이 갈수록 원망의 눈을 갖게 되었고 할아버지도 이를 알았던 것 같다. 나를 불편해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눈치가 빠른 사악한 독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증오했다.
 
 “형, 복구하러 가죠? 저도 갈래요.” 내가 말했다. 해일이 형이 낫과 큰 쓰레기봉투를 잡은 순간 내가 튀어나온 덕에 형은 꽤 놀란 눈치였다.
 “아, 넌 쉬어야지. 됐어, 나 혼자 갈게.” 형이 말했다. 분명 할아버지가 시킨 것이다. 나를 숲 근처에도 오게 하지 말라고. 사실 이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는 척하며 뒤를 밟았다. 다행히 형은 어린 나무들부터 손보기로 한 것 같다. 난 곧바로 그녀에게로 갔다. 내 느낌이 맞았다. 그녀가 나를 기다려주었다.
 “정을 줄게.” 그녀가 말했다. 그 순간 그녀가 나의 어깨를 잡고 내 입에 입을 맞췄고 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난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확신을 준 것이다. 나는 비로소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소년은 어두운 과거로 건너가 버린 것이다.
 난 그녀라는 나무의 패인 상처를 만지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았다.
 
7
면도날에 살을 베는 것은 처음엔 어려웠지만 이제는 꽤 능숙해졌다.
 “정을 줄게.” 내가 그녀에게 말한다.
 난 그녀에게 내 피를 나눠주었다. 이런 날이 반복될수록 난 야위어져 가지만 그녀의 패인 상처는 점점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날은 피가 잘 나오지 않아 꽤 애를 먹었던 것 같다. 나는 팔을 꼬집고 쥐어짜다 결국 반대편 팔에 상처를 내야 했다.
 “야 이놈아!” 고요했던 우리의 세계가 방해를 받았다. 내 곁에 머물던 그녀는 쏙 사라지고 나무만 남았다.
 “야이 미친놈아,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동네 사람들 다 알면 어쩌려 그래!” 할아버지였다. 옆에 해일이 형도 있었는데 나를 측은하게 보는 것이 나에게 이미 미친놈 선고를 내렸나 보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그러다,
 “기무라.”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는 한치의 떨림도 없이 덤덤했다.
 할아버지는 당황하다 못해 귀까지 빨개졌다.
 “기무라, 넌 마구잡이로 소나무에 상처를 냈지? 개처럼 기어서 그들한테 송진을 갖다 주었잖아. 그렇게 해서 얼마나 받았어?”
 할아버지의 얼굴은 이제 시뻘겋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넌 네가 뿌린 과거를 덮으려고 여길 사랑하는 척하잖아. 내가 보기에 넌 그냥 쓰레기야. 넌 속죄하지 않아. 앞으로도 속죄할 생각이 없겠지. 그저 여기에 돈을 쏟아붓고 덮으면 그만이니까. 정말 중요한 건 만약 네가 진심으로 속죄하길 원한다 해도 넌 속죄될 수 없다는 거야.”
 “저놈이..” 할아버지는 매우 분해 보였다.
 “난 네가 그들에게 빌빌대며 굽실대는 꼴도 다 봤어.” (내게는 정말로 보였으니까!)
 “베!” 할아버지는 반박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대신 사자를 조련하듯이 해일이 형에게 나무를 베라고 시켰다. 형에게 말하면서도 눈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쯤 자신의 손주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해일이 형이 도끼를 들자 난 바위를 들었다. 확실히 난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형은 멈칫했고 그 순간 할아버지가 도끼를 뺏어 들었다.

 쾅! 할아버지가 도끼로 나무를 한번 내려쳤다. 내 귀에는 그녀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난 망설임 없이 할아버지를 돌로 내려쳤다. 해일이 형 얼굴에 피가 튀었고 형은 넋이 나가 있었다.
 난 내 손목을 확실히 긋고 그녀에게 다시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을 주었다.

8
 그날의 사건은 그렇게 넘어갔다. 할아버지는 뇌진탕을 겪었고 난 바로 서울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오로지 세 남자만 알고 있었고 무덤까지 함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 모든 것은 평범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나 사이를 눈치조차 채지 못했고 내 유학자금 전액을 할아버지가 내주기도 했다. 아무 일 없던, 아니, 아무 일 없는 척 다시 가족이 되었다. 그 이후 난 레드컴플렉스를 가진 어느 통치자를 보면 아무 일 없는 척 시치미 떼는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시치미 떼기 선수니까. 난 할아버지를 내가 아는 가장 비겁한 사람 카테고리에 넣었지만 할아버지의 장례식(내가 돌로 내려찍은 이후 20년은 더 살았으니 정말 지독한 양반이다.)에서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주었다. 비겁한 사람이지만 어찌 보면 불쌍했다. 그는 끝내 속죄할 수 없었으니까.
 내 인생을 얘기하자면 난 내 작품에 소나무나 소녀를 그리는 일이 많다. 몽환적이면서 초현실적으로 그릴 때가 많은데 그녀를 표현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끝을 내야 한다. 난 마지막 작품으로 그녀를 있는 그대로 그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소나무 숲은 여전히 잘 있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막대한 기부금을 이 숲에 냈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의 나무를 가지며 나무지기 활동을 한다. 최근에는 재선충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 하지만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각자의 나무에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고 자식처럼 돌봤다.
 그녀가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그녀의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 자리는 이상할 것 없이 잎이 쌓여있는 평범한 자리다.
 하지만 난 그녀를 느낄 수 있다. 덕분에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뮤즈: 이태원 댄싱 머신 작가]


나무는 위기가 찾아오면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다.

그래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꽃을 피운, 그 다음 해에는, 죽는 경우도 많다.


퇴근하고 맥주 한 잔 하며 웃는 싱그러운 우리들의 모습, 참 꽃 같다.




[뮤즈: 정진우 작가]


*[뮤즈 모임]'소나무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에 게시된 작품의 보완입니다.


<소나무에 대하여>

소나무의 솔방울 위로 태양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늘 하루 시작을 알리는 창밖 너머의 주홍 태양. 회색 창문으로 보이는 너의 모습은 애절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이것이 나의 소나무- 그는 결국 그 곳에 있었다. 소나무보다 키 작은 한 소년이 서있다.




[뮤즈: 김다빈 작가]


*[뮤즈 모임]'소나무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에 게시된 작품의 연작입니다.


<소나무 아래에서 맹세(2)>

 석션(Suction)
추우우우우우우-
석션 튜브로 개복한 환자의 피를 빨아드리고, 기철은 차분하게 말했다.
“N/S(식염수)”
간호사가 재빨리 식염수로 상처를 씻어내자 분홍빛 살이 드러나며, 상처가 보였다.
“소장이 찢어졌네요. 출혈도 많고.”
“문합 가능하십니까?”
옛날엔 소장은 발로 꿰매도 다 붙일 수 있다고 자부한 그였다.
기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수술용 타이를 움직였고, 마취과 의사는 환자 상태를 보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삐- 삐삐삐-!
“혈압 떨어져요. 빨리 끝내야 돼!”
“피 짜시면서 5분만 잡아주세요. 금방 다 붙일 수 있으니까!”
기철의 말에 인턴 의사가 다급하게 혈액팩을 손으로 쨔댔고, 빠른 속도로 수혈이 이뤄지면서 환자의 혈압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NS!”
출혈을 막을 때까지 계속 고이는 피를 식염수로 씻어내며 총 4곳이 찢어진 소장 부분을 완벽하게 접합한 기철이었다.
“개복 닫는 건 다른 선생님들도 할 수 있죠?”
“네, 네! 제가 하겠습니다.”
“의사 한 명이 직접 타이를 들었고, 기철은 한숨 돌리면서 첫 수술을 끝낼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다음 소식입니다.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벌어진 12중 추돌사고로 인해 18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는...]
9시 뉴스에 나오는 기사를 보면서 기철은 웃음을 지은 채 술잔을 비웠다.
“진짜 수고했어요! 선생님 아니었음 몇 명 죽을 수도 있었는데.”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외과 과장님이시잖아요?”
기철은 TV에 나오는 12중 추돌 사고에서 빈 시간 동안 훌륭하게 자리를 채워 여러 명의 환자를 수술해서 모두 고비를 넘긴 상황이었다.
김천 의료원 원장에게까지 감사 인사를 받은 뒤로 응급실 수술장에서 모인 사람들끼리 이뤄진 조촐한 술자리에서 기철은 피식 웃어 보였다.
“와...장 문합술 안 한 지 2년이 넘었었는데.”
“원래 외과 메스든 사람들은 그거 쉽게 못 잊는 법이요.”
“그래도 잘하시던데요? 진짜 아까 환자 복부 부풀어 올랐을 땐 다 끝난 줄 알았어요.”
응급실 수간호사도 한 마디 거들자 머쓱해진 기철이었다.
“근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엮이게 됐어요? 뭐, 전문의 찾는 병원 알아보는 거예요?”
응급실 과장의 물음에 기철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이 없었고, 옆에서 기철의 술잔을 채워줬다.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뭐,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지만...”
취기 때문이었을까? 다시 이 현장에 돌아와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기철은 그간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털어놓고 있었다.
마치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풀어지며 쏟아지는 과거의 일들, 그리고 술과 휴식에도 채워지지 않았던 그 속의 깊은 기억까지도...
기철의 이야기를 들은 김천의료원 스탭들은 침묵에 잠겼다.
그 속에서 침묵을 깬 것은 응급 과장이었다.
“송기철 선생님.”
“네?”
“내가 응급실 하면서 얼마나 많은 환자를 살리지 못했을까요?”
“....에이! 응급실이면 살린 환자를 이야기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여기는 공단이 있는 곳이라 아주 숱하게 많이 봐요. 기계에 끼이거나, 중장비에 치이거나, 각종 약품 사고로 인해 실려오거나....”
확실히 이곳을 제외하면 대구나 구미까지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고급 장비가 있는 3차 병원까지 갈 수 있으니 말하자면 이 곳은 최전선과 같은 곳이었다.
“의사는 환자 한 명 한 명에 연연해서 오래 못 사는 거예요. 평생 한이 돼서...”
“알죠. 압니다. 살면서 첫 환자의 죽음이었으니까요.”
“이제까지 병원밥 먹으면서 한 번 밖에 못 본 게 대단했던 거 아니에요? 앞으로 교수되고, 정년까지 몇 명의 사망진단서를 끊을 것 같습니까?”
“.....”
“송 선생님은 아직 젊어요. 이제 막 교수되기 직전의 전문의 아닙니까?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있을 때 그때도 이러실 겁니까?”
“....한 잔 주시겠어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 처음 수술에서 합을 맞췄던 이 중년 의사에 말이 왜 이렇게도 후련함과 불편함 사이를 맴도는지 모르겠는 기철이었다.
“뭐, 오늘은 그런 이야기 보다도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더 나와야겠네요. 앞으로 송 선생님이 수술한 환자 케어에 대해서도 저희가 맡아야 하니까요.”
“아, 네. 제가 아까 차트를 다 써놓긴 했습니다만...”
기철은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아른거리는 상황이 떠 올랐다.
그리고 그는 밤새 술을 마시고 인근 숙소를 잡으며, 조용히 캔맥주와 담배를 사 들고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기철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나와 결심한 듯 김천의료원 쪽으로 향했다.

1년 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 곳에서 많은 공부가 됐습니다.”
“어, 그래. 박 선생 앞으로도 서울 가서 잘해야 돼!”
김천의료원에 신임 전문의가 된 기철은 1년의 짧은 수료를 마치고 돌아가는 인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 갈 사람은 가고 또 올 사람은 오겠고....”
2시간 뒤에 있을 신입 인턴/레지던트 수련의들 면접을 준비하며, 만반의 준비를 다 마친 기철에게 갑자기 긴급 콜이 울렸다.
[R-R-RRRR-!]
앰뷸런스가 다급하게 응급실 앞에 멈춰 서고, 들것에 실린 피투성이의 환자를 본 순간 기철은 가운을 벗어던진 채, 바로 응급실로 달려갔다.

“어떤 환자입니까?”
“벌목하다가 나무가 떨어졌습니다! 다발성 장기 파열에, 늑골과 왼쪽 팔 등 골절도 다수 있습니다.”
“흐아...이거 완전 작살이 났네?”
상반신이 완전 으깨졌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의 중환자를 보고서 기철은 곧바로 맥을 짚고, 눈을 까뒤집어 머리 상태를 확인했다!
“피부터 주고, 안에 출혈부터 잡아야겠어요! 당장 수술장 올리세요!”
“네! 선생님!!!”

6시간이 넘는 대수술 끝에 기철은 비틀거리면서 수술장을 나왔다.
“서, 선생님! 우리 아들! 우리 아들 어떻게 됐나요?”
기철은 애처롭게 달려온 환자 가족들을 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부러진 팔과 일부 파열된 장기에 대해 장애가 약간 생길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환자 안정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살았어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신 손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노인과 환자의 부인으로 보이는 만삭의 임산부가 기철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기철은 중환자실로 향하는 환자 가족들을 보며 조용히 마스크를 풀며 바라봤다.
그러던 중 뭔가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어디서 본 사람들인데?”
기철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응급실로 내려갔다.

“세상에...세상에 이런 인연이 다 있나...세상에...”
“.....하.”
1달간 식물인간 상태였다가 깨어난 환자, 담당의로써 기쁜 마음에 달려왔을 때 환자가 기철을 보고 한 마디가 심장을 찔렀다.
[당신이...왜...여기 있는거야?]

기철은 조용히 응급실을 나와 벤치에 걸터앉았다.
아름드리 자란 소나무를 보며 기철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맞네. 그때 그 환자 가족들...”
벌목하고 가구업 한다는 유쾌했던 암 환자 아저씨, 그리고 그 환자의 수술 이후로 잠시 접었던 의사생활.
그리고 돌아왔을 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김천 일대의 산에서 벌목 작업을 하다 사고로 다친 그 환자의 아들을 살리게 되었다.
신헌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때도 이렇게 소나무 아래서 청승을 떨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모든 것이 다 덤덤했다.
환자가 죽은 죄책감도, 환자를 살린 성취감도, 그 모든 것도 그저 덤덤해질 뿐이었다.
“읏차-!”
짧은 담배 타임을 마치고 자리에 일어나 기지개를 폈을 때, 김천의료원 앞으로 앰뷸런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응급실을 향해 달렸다.
 



[뮤즈: 허상범 작가]


*[뮤즈 모임]'소나무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에 게시한 작품의 해설입니다.


<완벽한 나무, 소나무>에 대한 해설

세상엔 너무나도 많은 기준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잣대에 짓눌려 자신의 마음까지도 저버린 사람들이 타인에게 양도하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인해,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워버리고 있는 세상은 아닐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 또한 제 자신을 지워야 할 것 같은 순간을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는 한 번씩 소나무가 떠오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 말입니다.
소나무 한 그루 가슴속에 심어 놓고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솔잎이 떨어져 수북이 쌓여 갈변하더라도 소나무는 여전히 소나무일 것입니다. 여전히 가슴 한켠 시리도록 푸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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