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즈 Sep 19. 2019

[뮤즈 모임] '소나무'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

소재는 소나무

<출처: unsplash.com>




[뮤즈: 송진우 작가]


<노인과 개미와 별>

1p>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없이 많은 별들이 흩어져 있어요.
큰 별과 작은 별들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죠.
이렇게 어두운 밤하늘을 밝혀주는 별들은 어디서 생겨났을까요?
2p>
세상이 처음 생겨났을 때는 별들이 하나도 없어서 깜깜했다고 해요.
그래서 모두가 밤을 무서워했죠
특히 작은 개미는 새까매서 밤이 되면 아무것도 안 보였나 봐요.
3p>
그런 개미를 불쌍하게 여긴 사람들은 밤하늘을 밝혀주기로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절벽에 큰 소나무를 심었죠.
소나무는 사람들의 보살핌 아래 무럭무럭 자라 하늘에 닿을 정도로 키가 커졌어요.
4p>
사람들은 개미들을 불러 모아 별들의 씨앗을 주고 키우게 했죠.
씨앗에서 작은 별이 태어날 때쯤 개미들은 씨앗을 머리에 이고 소나무에 올라 하늘에 뿌렸어요.
어두웠던 밤하늘에는 작은 별이 태어나 조금씩 세상을 밝혀주기 시작했어요.

*

5p>
그렇게 밤은 밝아졌어요. 이제는 밤이 무섭지도 않았고요.
그러자 소나무를 보살피는 사람들이 한 명씩 절벽을 떠나갔어요.
결국 노인 혼자 남았죠.
어려서부터 앞이 보이질 않았던 노인에게는 세상이 아직도 깜깜했어요.
하지만 위험한 절벽을 손으로 더듬어가며 오랜 세월 소나무를 보살펴왔어요.
6p>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소나무를 찾아오네요.
여전히 개미들은 씨앗을 하늘로 나르고 있고요.
앞이 보이질 않는 노인은 소나무 기둥부터 천천히 더듬어가며 문제가 없는지 살펴요.
7p>
아참. 이제 소나무 기둥에는 깊은 홈이 생겼어요.
기둥을 더듬는 손에 개미가 다칠까 봐 노인이 매일 조금씩 홈을 팠기 때문이에요.
개미들은 홈을 따라 희미하게 빛을 내뿜는 씨앗을 이고 오르내리고 있어요.

*

8p>
“까악- 까악-”
어디선가 밤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요.
소나무를 더듬던 노인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손을 뻗어봐요.
하지만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던 밤까마귀에겐 손이 닿지 않아요.
9p>
울음을 멈춘 밤까마귀의 표정이 좋지는 않네요.
모두가 밝은 밤을 좋아하는 건 아닌가 봐요.
밤까마귀는 밤이 밝은 게 싫었어요.
좋은 눈을 가지고 있던 밤까마귀는 자신의 몸을 어둡게 칠하고 깜깜한 밤에 사냥하는 걸 좋아했어요.
하지만 이젠 밝은 밤하늘에서 모두가 밤까마귀를 보고 도망갈 수 있게 되었죠.
10p>
별을 나르는 개미들을 싫어했던 밤까마귀는 한 가지 꾀를 내요.
절벽 아래 떨어져 있던 돌멩이를 주워와 소나무에 던지자,
뾰족한 돌에 찔린 소나무의 기둥에서 송진이 흘러나와요.
끈적끈적한 송진은 깊은 홈을 따라 흘러내려 개미들의 길을 막았어요.

*

11p>
개미들이 혼란에 빠졌어요. 작은 개미들은 송진을 헤쳐나갈 수가 없었죠.
고민을 하다 노인에게 부탁을 해요.
하지만 노인의 손은 송진에 닿지가 않았어요.
12p>
이때 덩치 큰 말썽꾸러기 개미 한 마리가 노인의 귀에서 기어 나와요.
이 덩치 큰 개미는 친구들이 모두 씨앗을 나를 때 놀기만 했어요.
모두가 소나무의 깊은 홈을 수없이 오르내릴 때
이 개미는 소나무의 깊은 홈 대신 노인의 주름진 손을 올랐어요.
노인은 이 개미도 자신처럼 앞을 못 봐
자신의 주름을 소나무 기둥으로 착각한 줄 알고 친구처럼 대해줬어요.
13p>
이 말썽꾸러기 개미는 성큼성큼 걸어가 송진 앞에 서요.
그러더니 남들보다 큰 턱으로 송진을 잘라내기 시작해요.
한 움큼... 또 한 움큼...
14p>
한참이 지났을까요?
결국 덩치 큰 개미의 활약으로 송진을 모두 걷어냈어요.
노인은 기뻐하며 자신의 손을 내밀어요.
하지만 덩치 큰 개미는 노인의 손 대신 깊은 굴 속으로 내려가요.

*

15p>
노인은 굴 앞에 앉아 덩치 큰 개미를 기다려요.
한참이 지나도 덩치 큰 개미가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되기 시작해요.
끈적이는 송진 때문에 몸이 아픈가? 아니면 너무 힘들어서?
16p>
이윽고 덩치 큰 개미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다행히 아픈 곳은 없나 봐요.
어? 덩치 큰 개미가 씨앗을 하나 들고 있네요.
이 말썽꾸러기가 씨앗을 나르는 건 처음 봐요.
17p>
덩치 큰 개미는 열심히 씨앗을 나르기 시작해요.
그런데 소나무가 아닌 노인의 손을 오르네요.
개미의 감촉을 느낀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요.
손을 조심히 들어 개미를 머리 위로 올려줘요.
18p>
덩치 큰 개미는 그 어떤 것 보다 크고 밝게 빛나는 씨앗을 들고 노인의 얼굴을 누벼요.
그러더니 노인의 눈에 씨앗을 던져 넣어요.
노인의 눈에서 태어난 별은 환하게 빛나더니 차츰 자리를 잡아가요.
19p>
깜짝 놀란 노인이 눈을 감싸 쥐어요.
앞이 보이질 않던 노인이 밝은 빛을 보고 놀란 거예요.
밝은 밤하늘의 별들이 노인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해요.
노인에게 밝은 눈이 새로 생겼네요!
앞으로 노인은 소나무를 더 잘 보살필 수 있게 되겠죠?




[뮤즈: 유피린 작가]


<송목금법>

손에 전기톱을 든 태우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젠장.”
욕이 나올 정도로 화창한 하늘에 눈썹을 찡그린 그는 눈앞의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화창한 하늘임에도 눈앞에 이 소나무 때문에 집에 빛이 들어오는 꼴을 못 봤다.
건장한 청년인 태우 같은 사람이 2명이 손을 잡아서 겨우 맞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둘레를 가진 나무.
귀농을 하면서 시골로 내려왔을 때는 소나무를 보면서 운치 있다고 생각했던 태우였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바보지.”
하지만 지금은 집의 미관을 해치는 최악의 존재였다. 거기에 쓸데없이 커서 더 불편하다.
“땔감으로는 안 쓸 테니까 나를 원망하지 마라.”
처음에는 집안의 수호목이라고 생각했던 감상을 떠올리며 태우는 전기톱에 전원을 넣었다. 아무리 큰 나무라고 하여도 전기톱이면 순식간이다.
“……나무꾼님! 나무꾼님! 살려주세요! 사냥꾼이 쫓아와요!”
전기톱을 휘두르려는 순간. 노루 한 마리가 담장을 넘어오면서 외치자, 태우는 양손의 전기톱을 들고 멍하니 노루를 바라보았다.
“저를 살려주시면―”
“사향노루는 천연기념물 216호라서 사냥은 금지야. 말할 줄 알면 경찰에게 가서 신고해.”
노루의 종을 정확히 파악한 태우가 투덜거리며 대꾸하자, 노루는 태우를 한 번 노려보더니 혀를 차며 담장을 넘어서 사라졌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무슨 선녀와 나무꾼이야?”
나무를 베려던 태우는 갑작스러운 노루의 등장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다시 전기톱을 휘두르려고 했다.
“동생! 그 나무를 배면 안 돼!”
“……이건 또 뭐야?”
전기톱이 나무에 박히려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또다시 담장을 넘어서 호랑이 한 마리가 등장했다.
이마에 王자가 박혀있는 호랑이가 눈을 부라리며 태우를 노려보자, 태우는 피식하고 웃었다.
“이번에는 호랑이 형님이냐? 어디 보자……”
마치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이 전기톱을 내려놓은 태우는 옆에 둔 거대한 가방에서 더블 배럴 샷건을 꺼내더니 호랑이를 겨누었다.
“이미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호랑이지만, 뭐 내가 위험하다는데 사냥해도 상관없지?”
“젠장. 감수성 메마른 녀석.”
겨누어진 샷건을 보자 호랑이는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서 사라졌다. 나무를 베려고 할 때마다 온갖 사고를 겪은 태우는 더 이상 볼 것 없다는 듯이 전기톱을 잡았다.
휘잉-
그 순간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오며 태우의 눈앞에 전혀 모르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풀과 꽃이 흐드러지게 핀 상태로 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마치 옛날에 이상향이라고 불렸던 도원(桃園)을 연상시키는 광경의 중심에 두 명의 남성이 조용히 바둑을 두고 있다.
“허허, 대마가 잡혔구나!”
“끄응, 이 친구가―”
도원의 신선 둘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보자, 태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신나게 밀리고 있는 흑돌을 강제로 뺏어서 바둑판 한가운데에 올렸다.
“이, 이런!”
“허어! 여기에서 이런 신묘한 수를!”
“……이세돌하고 알파고 바둑이라도 좀 보시죠? 이 기보 너무 낡았잖아.”
도낏자루, 아니 전기톱이 썩기 전에 순식간에 단 한 수로 바둑을 뒤집은 태우가 몸을 돌리자, 다시 소나무의 앞으로 돌아왔다.
“어째 오늘따라 좀 심한데, 아무튼 간다!”
다시 기운차게 전기톱을 휘두르는 순간. 땅이 울리며 태우가 손에 든 전기톱을 놓쳤다. 기운차게 휘둘러졌던 전기톱이기에 그 반동으로 집 한 구석에 가꾸어둔 연못에 빠진다.
“젠장. 하나 더 사와야겠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태우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연못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소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진 집의 정원에 자욱한 안개가 깔리더니, 연못에서 아까 바둑의 백돌을 잡고 있던 신선이 나타났다.
“이 금도끼가 네 것이냐?”
“220V에 꽂아서 쓰는 전기톱이 내 것이니까 돌려주시죠? 점유물 이탈 횡령죄라고 들어 보셨나?”
“……그냥 아는 데로 금도끼랑 은도끼 받고서 나무 안 베는 해피엔딩 하면 안 되겠냐?”
연못에서 솟아난 신령이 투덜거리자, 태우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태우가 베려고 하는 소나무는 현재 집의 흉물 밖에 안 된다.
사실 나무를 함부로 베기에는 죄책감이 생겨서 다른 곳으로 옮겨 심을까도 생각해봤지만, 너무 거대하고 뿌리도 깊게 박혀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나도 좀 차선을 하고 싶은데, 곧 있으면 집사람이 출산할 시기여서. 애 키우는데 햇빛 안 드는 우중충한 집은 좀 그렇잖아?”
“태어날 애기가 햇빛 알레르기거나 그러면 어쩌려고?”
“커텐 치지 뭐.”
태연한 태우의 말에 신령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옛날에는 이러면 해결되었는데, 젠장 시대가 너무 변했어.”
“시대가 변한 것 이전에 방식이 너무 구식인데?”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소나무는 국가가 관리하는 재산이었다고. 거기에 나 같은 황제가 깃든 나무를 베려고 하다니, 무엄해도 정도가 있지!”
팔팔한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신령의 말에 태우는 콧방귀도 안 뀌었다.
소나무는 참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나무다. 고대에는 그 감성 때문에 황제가 아니면 묘를 장식하는데 쓰는 것조차 금지였다. 조선시대만 해도 소나무를 함부로 베는 것이 법으로 금지된 행위였다.
거기에 사시사철 잎을 피우는 상록수라서 절개를 상징하였기에 너도나도 우러러보는 나무였다.
“그걸 잘 아는 녀석이 그런다고?”
“그래봤자 지금은 2019년인뎁쇼?”
태연한 반박에 신령은 연못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소나무를 등대고 주저앉았다.
“좀 봐줘라. 이제 내 땅이라고는 이 소나무뿐인데.”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이 땅은 엄연히 법이 인정하는 내 땅인데?”
“하아. 내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이런 굴욕 상상도 못했는데.”
“하지만 그쪽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지, 뭐라 하던 산 사람이 제일 아니겠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태우의 모습에 신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동안에는 작은 견제로도 그만두더니 오늘은 완전 끝장을 볼 기세다.
“나는 고대에 추앙받던 황제였다.”
“안 물어봤어요.”
“그냥 좀 들어줘!”
투덜거리며 신령, 아니 황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고대의 황제였던 그는 죽으며 자신의 무덤에 소나무를 잔뜩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무덤은 자연재해에 떠내려가고 그 울창했던 소나무 숲은 사라졌다.
“그리고 겨우 남은 것이 이 소나무뿐이다. 이런 것을 베려고?”
“이야기 듣고 보니까, 소나무에 달라붙은 잡귀였네. 더욱 베어야겠어.”
오히려 결심한 듯이 태우가 전기톱을 움켜쥐자, 황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섰다.
“머, 멈춰라 이 놈!!! 이건 황명이다!!!”
“황명이든, 어명이든 모르겠고, 나는 국민 하나하나가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 시민이다.”
주저 없이 태우의 전기톱이 휘둘러지며 나무의 표면에서 맹렬히 회전한다. 하지만 나무의 표면은 꿈쩍도 안 한다.
“하하하!!! 천민 주제에 황제의 나무를 베려니까 그러는 거다!”
“……집어치우시지? 나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 시민이라니까? 당신이 황제이든 뭐든, 이 땅이 내 땅인 이상 지금은 내가 황제야!”
하지만 태우는 전혀 물러서지 않고 반박하며 힘을 주자, 소나무가 허무하게 잘려나간다. 방금 전의 저항은 마치 허상이었다는 것처럼 깔끔한 절단이다.
“마, 말도 안 돼! 짐은 황제이거늘! 어째서 일개 백성의……”
“어이 황제 양반. 아까 소나무에 대하여 내가 주절주절 늘어놨는데, 이걸 말 안 했네. 지금도 소나무는 절개를 상징하지만 그건 민중의 꺾이지 않는 의지로 옮겨갔어, 충성이나 이딴 것이 아니라고.”
좌절하는 황제를 보며 태우는 핸드폰에서 하나의 노래를 틀었다. 이 집에 이사 오고 소나무를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어서 계속 듣던 노래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유명한 민중가요가 울리자 황제는 그걸 천천히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짐의 제국이 사라지고서 황제라며 스스로를 치켜세우던 것은 짐의 아집이었군. 알겠다. 부디 아까 말했던 대로 땔감으로는 쓰지 말아 주게나.”
민중가요를 들은 황제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지자, 태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중가요로도 귀신이 퇴치되네?”
피식 웃으며 태우는 쓰러진 거대한 소나무를 이제 어떻게 활용할까를 고민하였다. 황제의 부탁이었고 처음에 말했으니 확실히 땔감으로는 안 쓸 소나무였다.




[뮤즈: 심규락 작가]


<영월 속 영월>

“고저 그라서 댁은 이 오밤중에 왜 여기까지 온 거래요? 멀디먼 겡원도, 그것도 이짝 청령포(淸泠浦)까지 오신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읎아요.”

“예?”

“아! 그리고 마카 알아줬음 하는 게 있는데요, 내 지금 화난 거 참으로 아니래요. 원래 이짝 영동 사투리가 발음만 좀 억센데. 정작 내용 까보믄 진짜 별 기 읎사! 히히.”

“……”

“험험, 내 말뽄새가 이래 글러 보여도, 사실 나름 순박허요. 오랜만에 이 등말랭이에 친구가 생겼으니, 여기 선물 하나……”

“예?”

“빨리 가~자~”

“어딜…… 가자고 하시는 겁니까?”

“아이 참, 그 걷는 게 아이고! 요 옥시기 빨리 가~자~”

“전 이제 막 여기 왔는데, 또 어디를 가자고 하시는 겁니까?”

“우리 영동에서는 어여 갖고 가라는 말인데, 평지 사람들에겐 헷갈리는 게 마이 있사. 암튼 어여 이거 강냉이 가져가 보오. 히히.”

“감사합니다……”

또 다른 옥시기 하나가 차가운 지상의 공기를 밝디 밝게 빛내고 있었다. 이 늦은 밤중에 멀리서 혼자 차를 타고 온 사내는 캐나다라는 나라에서 왔단다. 단풍잎의 터전에서 어찌 이곳 북위 37° 10′ 33″ 동경 128° 26′ 38″, 또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관천리 산 67-1 번지의 산간까지 오게 된 것일까. 강원도 토박이에게는 손님에 대한 반가움과 더불어 호기심이 손에 든 그 옥시기 알알이 만큼이나 배가 되고 있었다.

“아, 그래서 그 뭐냐. 카나다? 그기선 왜 여기까지 온 거래요?”

“살다 보니……무엇에 슬퍼서 한국에 오고, 또 무엇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네요.”

“아이 참, 그 무엇하고 무엇이 뭔데 그래요? 내 참 답답해 죽겄소!”

“제가 실은 캐나다에서 몇 년 간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음,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열심히 했죠.”

“글카다 사업이 망한 거래요? 좀 마이?”

“일은 나름 나쁘진 않았어요. 근데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인 두 명이 거기서 죽었어요.”

“아이고, 매해다 매해! 거 마이 놀랐겠소, 다투다 그랬대요?”

“한 명은 췌장암으로, 다른 한 명은 질병으로 두 다리를 절단한 뒤 결국 비관 자살을 했어요.”

“아이고 아이고…… 어째 첨 봤을 때부터 뭔가 안색이 패리다 생각했는데, 다 그럴 이유가 있어라……”

충격이 컸다고 했다. 단순히 큰 것이 아니라, 빅뱅이 자신의 육체로 이뤄지는 것 같은 시공간을 느꼈다고 했다. 본래 인간이 직시할 수 없는 것이 태양과 죽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죽은 자는 이미 죽음을 경험한 단계에 위치한 소멸의 존재이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죽음을 온전히 그리고 더 슬피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는 그 뒤에 남겨진 산 자들 뿐이다. 그렇기에 감내보다는 사별을 인정하는 것이 더욱이 힘든 법이다. 원래 그런 것일 터이다. 아니, 원래 그런 것이다.

“그 사램들이랑 많이 친했소? 오랫동안 친구였다고 한 거 보믄서도……”

“8년 이상의 세월을 함께한 애들이죠. 캐나다는 의료비가 정말 비싸요. 끝까지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으려면, 여기와 달리 정말 오래 걸리기도 하고요. 췌장암이었던 애는 좀만 더 버텨서 한국 가서 수술받을 겸, 고향도 들린다고 좋아했죠. 그리고 비행기 탑승을 이틀 앞두고, 제 알아서 하늘길을 먼저 가더군요.”

“허이허이……”

“뭐, 다들 잘 갔을 겁니다. 그리고 장례 다 치러주니까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그곳이 무서워지더군요. 아니, 두려워지더군요. 그래서 뭔가에 홀린 새끼 마냥 모든 걸 다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아, 그라서 여그 반도로 돌아온 거라 하거와! 아까 무엇에 슬퍼서 왔다 한 게 그거라!”

“맞습니다.”

“음…… 고저 내 갑자기 생각나는 이들이 있소. 그 혹시 사육신이라고 아시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그리고 유응부. 다 여그 영월이랑 나름 연관이 있는 이들인데, 왕에게 충성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이오. 이보오, 충성과 우애라는 게 있다믄, 죽어서도 이리 평생 기억되는 거 아니겠소?”

“그것도 맞을 겁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 시각, 청령포는 추웠다. 강원도라 원래 추운 것인지, 아니면 남자의 처연한 호흡기관을 여실히 짓누르고 있는 고통 섞인 기체 때문인지 분간하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시련의 농도가 짙은 만큼, 그 남자의 날숨은 더욱더 여실히 눈에 잘 들어왔다. 하얗게 또는 허옇게 말이다.

두 화자는 산등성이 서, 그렇게 서늘한 담소를 나누면서, 빨간 산수유가 색칠된 뺨으로 달맞이를 하고 있었다. 산 따위가 그들의 어깨를 더 움츠려들게 하는 만큼, 월광이 그들에게 보내는 인사 빛은 더욱더 환해져만 갔다.

“그짝이 뭐이에 슬프다고 하는지 알겠지만서두, 그럼 여그까지 끌고 온 건 무어요?”

“아까 제가 한 친구 말씀드렸죠? 그 두 다리 절단했던 친구.”

“내 머리가 이리 널빤데기 모습이어두, 나름 쌩쌩해요! 아주 눌러!”

“같은 병이에요, 제가.”

“……”

“왔어요, 그래서.”

“……”

산자락 위 차갑게 식은 태양은 고요함을 더욱이 밝혀댔고, 이는 소리가 되어 그 둘의 입과 입 사이에서 시끄러운 적막으로 피어올랐다. 무언의 인터뷰가 지속된 뒤 이윽고 하늘바다는 잿빛과 에메랄드의 반짝임 그 어딘가의 색채로 갈아입었다. 그 무겁디무거운 옷의 서글픔이 흘러내려 그들을 누르지 못하게끔, 나무 모양의 방파제들은 지상에서 부단히 공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은 밝았다. 그 무음의 시공간을 무색하게 할 만큼, 시리도록 밝았다. 그렇게 그 둘은 한껏 영월(迎月)을 하고 있었다.

“혹시 존함이 무언지 물어봐도 되겠우야?”

“이홍위 입니다.”

“아? 아하하! 그 왕세손이 단종이랑 이름이 똑같은 게 아주 재밌소! 내는 관음송(觀音松)이라 해요, 이 영월군 청령포에서 600년 넘게 살고 있아요. 내 이름 뜻이 뭔지 들어봤소? 카나다 사램이라 모를 거 같은데…… 하하하, 몰라도 괜찮소! 그 세조 2년에 단종이 이짝으로 유배를 왔는데, 내 앞에서 슬프게 넋두리를 하는 기라. 그라서 ‘말하는 단종을 바라본 소나무’라는 뜻으로 이름이 생겼지 뭐예요! 재밌지 않소? 사램, 아니 나무는 살면서 이름값한다고, 나도 그 뜻 따라가는 거 같소! 아이 사램 참, 그 그 고개 계속 내리고 있지만 말고 좀 웃아봐요! 내가 기분 풀어주려고 이리 재밌는 얘기하려고 하잖소. 그 홍위 그 자슥이 말이에요, 아 그쪽 말고 단종! 그 단종이 말이에요. 어느 날 밤에 내 앞에 울면서 걸어 오더와 질질 짜기 시작하는데, 아니 글쎄 걔는 유배를 10대 때 왔지 않아요? 아,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내는 600년 넘게 살았으니, 걔보다 한참 으른이라 그렇게 말해도 되잖소? 암튼 그래서 내가 ‘이놈! 뚝 하거라!’라고 아주 호통을 쳤지 뭐예요? 그러니까 그 아가 글쎄! ……”




[뮤즈: ㅎㅈㅇ 작가]


<푸른 기억>


 내가 그곳을 다시 찾아간 것은 30년 만이다. 나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채 아무 감정 없는 상태로 그곳에 가고 있다. 기차에 비치는 풍경이 점점 푸르게 변해간다. 영등포와 수원을 지나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강이 보이고 산이 보인다. 어쩌면 운전을 하는 대신에 기차를 탄 것이 잘한 일인 것 같다. 생각할게 많을 것 같기에 기차를 선택했는데 막상 타고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게 나에겐 엄청나게 다행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나는 다른 생각이 그때의 기억을 망치게 놔두고 싶지 않다. 그곳에 도착해서 떠오르는 대로 흘러가듯이 나를 맡기고 싶을 뿐이다. 다른 잔가지들 없이 곧게 뻗어나가듯이 다른 잡생각이 그 기억에 묻지 않길 바란다.
 나의 첫사랑이자 어쩌면 마지막 사랑인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그곳. 그리고 나를 30년 동안 방황과 비밀 속에 가둬버린 그곳으로. 감히 두려워 떠오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던 그곳으로.

1
 도착하자 몇몇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장소는 너무 많이 변해서 처음 보는 세상인데 그 얼굴들은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서 조금 유명하다. 물론 해외에서는 유명한 게 확실하다. 그러나 이들은 나에게 감히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이방인이 된 것이다. 이 마을의 자랑이지만 친근함은 없는 유명한 이방인. 나름 강연과 인터뷰를 요청받고 외국의 갤러리에 초청되지만, 아주 유명한 갤러리에는 내 작품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에 걸려 있지만, 이 마을에서 나는 그저 이방인일 뿐이다.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부모님은 이혼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고 어머니는 미국에 있었다. 아버지의 기준에서는 부모가 되가지고 자식에게 너무 추한 꼴을 보였다는 자책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잠시 할아버지의 집에 맡겨졌다. 할아버지는 아주 부자였는데 가끔 동네 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대고 수군거렸다. 우리 집안은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부자였지만 일제시대 때 더욱더 부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나는 우리 집안을 변명할 생각은 없다. 다만 사람들은 나에게 공손해하면서도 일말의 경멸감을 품고 있었고 그것은 나를 언제나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과는 물론 달랐다. 말이 없는 것은 지금도 똑같지만 언제나 남들의 눈치를 보고 소심하기 그지없는 숙맥이었다.
 사람들은 친절한 듯 대해주지만 나를 바보 같은 도령으로 보았다. 물론 내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이었기에 할아버지의 끝없는 자랑거리 중 또 한 가지의 자랑거리였지만 그래도 그들이 나를 바보라 본다면 그 말이 확실하고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나는 그 마을에서 엄청난 고독감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이 벌이라 해도 그들을 탓할 수 없고 이해해야만 했다.
 친구라 부를만한 사람은 나보다 세 살이 많은 해일이 형이었다. 해일이 형은 할아버지가 부리는 나무지기였다. 마을에는 소나무가 아주 많았는데 이것 또한 남 못지 않은 이 마을의 자랑거리였다. 할아버지는 소나무에 아낌없이 베풀었다. 집착을 부린다 할 정도로 마을 소나무들을 챙겨왔다. 그런 점에서 해일이 형은 할아버지의 충직한 양치기 견 같은 존재였다.
 “내가 형이니까 편하게 부를게. 서울에서 왔다 했지?” 해일이 형이 어느 날 물었다. 우린 그전에도 일면식 한번 없었는데 형은 그런 사실이 신경 쓰이지 않는지 여유로워 보였다.
 “네, 이번 방학 때만이에요.” 누군가에게 대답을 한 것이 상당히 오랜만이라 내 목은 잠겨있었다.
 “방금 딴 건데 먹을래?” 형은 나에게 사과를 권했다.
 “고맙습니다.” 사실 사과 따위는 먹고 싶지 않았지만 성의를 생각해 억지로 한입 깨물었다.
 “존대하지 말고 말 편하게 써.” 형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형의 뒷모습을 생각하곤 한다. 아무 편견과 미움 없이 사과 한쪽 나눠주는 사람. 형은 언젠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을 하는 건 에너지를 주지만 미워하는 건 에너지가 들어.”
 나는 형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도 실천하는 삶은 살지 못했다.

2
 나는 거의 매일을 방안에만 있었다. 혹시 누가 방해할까 봐 한 손에는 항상 책이 있었고 끝없이 읽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점점 권태로워졌고 나는 할아버지가 자부심을 느끼는 소나무 산으로 가보기로 했다. 할아버지의 자산에 비하면 적은 돈이지만 꽤 많은 액수가 들어갔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낮은 동산 정도로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높고 널찍했다. 솔 냄새와 맑은 공기,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상하리만치 기묘한 소나무 숲은 나를 어느 정도 최면에 걸리게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눈앞에 헛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형체가 뿌연 소녀가 앉아서 울고 있었다.
 나는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나에게 왜 환각이 보이는지 얼떨떨했을 뿐이다.
 “허!” 소녀가 놀라서 나를 보았다.
 소녀의 형체는 더 이상 희미하지 않았다. 그저 내 또래로 보였고 하얀 원피스에 맨발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것은 소녀의 눈이 푸른색이었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것이 환각인지 뭔지 몰라도 정신 차리기로 했다.
 “저기, 미안해. 일부러 여기 있던 건 아냐.” 나는 침착하게 말을 했다.
 소녀는 고개를 내렸다 다시 나를 올려보았는데 이제 그 눈은 나와 같은 검정이었다. 아무래도 소나무 숲의 기묘한 모습에 정말 최면이 걸렸었나 보다,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녀는 아주 놀라고 겁을 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내가 범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멋쩍어졌다.
 내가 이대로 돌아서야 하나 아주 느리고 길게 고민하는 동안 소녀가 (드디어) 말을 건넸다.
 “아, 미안.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소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량했다.
 이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였다. 돌아서서 가는 것. 그러나 내 발은 떨어지질 않았다. 그녀가 너무 예쁘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신비롭고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멍청하게 서있는 나를 나 스스로도 놀라며 말을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하는 동안 소녀가 다시 말했다.
 “넌 못 본 얼굴인데 어디서 왔니?” 이렇게 묻는 그녀는 어딘지 어른스러웠다.
 “나, 난 서울에서 왔어. 방학 동안 있을 것 같아.” 난 말까지 더듬었다. 이런 멍청이. 나는 수습할 요령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굉장한 곳인 거 같아. 소나무가 이렇게 빽빽한 건 처음 봤어. 머리도 맑아지니 좋네.” 이렇게 말을 뱉은 나는 속으로 또 실수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곳이 좋다고 떠벌리고 있었다. 이런 멍청이! 나는 더 혹독하게 나를 책망했다.
 그녀는 다 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난 온몸이 뜨거워졌다. 물론 그 시기의 나는 자라는 소년으로서 온몸이 뜨거워지고 특히 다른 곳이 툭하면 뜨거워졌지만 이번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내 얼굴이 굳이 보지 않아도 빨개졌다는 것 또한 알았다.
 “나도 이 세상에서 여기가 제일 좋아.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다행이네. 할아버지한테 좀 더 멋지게 해달라고 부탁해야겠어.”
 내가 할아버지 얘기를 (이젠 병신이라며 나를 정말로 혹독하게 몰고 있었고) 하자 소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친일파 손자인 것을 이렇게 꺼내다니. 그것도 으스대면서! 나는 나 자신을 때리고 싶었지만 앞에 그녀가 있었기에 참고 있었다.
 “난 이만 가볼게.” 소녀가 일어났다. 그때는 왜 그녀가 맨발인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곧이어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했고 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소녀는 이미 가고 없었다.
 “병신! 병신! 병신! 너 같은 새끼가 배냇병신일 거다.” 난 나 스스로를 책망하며 숲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자 항상 방에만 있던 손주가 없어져 할머니가 꽤 놀라신 듯했다.
 “어디 갔다 오는 게냐?”
 “소나무 산에요.”
 “거기선 항상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라. 안 그럼 신들이 노하신다. 오래된 나무들은 저마다 지키는 신이 있는 법이야.”
 할머니는 항상 노인 특유의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났고 모든 미신을 믿는 분이었다. 난 그 말과 그날을 그렇게 넘겼다.

 To be continued..




[뮤즈: 김다빈 작가]


<소나무 아래에서 맹세.>

“송 선생, 진짜 안 돌아갈 거야?”
“거, 밥 먹는데 또 무슨 일 이야기를...”
벌써 2년간 쉬고 있는 송기철 선생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친구였다.
“진짜 의사 때려 치려고? 어떻게 교수 1년 남겨 놓고 그렇게 손을 놔 버렸냐?”
“.....”대답 대신 기철은 소주를 쭉 들이켜고는 한 잔 더 채워달라는 듯 술잔을 내밀었다.
“에효- 너도 진짜 ‘그 일’만 아니었으면...”
“그만 이야기하자.”
그 뒤로 친구 역시도 기철에 대해 병원에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 했다.

“조심히 들어가, 또 딴 데 가서 술 마시지 말고...”
“됐어.”
친구와 헤어진 뒤 기철은 밤거리를 걷다가 취기에 의해 비틀거리더니 이내 인근 공원으로 걸어가 벤치에 쓰러지듯 걸터앉았다.
담배 한 대를 물고 하늘을 봤을 때, 아름드리 자란 소나무가 달빛을 가리고 있었다.
“.....씨발.”
소나무를 보더니 질색을 하면서 자리에 일어나 뛰쳐나가려는 기철이었다.

하지만 공원 밖까지 나갔던 기철은 한숨을 쉬면서 소나무가 있던 벤치로 돌아왔다.
손에는 인근 편의점에서 사 온 소주가 있었다.
소나무 아래 과거의 기억을 안주 삼아 나지막이 되뇌이는 기철이었다.
“휴우- 내가 언제까지 이래야 되나...”


기철은 명문 의대를 졸업하고, 자교 병원에서 탄탄대로를 걷던 의학도였다.
외과 파트를 선택해, 뛰어난 실력과 엄청난 노력이 뒷받쳐줘 젊은 나이에 차기 일반외과 교수로 낙점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말이다.

간암 말기의 환자였다.
지방에서 목재 임업을 하는 대표였는데, 어렵지만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꼭 해야 하는 수술이었다.
의대생과 수련의들이 참관하는 자리에서 임상강사로써 마지막으로 집도하는 수술, 교수와 같이 차분하게 진행한 수술, 그리고 간의 40% 이상을 절제하면서도 겨우 수술은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환자의 인사까지 받은 그 환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것도 사인은 원인 불명의 간질환이라는 부검 결과로 말이다.
그리고 메스를 잡지 못한 지 2년, 자교 대학병원의 교수 자리도, 암전문센터에 대한 연구도, 탄탄대로의 커리어도 모든 게 다 사라졌다.

“간만에 바다나 보러 갈까?”
다음 날 청승맞게 과거 회상만 하던 기철은 마음을 다 잡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2년간 가고 싶은 곳은 해외건 국내건 떠오르는 순간 전부 들렸던 나날이었다.
오늘의 행선지는 바다, 그것도 운전대를 잡은 김에 부산까지 쭉 달려 볼 생각이었다.
부산에 있는 친구들도 보고, 회나 한 접시 먹을 생각에 들떠있는 기철이었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신나게 액셀을 밟던 기철은 대전을 거쳐, 대구 IC에 오는 길에 갑자기 핸들을 돌렸다.
그리고는 대구 방향이 아닌 국도를 통해 우회해서 가고 있었다.
도로에 보이는 소나무가 보일 때마다 귓가에서 그 환자의 목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나중에 가구 필요하면 대구로 오쇼! 내가 나무 밥만 30년 먹었어.]
[지난번에 수술한 환자, 사망했단다.]
[원인불명의 간질환, 부검 결과가 그거였다.]
핸들을 잡는 손이 점점 떨리는 가운데 눈 앞에서 갑자기 수많은 자동차들과 매캐한 연기와 불길이 눈에 들어왔다.
“!?”


“으아아악!!! 사람 살려!”
“엄마! 엄마아!!!”
“여보세요! 여기 XXIC 방면인데요!!”
사고였다.
그것도 10대 이상의 자동차가 충돌해서 아수라장이 된 상황이었다.
사방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사사람들, 부족한 인력에 허겁지겁 달려온 구급차, 곳곳에서 들리는 비명과 울음소리....
기철은 황급히 차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아이를 감싼 채 쓰러져 있는 여성에게 달려갔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어우... 이 피 좀 봐!”
다리가 반대로 꺾인 채 피가 콸콸 쏟아지는 상황에서 기철은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환자의 다리에 감싸 지혈을 시도했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은 여성의 경동맥을 짚고 눈을 열어 본 다음 옆에서 우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저기 엄마 괜찮을 거야! 친구가 좀 도와줄래?”
“으아아앙! 엄마...엄마!!!”
“우리 친구가 이 손수건으로 여기 이 다리를 꾹 누르면 엄마가 금방 깨어날 거야. 아저씨 말 알지?”
아이는 훌쩍거리면서 기철이 시킨 대로 손수건을 가지고 엄마의 다리를 지혈시키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은 상황에서 기철은 곧바로 다른 환자들도 살펴봤다.
“으으으...으아아악....”
“저기 진정하세요! 이거 억지로 빼면 큰일 나요! 일단은 괴사 안되게 뭘로 좀 괴어야...”
뒤집힌 차량에 깔린 노인을 두고, 강제로 차를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철은 침착하게 노인의 의식상태를 확인하고는 보도블록을 차 밑에 쑤셔 넣어 공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고 있을 때 119 차량들이 모습을 보였다.

공단에 위치한 병원에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12중 추돌 사고로 인해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수십 명의 응급 환자들과, 감당하지 못해 백방으로 뛰는 병원 사람들.
“2차 병원에서 이 환자들 감당 안 될 텐데....”
기철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응급실을 담당하는 나이 지긋한 응급실 과장은 한치의 동요도 없이 환자들을 보살 피고 있었다.
“과장님! 이 쪽 환자 어레스트(arrest=심장마비)났어요!”
“CPR해! AED 전부 꽉 찼어!”
“과장님! 간담췌 외과 선생님 오시는데 30분 걸린답니다!”
“더 빨리 좀 오라고 해! 안 되면 테이블 데스라고!!”
“선생님! 여기 환자분 점점 배가 부풀어 올라요!”
“뭐!?”
수많은 환자를 보다가 간호사의 말에 다급히 달려간 순간 CT촬영을 들어가기 전에 점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의식 없는 환자를 보고 점점 안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외과 언제 오냐?! 이 환자 지금 수술장 바로 올라가야 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응급실 과장과 1인분 몫도 겨우겨우 하고 있는 풋내기 인턴 의사 두 명, 전문의는 오는데 30분 이상...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을 때 기철은 병원을 빠져나갔다.
“어제 술을 너무 먹었어. 수치 안 걸린 게 다행일 정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어갈 때, 멈춰 선 기철은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메스 안 잡은 지 2년이 넘었어. 이젠 타이도 어떻게 묶는지 까먹었다.”
아무래도 빨리 차에 타고 그냥 부산으로 냅다 달려야겠다.
오늘은 소주도 있는 대로 먹고, 회도 비싼 걸로 시켜야 겠다.
“....펠로우 하나가 간다고 달라지는 게 없잖아.”
차에 올라탄 채로 기철은 빨리 달리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기철은 액셀을 밟지도, 핸들을 돌리지도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결심한 듯 차키를 뽑은 채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




[뮤즈: 정진우 작가]


<소나무에 대하여>


소나무의 솔방울 위로 태양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늘 하루 시작을 알리는 창밖 너머의 태양. 회색 창문으로 보이는 너의 모습은 애절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이것이 나의 소나무?




[뮤즈: 허상범 작가]


<완벽한 나무, 소나무>

모진 풍파와 시간을 견디고
갈라진 무수한 강줄기가
그의 살갗에 고스란히 박혀있다.
부채를 닮은 가지는
어떠한 폭풍우가 몰아쳐도
부러지는 일이 없다.
뿌리가 깊고 굵을수록
잎은 펜촉과도 같이 날카로워져
그 위상과 기백은 하늘을 찌른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푸르른가 보다.
이토록 완벽한 나무가 또 있을까.




[뮤즈: 권윤서 작가]


<소나무>

어찌 그리 머물었나 오래도록
그 향 오래 머문 자리 그리워라

사실 난 절대 못해
말도 못해도
걷지 못해도

그 욕심 없는 마음

영원히 향이 남으리...
축복해주리...






매거진의 이전글 [뮤즈 모임] '호텔'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글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