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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Jun 07. 2022

공화주의로의 성장과 더 배트맨(1)

관계와 성장을 중심으로 더 배트맨 겉핥기

더 배트맨(The Batman, 2022)(감독: 맷 리브스, 출연: 로버트 패틴슨, 폴 다노, 콜린 패럴, 조이 크래비츠, 재프리 라이트, 존 터투로, 피터 사스가드, 앤디 서키스 외)


* 이 글에는 더 배트맨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한 개인이 공화주의적 시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더 배트맨

 제가 보기에  영화는 공화주의의  공화주의적 시민으로의 성장에 관한 영화입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인 고담시 곳곳을 어둡게 비춥니다. 마치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일부러 모아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네요. 고담시가 그렇게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윤리에 관한 여러 서적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고 그에 대한 해답을 고민해보았습니다. 제가 주목한 이론은 공화주의였습니다. 보통 공화주의를 공동체에 헌신하는 시민을 강조하는 사상으로만 알고 오히려 자유주의와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사상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만, 오히려 공화주의는 비지배로서의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자의적인 지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정실주의와 같이 타인의 강요에 의한 희생과는 달리, 공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말이죠. 저는  배트맨의 배경이 되는 고담시가 개인의 권익만을 좇는 이기적인 존재들의 부정적인 측면이 응집된 곳으로 보았어요. 이기심을 조장하는 경제, 사회체제의 부작용들만이 가득한 느낌이었습니다. 고담시가 부조리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개인의 권리를 뛰어넘는 공동선을 향한 어떤 움직임이 필요해 보였죠.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법 만으로는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도시에서, 법을 초월한 하나의 목적, 즉 우리 공동체의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한 남자를 조명합니다. 바로 배트맨이죠. 극 초반의 배트맨은 복수심에 사로잡힌 어린아이 같습니다. 부모님이 살해당했을 때의 무력감을 강한 힘으로 감춰놓은 어린아이 말이죠. 그러나 일련의 사건과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의 자아는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골목길에 홀로 남아 도움을 부르짖던 아이는 이제 선량한 사람들의 선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죠.


1. 성장

브루스 웨인, 더 배트맨 스틸컷

  영화에서의 배트맨은 자경단 활동을 시작한  불과 2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직은 여러 방면에서 부족한 면을 보이는 존재입니다. 제가 생각한  영화의 핵심은 아마도 배트맨이 단순한 자경단원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영화에서는 배트맨의 성장을, 그가 제시한 상징의 의미가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보여줍니다.


 배트 시그널이 어두운 하늘에 흐릿하게 드리워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배트 시그널이 향하는 대상은 범죄자들입니다. 배트맨이 활동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일종의 “경고 의미를 담고 있죠. 배트맨 활동의 목적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범죄자들을 단죄하는 살아있는 복수입니다.  활동의 대상 역시 범죄자입니다. 따라서 영화 내내 등장하는 배트맨의 시그니처 색상인 붉은색 역시 초반에는 “복수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의 의미는 배트맨의 성장, 혹은 브루스 웨인의 성장과 함께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이론이 생각났어요.


 비트겐슈타인 언어 게임이론의 핵심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낱말의 의미란 언어 안에서의  사용이다.” 언어가 의미가 있는 것은 (그의 초기 이론과 같이)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기 때문이 아니라 게임에서 정한 규칙에 따르듯이 언어가 사용되는 세계의 다양한 삶의 양식이라는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요.  이론에 따르면 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시대적, 공간적 상황이나 맥락, 사회 분위기 등의 영향을 받은 합의로 인해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있습니다. 배트 시그널은 초반에 등장하듯 범죄자들에 대한 “경고 의미만을 지녔으나, 후에는 일반 시민들이  시그널을 보며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희망 의미를 동시에 품게 됩니다. 배트맨의 상징색인 붉은색 역시 초기에는 “복수라는 뜻을 지녔지만, 영화의 후반부,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시민들을 이끌게 되는 붉은빛은 “희망혹은 “정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고   있습니다. 배트맨의 상징하는 바가 바뀌었다는 것은 배트맨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배트맨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의  다른 페르소나인 브루스 웨인 역시 성장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여의게   그는 은둔 생활에 돌입합니다. 초반의 브루스 웨인은 웨인 사가 진행해  자선 사업을 비롯한 모든 사업과 회계 업무 등에서 완전히 손을 떼며 오로지 복수에만 몰두하는 모습만을 보입니다. 그는 배트 케이브로 돌아온 이후에도 가면을   사용하는 검은색 화장을 지우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정신은 오로지 당시 배트맨이 상징하는 “복수에만 쏠려 있다는 것을   있는 대목이죠.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창조한 복수의 화신, 배트맨이라는 자아만을 지닙니다. 브루스 웨인이라는 자아는 폐기된 상태나 마찬가지로 방치됩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배트맨에서 그려지는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는 점이 밝혀지며 그는 브루스 웨인의 자아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부분을   있는 단적인 예가 바로 아이스버그 라운지를 방문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3 아이스버그 라운지에 방문하는 데요, 처음에는 배트맨이라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가짜 흑막이었던 펭귄, 오스왈드 코블팟을 심문하기 위해 배트 슈트를 입고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화려한 존재감을 뽐내죠. 그렇지만 그때의 방문에서 그는 사건의 핵심과 관련된 것을 얻지 못합니다.  번째 방문에서 그는 브루스 웨인의 입장으로 방문합니다. 진짜 흑막인 팔코네를 만나기 위해서인데요. 그는 점점 배트맨이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팔코네와의 대화에서 의미있는 부친에 관한 숨겨진 사실을 알게  브루스는 브루스 웨인이라는 자아가 진실에 다가가는  중요한 존재일  있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에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행동하기 위해 조용히 잠입합니다. 배트맨 혹은 브루스 웨인의 외형적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아니라는 점을 상징하는  보였습니다.  과정에서 우리는 부르스가 점점 새로운 자아의 필요성을 깨닫고 조금  정교해진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있습니다. 자아가 성장한 것이죠.


 그리고 그의 이와 같은 성장은 개인의 힘만으로 이뤄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과의 직간접적인 관계를 통해 점차 성장하게 되는데요. 그의 성장을 여러 인물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2. 성장을 가능케 한 관계들

 공화주의는 공동체에서 완전히 독립된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루소의 이론과 같이, 공화주의는 공동체가 있을 때 개인이 존재한다는 입장입니다. 공동체를 벗어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듯이, 공화주의에서는 인간의 자아 역시 공동체의 전통과 맥락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개인의 자아를 이해할 때에는 반드시 그가 속한 공동체 혹은 그를 둘러싼 관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브루스 웨인의 자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1) 팔코네와의 관계

팔코네, 더 배트맨 스틸컷

 도시 암흑가의 흑막인 팔코네는 어쩌면 배트맨과는 가장 대척점에 있는 존재인 듯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손쉽게 타인을 희생시키는 그의 모습은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죠. 브루스는 그를 경계합니다. 그리고 브루스는 팔코네가 자신의 아버지와 긴밀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완전히 대척점이었던 존재가 자신의 아버지와 긴밀했다는 사실은 브루스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부르스는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은 존재로 성장하게 되는 동력을 확보하게 되죠.


 영화는 팔코네를 만난 후 아버지와 팔코네와의 진실을 알게 된 브루스가 굳게 잠겨 있던 아버지의 서재를 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사건 이후 멈춰있던, 그동안 외면해 왔던 자신의 자아 깊숙한 곳을 마주 볼 용기를 갖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브루스는 두려워하며 도망치고 벗어나고자 했던 브루스 웨인 자신의 본래 삶으로 돌아오는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2) 알프레드와의 관계

알프레드, 더 배트맨 스틸컷

 초반 알프레드와의 관계는 냉랭합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역할을 하지 않은  오랜 기간 동안 브루스의 역할을 대리하였습니다. 사업 관련 일들을 도맡아 하면서도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단지 브루스가 돌아오기만을 멀리서 바라보죠.


 브루스와 알프레드의 초반 관계는 알프레드의  등장 씬에서 쉽게   있습니다. 도시를 순찰하고 배트 케이브로 돌아온 브루스의 뒤편으로 토마스 부처의 살해 관련 뉴스가 흘러나옵니다. 브루스는 뉴스를 보기 위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알프레드가 등장하자 다시 등을 돌립니다. 토마스 부처의 뉴스와 함께 알프레드가 등장했다는 것은 알프레드가 이전까지 부모의 역할을 대리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알프레드로부터 등을 돌린 브루스의 행동을 통해 브루스는 아직 아직 부모의 빈자리로부터 오는 고통과 분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알프레드에게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있습니다. 알프레드는 실질적으로 브루스의 부모 역할을 하고 있지만, 브루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그러나 팔코네로부터 자신의 아버지와 팔코네의 관계를 확인한 후, 브루스는 이 미완인 진실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테러로 인한 부상으로 병상에 누워있던 알프레드에게 묻습니다. 팔코네의 말이 진실이냐고. 알프레드는 팔코네가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진실의 반쪽을, 토마스 웨인의 입장에서 완성시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며, 알프레드는 브루스에게 사과를 합니다. 알프레드 자신이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왔다는 점에 대해 말이죠. 그러나 이때, 브루스는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진정한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사실 그는 아직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알프레드를 잃을까 두려웠다는 사실을 말이죠. 이 대화를 통해 둘은 비로소 서로에게 솔직한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브루스는 이 관계의 회복을 계기로 마음속에 남아 있던 두려움을 극복하고 더욱 성장하게 되죠.


 3) 리들러와의 관계

리들러, 더 배트맨 스틸컷

 처음 리들러를 맞닥뜨렸을  브루스는 배트맨과 브루스 본래 자아 간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사적인 복수심에 치우쳐진 모습들을 많이 보여줍니다. 그가 행하는 일들은  그대로 자경단 활동임과 동시에 복수를 위한 폭력 행위였습니다. 초창기 배트맨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드러냅니다. “나는 복수다.”, 그리고 “공포는 도구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아의 형태는 리들러 역시 동일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고든 청장의 물음에 리들러의 수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수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리들러의 희생양들을 통해 리들러는 “공포가 도구라는 것을 그대로 이용합니다. 리들러는 애초에 브루스 웨인이 고담시에 주고자 했던 방향성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브루스의 균형 잡히지 못한 자아로 인해 리들러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  생각입니다. 초창기의 브루스 웨인은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의 자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배트맨이라는 자아에만 몰두하였기에, 브루스 웨인이라는 자아를 소홀히 하였기에 그는 아버지 토마스 웨인의 재개발 비용이 눈먼 돈이 되어 부패한 자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재개발이라는 희망고문을 당한 리들러는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만약 브루스가 자신의 자아에 충실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면, 리들러와 같은 희생양은 등장하지 않았을  있습니다. , 브루스가 브루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아 리들러가 탄생하게  것이죠.


 그리고 배트맨이라는 자아로 인해 리들러가 리들러로서 성장했다는 것이  생각입니다.  2  배트맨이 등장하여, 복수를 행하고 공포를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에서 리들러는 영감을 얻게 됩니다. 리들러 자신만의 복수를 위해서는 위와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것이죠. , 리들러가 리들러로서 각성하게  것은 브루스가 배트맨이라는 역할만을, 그것도 잘못된 방식으로 상징을 활용하여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브루스 웨인의 자아가 균형을 잡고 있었다면, 재개발 비용이 제대로 사용되었을 것이고, 배트맨 활동 역시 단순히 복수와 공포만을 사용하는 존재는 아닐  있었을 것입니다.  자아의 불균형이 어쩌면 모든 일의 시작일  있다는 것이 저의 해석입니다.


 리들러가 배트맨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점은 여러 씬들에서 확인할  있습니다.  첫씬,  리들러가 고담 시장을 몰래 관찰하는 씬은, 뒤에 브루스가 셀리나 카일을 바라보는 씬과 거의 동일합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 그가 사용한 방법은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분노한 소외 계급의, 공포라는 도구를 이용한 복수였습니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리들러와 배트맨의 관계를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은 구도로 그려냅니다. 실제로 취조실 장면에서는 유리를 사이에 두고  사람이 대치하게 되는데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서로 거울을 보는 듯하게 비칩니다. 물론 배트맨의 방향성과 리들러의 방향성은 조금은 다른 방식이었지만, (그래서 카메라 역시  둘의 이미지를 완전히 동일 선상에 놓진 않았지만) 배트맨의 방법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다면, 배트맨도 리들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합니다.


 따라서 브루스는 리들러와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적 복수는 결코 정의로움이 될 수 없다는 것, 악인들에 대한 공포는 결코 고담 시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죠. 그는 정의(正義)를 다시 고민하게 됩니다. 그는 배트맨의 정의는 사적 복수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4) 셀리나 카일과의 관계

셀리나 카일, 더 배트맨 스틸컷

 셀리나 카일은 어둠과 , 악과 선의 경계선에 있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범죄 소굴에서 일하고, 범죄를 머뭇거림 없이 저지르며 언제든 선을 넘을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편으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이런 이중성을 통해 브루스는 흑백논리로부터 점차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셀리나와의  만남과  번째 만남을 통해 우리는 브루스의 셀리나가 좁힐  없는 차이를 지녔다는 것을 확인할  있습니다. 브루스가 배트 슈트를 입고 아이스버그 라운지로 갔을 , 셀리나는 평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반대로 셀리나가 캣우먼 슈트를 입고 있을 당시 브루스는 평상복 차림으로 그녀를 지켜봅니다. 이처럼 가면을 썼을 때의 모습이 진정한 자신인  사람이 처음 만났을때에는  명은 진실된 자아로 다른  명은 거짓된 자아로 만났다는 점을 통해 엇갈린 그들의 방향성을 보입니다. 그러다 그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  둘은 가면을 쓰고 있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서로를 인지합니다. 그리고  둘은 이후로 계속 가면 혹은 슈트를 통해서 서로를 진실하게 대합니다. 때로는 서로를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를 도와주면서 말이죠.


 브루스와 셀리나의 관계는 이처럼 공통된 면과 다른 면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셀리나는 브루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어머니를 여의고 분노에 사로잡혀 복수를 꿈꾸는 모습을 보입니다. , 어머니를 잃고 분노하고 있다는 중요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브루스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세상을 떠났지만, 셀리나의 아버지는 오히려 어머니를 죽인 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셀리나는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 팔코네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려 하죠. 또한 계층적인 측면에서 둘은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고담시의 최고 부자인 브루스와 고담시의 하층민인 셀리나. 셀리나를 통해 브루스는 가장 가난한 자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부당한 방식으로 자본을 독차지하는 상류층에 대한 그녀의 분노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선을 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에 팔코네 밑에서 일하는 경찰을 붙잡고는 당장 죽여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이를 통해 브루스는 만약 자신이 분노에 압도되면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를 셀리나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셀리나와의 관계를 통해 브루스는 계급 관계에서 오는 부조리함을 이해하였고, 개별 범죄자보다 사회 시스템에 문제가 있을  있다는 점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스템의 문제로 파생되는 범죄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매일매일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매번 벌어지는 범죄라는 고담의 생채기를 치료하는 것보다, 고담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부당한 시스템을 회복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시민들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브루스가 바이크를 타며 사이드 미러를 보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그가 자경단 활동을 마치고 배트 케이브로 돌아갈 때 멀어져 가는 고담시를 바라보는 장면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가 고담시를 향해 나아갈 때 멀어져 가는 셀리나의 바이크를 바라보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사이드 미러에 비친 모습과 브루스가 향하는 방향, 두 가지로 나누어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먼저 브루스가 향하는 방향은 말 그대로 그의 자아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지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바이크 씬에서 그가 향하는 곳은 그가 자신만의 정의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보금자리입니다. 즉 그의 자경단으로서의 행위 자체는 고담시를 위한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행동은 고담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수를 실현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것이죠. 사이드 미러에 비친 고담시는 점점 멀어져 가는데요, 고담시를 지킨다는 명분은 존재하지만 정작 그는 고담시 내부의 추악한 진실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 번째 바이크 씬에서 그가 향하는 곳은 고담시 전체입니다. 비로소 그는 성장하여 고담시의 공동선을 위해 희생할 준비를 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도 그의 사이드 미러는 셀리나를 비춥니다. 셀리나를 통해 그는 자아의 성장을 얻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사랑이란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사랑의 감정보다 고담시를 위한 공동선을 선택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멀찍이 떠나보내면서 고담시의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약간의 미련을 남긴 채 말이죠.


공화주의로의 성장과 더 배트맨(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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