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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Jan 18. 2023

공감과 사랑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나딩스의 배려 윤리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겉핥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출연: 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제이미 리 커티스 외)     


* 이 글에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멀티버스 개념을 차용한 코미디 액션 영화로 홍보되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기에 궁금해졌고, 학기 말 바쁜 와중에도 이 영화를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영화를 다 본 후 예상치 못한 감동에 한동안 여러 생각들이 많았습니다. 영화를 보며 제 평소 생각과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다른 영화를 제쳐놓고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공감적 이해와 그에 따른 배려를 강조한 배려 윤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아주 효과적이며 인상 깊은 방식으로 전달한 것 같습니다. 이에 거시 담론과 미시 담론, 등장인물들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들과 그에 따른 에블린의 변화, 그리고 나딩스의 배려 윤리를 중심으로 이 영화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거시 담론과 미시 담론


 우리는 수많은 거시 담론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팬데믹 상황, 전쟁으로 인한 스테그플레이션, 이를 막기 위한 금리 인상, 유럽에서의 전쟁과 국내외 여러 정치적인 이슈들 등, 이 세상에는 수많은 거시 담론들이 있습니다. 이 거시 담론은 그 크기와 체계성에서 우리를 압도하며 따라서 우리는 그 거시 담론이 중요하다고 인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거시적인 담론들의 틈새에서 자신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은 거시 담론과 대비되는 미시 담론입니다. 거시 담론 앞에서 우리의 미시 담론은 흔하고 시시콜콜하며 하찮아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두 개의 거시 담론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에블린의 세탁소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세무조사, 다른 하나는 멀티버스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는 조부 투파키의 위협. 사실 어른들의 입장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전자에 해당될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 이것이 진실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자체가 무너질 수 있는 존재론적으로 너무나 거시적인 담론입니다. 그리고 그 거시 담론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은, 인생의 기로에서 가장 최악의 선택만을 반복해 온, 평범한 중국인 이민자이자 세탁소 사장인 에블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영화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IRS, 미 국세청이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또 다른 주요 배경인 세탁소가 에블린의 가장 사적이고 미시적인 담론이 펼쳐지는 곳이라고 한다면, 국세청은 공적이고 거시적인 담론이 주로 이야기되는 곳입니다. 세무조사는 에블린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업 중 하나입니다. 이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에블린은 지금껏 힘들게 쌓아놓은 모든 것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영화의 각 파트가 시작되는 장면이 영수증을 정리하는 장면이라는 점이 이를 나타내는 듯 보입니다. 식탁이라는 가장 사적인 가구 위에 정신없이 늘어선 영수증들이 에블린의 모든 시야를 가립니다.


 또 다른 거시 담론은 멀티버스의 위기입니다. 세무조사의 위기가 한 사람의 삶의 위기라고 한다면, 멀티버스의 위기는 멀티버스를 이루는 모든 인류의 위기로 보입니다. 세무조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멀티버스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세무조사와 멀티버스의 위기라는 거시 담론들은 에블린에게 ‘지금 이 일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느냐’며 각자의 중요성을 설파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화 중간중간에 조금씩 드러납니다. 모든 멀티버스에 접속할 수 있게 된 에블린은 여러 세계에서 다양한 능력들을 빌려와 사용하는데요. 영화배우이자 무술 수련가인 에블린에게서 수준급의 무술을, 요리사 에블린에게서 묘기 수준의 나이프 기술을 빌려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능력은 바로 간판을 돌리는 기술이었습니다. 사실 간판을 돌리는 기술은 하찮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소한 것도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즉 내가 삶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으로 인한 나의 삶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삶이라는 의미를, 다른 한 편으로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주 사소하게 여기는 사람 혹은 순간 역시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거시 담론적인 관점이 없으면 현실을 살 수 없습니다. 사회, 정치적인 제도의 변화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이를 반증합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거시 담론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이 영화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말미에서 멀티버스의 위험이라는 거시적인 위기는 결국 가족의 위기라는 가장 미시적인 사건을 확대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클라이맥스에서 돌이 되어 굴러 떨어진 조이를 향해 돌이 된 에블린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집니다. 그리고 돌이 된 조이와 에블린이 부딪히는 모습이 동시에 행성과 행성이 부딪히는 모습처럼 묘사가 되었고, 그것은 다시 두 모녀가 서로를 꼭 껴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미시 담론이 거시 담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영화의 중요한 문제가 어찌 보면 가장 공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공간인 국세청에서 시작되며 그 문제의 해결이 가장 사적인 공간인 집(세탁소) 앞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감독과 각본가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있는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베이글과 눈알, 그리고 에블린     

조이와 베이글

 조이가 첫 등장할 때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세탁기 안에서 한없이 돌아가고 있는 세탁물입니다. 이는 후에 등장하는 베이글의 모습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조이(Joy)는 이름의 뜻과는 달리 기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여자 친구를 포함하여 가족을 상징하는 타투까지,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어머니로부터 어떠한 공감도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공감을 얻고 싶어 합니다. 자신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녀는 엄마를 따라다니지만, 엄마는 기다릴 시간이 없다며 떠나버립니다. 조이가 에블린을 따라 2층 집으로부터 1층 세탁소로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조이가 에블린과 함께하고 싶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탁소에서의 대화에서 공감을 얻는 데 실패한 조이는 에블린을 떠나기에 이릅니다. 이와 같이 함께 하강하는 이미지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돌이 되어 떨어지는 조이를 향해 함께 굴러 떨어지는 에블린의 이미지로 다시 등장합니다.


 후에 조부 투파키가 된 조이는 국세청에서 에블린을 다시 찾아옵니다. 이번엔 모든 멀티버스를 경험한 자신을 공감해 달라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에블린을 베이글이 있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이때의 베이글은 마치 블랙홀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요. 조부는 그 베이글 위에 모든 것(Everything)을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 성적표까지, 그녀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그야말로 모든 것들을 말이죠. 그리고 그 베이글의 한가운데에 세무조사관이 동그라미 친 영수증까지 딸려갑니다. 이 영수증에 쓰인 항목은 가라오케 머신입니다. 후술 하겠지만, 가라오케 머신은 에블린 가족이 함께 행복했던 순간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순간까지 모두 잡아먹는 거대한 블랙홀. 저는 이 베이글이 일종의 우울감 혹은 우울증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가치 없다는 판단, 그리고 그 베이글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 하는 행동 모두 우울증의 증세인 무가치감과 자살에 대한 생각, 비관적인 사고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조이는 모든 색을 없애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이라는 형상으로 상징되는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의 색을 빼앗고 침전하게 만드는 일종의 우울감 / 출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러한 우울감을 없애주는 것은 공감과 사랑입니다. 조이를 없애려는 에블린의 아버지, 공공의 위협으로부터 숨은 비밀의 방에서 에블린은 조이에게 이야기합니다.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말이죠. 이 말을 들은 조이는 비로소 자신이 공감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에블린의 말을 경청합니다. 물론 그 뒤에 모든 것이 조부 투파키 때문이라는 에블린의 말에 실망하긴 했지만, 사실 그 말은 그동안 조이가 에블린에게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조부 투파키 조차 모든 멀티버스를 이해하게 된 에블린에게, 내가 느끼는 걸 느끼는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그녀 역시 공감적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죠.


 물론 사랑과 공감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영화에서는 돌이 된 조이와 에블린의 모습을 통해 상징합니다. 돌은 우리의 자아를 둘러싼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타인의 내면을 완벽하게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상대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실은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대화(특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대화)와 감정의 교류가 필요할 것입니다. 만약 그런 시간이 많아진다면, 우리는 완벽하진 않아도 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돌이 된 조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이 돌에 갇혀 있었다고 말이죠. 그렇지만 공감적 이해가 가능해진다면 결국 딱딱하게 굳은 돌은 깨질 것입니다.      


웨이먼드와 눈알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의 장난기를 보여주는 장난감 눈알은 영화의 시작부터 있었습니다. 각 파트는 에브린이 세무조사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에블린이 정신없이 영수증을 정리하는 와중에 그녀의 우측 상단 세탁물에 장난감 눈알이 익살스럽게 붙어 있습니다. 극 초반 그녀는 그 눈알들을 보며 짜증을 냅니다. 눈알은 에블린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과업을 수행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장애물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블린에게 있어 웨이먼드는 눈알과 마찬가지인 존재였습니다. 웨이먼드는 시키는 일을 완벽하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웨이먼드는 현실적인 과업을 수행하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귀찮게 여기는 에블린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반면 에블린의 눈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과업들에 가려져 웨이먼드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에블린을 향해 웨이먼드는 계속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이혼 서류는 에블린과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웨이먼드의 마음이 담겨 있었으며, 이혼 서류 뒤쪽에 알파 웨이먼드의 지시사항 역시 에블린과 소통하고자 하는 알파 웨이먼드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영화 말미에서 이 눈알의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크게 두 가지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첫 번째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오는, 제3의 눈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제3의 눈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의 깨달음 상태를 일컫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현실적인 과업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거시 담론과도 연결되는데요. 현실적인 과업들은 정말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목적이라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 혹은 수단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조건만 갖춰졌다고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 전제하며 당장 주어진 과업들에 치중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블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멀티버스 속 웨이먼드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생각이 바뀐 것 같습니다. 성공한 세탁소 사장인 세계에서, 경찰에 붙잡혔던 에블린을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웨이먼드였습니다. 에블린은 웨이먼드가 가지고 있던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하며 웨이먼드의 가슴에 큰 상처를 주었음에도, 웨이먼드는 에블린이 깨뜨린 창문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청소합니다. 심지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세계에서의 웨이먼드는 에블린의 손에 있던 유리조각으로 찔렸음에도 그녀를 두둔합니다. 이때 그녀는 현실적인 과업보다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블린과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웨이먼드 / 출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눈알의 두 번째 의미는 공감입니다. 이때의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공감입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상황만을 생각해 보는 경우를 공감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라면 너 같은 상황에서 너처럼 안 할 것 같은데?”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지만 그건 공감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짜 공감은 상대방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고 상대방이 그 상황을 나와는 달리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해 보는 것까지를 의미합니다. 웨이먼드의 눈알을 자신의 이마에 붙인 에블린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상대방의 입장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관점과 공감을 나타내는 웨이먼드의 눈알 / 출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베이글과 눈알과 에블린

 에블린은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는 인물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그녀의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아들을 원했던 공공은 에블린이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에블린을 탐탁잖게 여겼습니다. 즉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모두 희생하면서 살아왔기에 매사가 스트레스처럼 다가옵니다. 또한 세탁소 운영이라는 현실적인 과업을 혼자 도맡다시피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남편은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생각되고, 하나밖에 없는 딸은 자신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그녀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녀는 조이의 관점과 웨이먼드의 관점을 모두 이해하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에블린이 처한 현실은 타인을 공감할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결국 상대에게 공감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때의 공감은 앞서 이야기했듯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타인의 행동은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영화에는 현실에서는 하지 않을 만한 이상한 행동을 할 때 멀티버스를 이동하여 능력을 가져올 수 있는, “버스 점프”가 가능하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타인의 이상한 행동까지도 이해하는, 일종의 공감의 행위처럼 보였습니다. 영화에서는 현실에서의 이상한 행동이 다른 우주에서는 정상적인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에블린의 첫 버스 점프대는 신발을 다르게 신는 것이었습니다. 영미 문화권에서 타인을 공감하라는 말은 “Put yourself in someone else’s shoes”로 표현합니다. 즉 신발을 다르게 신는(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는) 행위가 어쩌면 공감의 첫 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점프대는 디어드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세계에서 디어드리는 에블린에게 있어 적대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서 그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세계에서 에블린이 디어드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이를 사람과의 관계에 대입해 설명해 본다면, 타인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인식체계를 지니며 살아가는, 나와 같은 현실을 공유하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자연스러운 행동이 타인에게는 이상할 수 있고, 타인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행동이 나에게는 이상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공감은 그러한 다름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에블린은 버스 점핑을 계속하며 공감을 밀고 나갑니다. 에블린의 행동에 당황한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선’을 넘은 것 아니냐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에블린은 아직 충분히 넘지 않았다고 답합니다. 이때의 ‘선’은 자아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선을 넘는다는 것은 존재의 경계를 넘어 그 사람을 공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공감을 계속하면서 에블린은 점차 변화합니다. 그녀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조부 투파키’라는 이름입니다. 그녀는 알파 웨이먼드로부터 그 이름을 듣고 이를 제대로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버스 점프, 즉 공감을 하며 그녀는 마침내 ‘조부 투파키’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에블린이 나와 다른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타인을 제대로 공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에블린은 드디어 자신의 가족과도 공감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그녀는 자신의 딸인 조이, 조부 투파키의 심정에 공감합니다. 모든 멀티버스를 깨닫고 모든 것이 통계적 필연성일 뿐이라 말하는 조이. 그리고 그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에블린. 에블린은 그녀에게 공감하고, 그녀와 같은 회의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돌이 된 세계에서 서로 진심 어린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대화에서 조이는 에블린에게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에블린이 보고 다른 길도 있었다고 납득시켜줬으면 했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에블린은 자신의 현재 상황(아마도 우울증으로 고생하는)을, 엄마가 해결해 주길 내심 바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자신과 같은 회의감에 사로잡힌 엄마를 보며 한탄할 수밖에 없었겠죠. 대화를 나눈 후 둘은 조부 투파키가 만든 베이글을 바라봅니다. 모든 색이 사라진 무채색의 베이글. 그 위의 모든 것은 색, 즉 개성을 잃고 무가치하게 변질됩니다. 그리고 조이와 에블린은 베이글 안으로 들어가, 모든 무가치함 속에 침전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자 합니다.

에블린이 조이를 진심으로 공감하기 시작한다 / 출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그러나 그때 에블린은 무채색의 베이글에서 눈을 돌려 웨이먼드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웨이먼드의 사랑을 이제야 공감합니다. 그녀가 웨이먼드의 사랑을 깨닫고 그와 진정으로 마주했을 때 그들 사이에는 수많은 빛깔들이 넘쳐났습니다. 모든 것이 무가치했던 그녀는 반대로 모든 것이 가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웨이먼드의 눈알을 바라보며, 짜증 나고 나를 방해하던 눈알이 아닌, 웨이먼드의 긍정적이고 장난기 어린 사랑을 담은 눈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이마 한가운데에 놓습니다. 마치 제3의 눈이 형상화되듯이 말이죠. 이제 그녀는 그 눈을 통해 모든 사람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에블린은 싸움 대신 공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평생 괴롭혀왔던 아버지와의 관계도 극복하기 시작합니다. 에블린은 아버지와 대면하여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우리가 엉망이어도 괜찮다고. 자신의 부족함을 매워 줄 너그러운 사람을 우주가 보내줄 것이라고 말이죠.


 그렇게 각성한 에블린은 조이와 최후의 결전을 펼칩니다. 조이는 싸우려 하고 에블린은 그런 조이를 안아주려고 합니다. 조이는 갑자기 이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은 무시할 거냐며 반문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데 왜 그런 곳으로 가지 않느냐고도 묻죠. 이 물음은 사람의 관점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고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조이의 관점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에블린이 꿈꿔온 일들, 즉 에블린이 가족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던 일들은 가족을 포기하면 이룰 수 있다는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에블린은, 지금 주어진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길 것이라 답합니다. 즉 자신의 삶의 중심을, 현실적인 과업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시간으로 옮길 것이며, 꿈꿔왔던 것을 포기하는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그 순간을 즐길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가족을 선택한 결과를 운명으로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임과 동시에 내 삶의 우선순위를 소위 말하는 현실적인 과업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두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선언과 함께 에블린은 베이글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조이를 있는 힘껏 붙잡습니다. 마치 자기 아이의 자살을 막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고 힘에 부친 에블린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에블린을 못마땅해하던 아버지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웨이먼드였습니다. 이렇게 온 가족이 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이를 우울증 혹은 자기 소멸로부터 구해냅니다.     




나딩스, 배려윤리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품 중 하나가 바로 가라오케 머신입니다. 영화는 집안 작은 거울 안에 에블린 가족이 모두 모여 가라오케 머신을 통해 행복한 시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극 초반 세무조사를 준비하던 에블린은 가라오케 마신을 산 영수증을 어디로 분류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립니다. 국세청에서 세무조사원 디어드리가 특별히 베이글 모양으로 표시한 영수증 역시 가라오케 머신에 대한 영수증입니다. 그리고 조이가 “모든 것”을 올려놓은 그 베이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역시 가라오케 머신 영수증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이 가라오케 머신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삶에서 정말 중요한 가족과의 사랑/ 출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가라오케 머신은 에블린 가족이 거의 유일하게 ‘함께’ ‘행복하게’ 지냈던 순간을 의미합니다. 즉 가족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극 초반의 에블린은 가족의 행복보다 자신 앞에 주어진 현실적 과업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 과업들 사이에서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향유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조이, 그리고 웨이먼드의 입장이 되어보면서, 그녀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꿈을 이루는 것도, 세무조사를 잘 받는 것도 아닌, 가족에 대한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영화의 말미에 그녀는 가라오케 영수증을 망설이지 않고 책상 한가운데에 올려놓습니다. 이제 그녀 삶의 중심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감을 토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에블린의 모습에서 저는 미국의 철학자 넬 나딩스(Nel Noddings, 1929-2022)의 배려윤리가 떠올랐습니다.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 1936-)의 배려윤리를 계승 발전시켜, 기존 남성 중심주의적이었던 윤리와 대비되는 여성의 윤리를 제창한 나딩스는 모든 윤리적인 행위는 단순히 ‘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에만 의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자식에게 행하는 무조건적인 헌신을 배려의 원형이라 칭하며, 이와 같이 윤리적 행위는 상대방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감정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행위는 세 가지의 단계를 거쳐 진행되는데요. 가장 첫 번째 단계가 바로 공감입니다. 즉 피배려자가 어떤 상황인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등에 대한 공감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그 사람의 필요를 파악하는 것이 윤리적 행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윤리학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이 내려졌다면 상대방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조건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도움을 원치 않음에도 도움을 주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마치 에블린이 조이에게 하는 잔소리와 같이, 그 사람의 상황에 대한 이해 없는 조언 혹은 도움은 오히려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배려 행위의 실천입니다. 이때의 배려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피배려자가 필요로 하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윤리학에서는 이 단계에서 도덕적 행위가 종료됩니다. 내가 도움을 준 피배려자의 반응은 기존 윤리학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딩스는 세 번째 단계, 즉 배려 관계의 완성이 있어야 비로소 윤리적 행위가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배려를 받은 사람이 배려 행위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함으로써 따뜻하고 배려적인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진정한 윤리적 행위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로 돌아와서, 에블린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한 인정, 그리고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해 남성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딸을 대할 때에도 딸에 대한 공감보다 잔소리가 먼저 나왔습니다. 물론 이때의 잔소리 역시 조이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조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사실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모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에블린의 입장에서 공감까지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엄마로서 에블린이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려던 조이를 붙잡고 끌어안았을 때, 공감해 주고 함께 울어주었을 때 조이는 비로소 에블린의 사랑에 반응하였습니다. 즉 이 영화는 에블린의 조이에 대한 공감, 공감적 이해에 바탕을 둔 윤리적 행위, 그리고 그 행위를 보고 베이글 속으로 거의 들어갔던 조이가 에블린에게 손을 내미는 반응을 통해 배려관계가 완성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과 공감은 우리 마음 안에 있던 벽을 무너뜨립니다. 사랑에 반대되는 미움은 나와 타인 사이에 선을 그으면서 시작합니다. 반면 사랑은 나의 경계를 없애고 타인과 내가 한 마음이 될 때 가능합니다. 사랑은 타인을 자신과 다른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에블린은 자신과 조이를 가로막은 사람들을 적이 아닌 한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조이 역시 물리쳐야 하는 악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줘야 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자 에블린을 가로막던 사람들, 그리고 에블린에게 적대적이었던 조이는 모두 사랑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가족, 나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 친구 등등. 내가 외롭다고 느껴질 때에도 누군가는 날 염려하고, 생각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해 보고자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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