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 이성과 사랑이란 키워드로 인터스텔라 겉핥기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매튜 맥커너히, 앤 해서웨이, 마이클 케인, 제시카 차스테인, 매켄지 포이 외)
* 이 글에는 인터스텔라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대중 매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재는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싶네요. 그만큼 사랑이라는 가치는 쉽게 접할 수 있고 또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겪으며, 몇몇 사람들은 “사랑이란 진부한 것이다.”라고 단정 짓는 것 같기도 하네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살기도 팍팍한 이 삶 속에서 사랑은 사치라는 말까지 돌고 있습니다. 참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과학적 이론을 전면으로 내세워 역설적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이야기한, 인터스텔라입니다. 처음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에는 최첨단의 물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한 영화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마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과학적 이론으로 포장했지만 결국은 진부한 사랑이야기라고 평가하신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가 영화 문법적으로 얼마나 현실과 이상, 이성과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이 영화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에 지니고 있는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영화는 머피의 책장을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책장 한편에는 우주선 모형들이 놓여 있고, 그 위로 먼지가 조용히 쌓이고 있습니다. 이때의 먼지는 현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내에서는 먼지로 인해 인간들이 질식하고 있는 잔혹한 현실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한,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할 때 맞닥뜨릴 수 있는 일종의 시련과도 같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먼지에 쌓인 우주선은 그와 같은 현실의 어려움을 뚫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 희망, 이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영화 초반의 우주 사업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사실상 쓸모없는, 비현실적인 어떤 것처럼 묘사됩니다. 현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상은 뜬구름을 잡는 소리처럼 여겨지죠.
이와 같은 이상과 현실의 대비는 악몽에서 깬 쿠퍼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쿠퍼는 과거 나사에서 우주 비행사 훈련을 받았습니다만, 알 수 없는 중력 이상 현상으로 인해 훈련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의 침대는 어두컴컴합니다.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는 어둠 속에서 홀로 잠에서 깹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침실에서 딸인 머피와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어두운 침실을 뒤로하고 햇살이 비치는 창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먼지에 뒤덮인 옥수수밭이 늘어서 있죠.
저는 이때의 어둠을 이상으로, 빛바랜 해가 비치는 옥수수밭을 현실로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어둠은 불확실성을 나타냅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이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다고, 혹은 더욱 낫다고 여겨지는 이상은 실제로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날지 알 수 없습니다. 불확실성을 띠고 있죠. 그리고 그런 어둠에 있을 때 딸과 대화를 했다는 측면에서 딸인 머피 역시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현실은 우리에게 뚜렷하게 드러나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합니다. 다만, 그 현실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우리는 나름 평등하고 민주적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비상식적인, 혹은 부당한 일들이 보란 듯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현실은 확실하지만 불완전하고, 이상은 불확실하지만 완전함을 지향합니다. 쿠퍼의 등 뒤에는 어둠이, 즉 불확실한 이상이 있고, 그의 눈앞에는 햇살이 옥수수 밭, 즉 확실한 현실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보다는 이상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두 아이와 장인어른을 모셔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해있습니다. 그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농사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의 고뇌가 창문 밖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그의 성향은 그의 아들과 딸에게 양분되듯 드러납니다. 그의 아들은 현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는 아버지의 현실적인 측면을 존중하고, 그에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반면에 딸은 이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상적인 측면을 존중하고,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러한 측면은 초반, 드론을 따라가는 씬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쿠퍼가 드론을 발견하자, 쿠퍼는 차의 방향을 길이 아니라 옥수수 밭으로 바꿉니다. 이 옥수수 밭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옥수수 밭을 해치는 모습은 마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서 카메라는 옥수수 밭을 해치는 쿠퍼와 아들을 한 앵글로 담습니다. 옥수수 밭이라는 주어진 상황에 집중하는 아들은 현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반대편 앵글에서는 딸인 머피 혼자 창문 밖 하늘 위의 드론을 바라봅니다. 이상을 좇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운전대를 아들에게 맡긴 쿠퍼는 아들과 딸 사이에서 드론을 잡기 위해 노트북을 켭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합니다.
현실을 상징하는 옥수수 밭을 지나 넓은 하늘과 물이 있는 절벽에 다다릅니다. 하마터면 그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합니다. 드론은 새로운 이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요, 그러한 이상에는 희망과 동시에 불확실성으로 인한 위험도 공존합니다. 따라서 항상 현실을 바탕으로 이상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들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담당했다면, 딸은 이상을 좇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드론을 조종해 봅니다. 현실과 이상의 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만을 좇다가 현실을 경시하게 될 경우 우리는 당장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현실만을 좇으며 이상을 경시하게 될 경우 우리는 나아질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현실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돌아갈 것이니까요. 그리고 누군가는 이상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 더욱 나아질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쿠퍼는 아들과 딸을 각자의 특성에 맞게 양육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의 지향점은 이상이기에 자연스럽게 스포트라이트는 딸인 머피가 받고 있지만, 사실 쿠퍼는 둘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쿠퍼는 교사 면담을 통해 아들은 훌륭한 농부가 될 것이라는 교사의 말에 발끈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자신은 아버지를 닮은 훌륭한 농부가 되고 싶다고 말을 하자, 그를 격려하는 모습에서 그는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딸인 머피에 대한 사랑은 영화 내에서 잘 나오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과 이상에 대한 쿠퍼의 속마음은 집 앞 의자에서의 대화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맨 처음 장인과 나란히 앉은 쿠퍼는 밝은 낮에 먼지 쌓인 창들을 뒤로한 채, 확실하게 주어진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답답한 현실에 분개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한다는 점에 체념하고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그는 어두운 밤에 먼지가 닦인 창틀을 뒤로한 채, 이상을 상징하는 새로운 어둠(우주)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를 두고 장인과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 무사히 쿠퍼 스테이션에 도착한 후, 자신의 집을 복원해 놓은 곳 창가에서 어둠과 빛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바깥을 바라보며 타스와 대화를 할 때에 그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다며 브랜드 박사를 향해 나아갈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상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이죠.
흔히 현실주의자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이상이 높다 하더라도 현실의 벽은 그것보다 높은 것이며, 현실에 적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고 말이죠. 그렇지만 이와 같은 현실 역시 과거에는 이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은 가치에 대한 이상을 지닌 사람들의 움직임과 연대가 있었기에 그 이상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현실에만 안주한다면 우리는 더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상을 이야기하고 이상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현실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영화는 이성과 사랑이라는 두 가치를 대비되는 성격으로 상정한 후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쿠퍼는 이성과 사랑이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영화 내에서 이성과 사랑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영화에서는 사랑을 중력에 비유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영화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인 중력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쿠퍼와 머피가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영화 초반, 트랙터들이 쿠퍼의 집 앞으로 모이는 중력 이상 현상을 보이는데요. 중력으로 인해 트랙터들이 모인 모습에서 저는 사랑은 만물을 모이게 한다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BC 490? ~ BC 430?)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즉 중력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통합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중력이에요”라는 브랜드 박사의 대사를 통해 이 영화에서는 중력을 중요하게 다룰 것임이 드러남과 동시에 중요한 소재인 사랑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쿠퍼와 머피를 만나게 합니다.
반면, 이성은 통합되어 있는 전체를 분석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서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이성은 상황을 분석하고, 장단점을 따지는 과정에서 이른바 “합리적인 선택”, 즉 기회비용 대비 편익이 높은 선택을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버마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와 같은 이성을 도구적 이성이라 칭한 바 있죠. 물론 모든 종류의 이성이 이렇지는 않습니다만, 영화 내에서는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한정 지어 묘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극 중 쿠퍼는 집으로 돌아갈 연료 문제를 계산하며, 만 박사와 에드먼즈의 두 행성 중 어느 한 곳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브랜드 박사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한 사랑의 위대한 힘을 언급하며, 에드먼즈의 행성으로 가자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쿠퍼는 만 박사의 데이터가 확실하기 때문에 에드먼즈 박사의 행성으로 가는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만 박사의 행성으로 향하는 선택을 합니다. 적은 기회비용을 들여 최대의 편익을 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죠.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쿠퍼의 앵글과 브랜드의 앵글을 대비하듯 잡습니다. 마치 쿠퍼가 도구적 이성을 대표하고 브랜드가 사랑을 대표하듯 말이죠.
또한 사랑은 서로가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사랑을 통한 소통과 이해를 강조합니다. 쿠퍼가 머피를 떠나기 전, 쿠퍼는 처음 문틈, 즉 선을 통해 머피와 대화를 시도합니다. 이는 영화 후반, 쿠퍼가 블랙홀 안 5차원의 세계에서 머피와의 대화를 위해 책장 틈으로 선을 활용한 메시지를 보내는 형태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후 쿠퍼는 문틈을 열고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지나 머피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때 머피는 너무 큰 상실감으로 인해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쿠퍼는 그녀와 대화를 계속하고자 하면서 시계를 꺼내 듭니다. 그리고 후반부 그는 그 시계를 통해 세상을 구할 방법을 머피에게 안내하죠. 즉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상대방과 서로 소통할 수 있게끔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언어적, 비언어적인 소통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사랑하는 상대방의 입장과 마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이나 작은 행동만 보아도 그 사람의 기분과 현재 상태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가진 소통의 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면 도구적 이성은 종종 소통하는 것을 막습니다. 왜냐하면 합리적 선택에는 소통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합리적인 계산만이 의사 결정에 반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이 인간의 이기심과 만나게 되면, 비도덕적 행동마저 합리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 박사의 데이터는 거짓이었습니다. 만 박사는 자신에게 다가올 구조대의 비행선을 탈취하여 살아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로밀리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인듀어런스 호를 탈취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인듀어런스호와 도킹하지 말라는 쿠퍼의 소통을 일방적으로 끊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소통이나 연대가 아닌 자신의 독자적인 행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 행동이 합리적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죠. 사랑에서 소통과 연대를 강조하는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맹목적이지 않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여나 상대방이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믿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내에서는 사랑에 대한 감독(혹은 작가)의 입장을 브랜드 박사의 대사를 빌어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에요.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죠.” 앞서 언급했던, 어둠이 역설적으로 희망을 상징한다는 부분과 이 부분을 연결 지어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브랜드 박사의 아버지, 로밀리, 만 박사 모두 중력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는 블랙홀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플랜 A, 현생 인류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중력 방정식을 푸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를 풀기 위한 열쇠는 우주상 가장 어두운 공간, 그리고 인류가 가보지 못한 불확실성의 공간, 바로 블랙홀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쿠퍼는 머피를 비롯한 가족들에 대한 사랑만 가지고, 누구도 가보지 못한 블랙홀 안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이는 사랑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선택이라 생각됩니다. 이미 한번 이성적 판단을 통해 실패를 경험한 쿠퍼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사랑을 믿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역설적인 결론을 내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확실한, 그리고 냉혹한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 반드시 정답인 것은 아닙니다. 불확실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강력한 힘을 믿고 불확실성으로 자신을 온전히 뛰어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가장 위대한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블랙홀 안에서 5차원의 세계에 펼쳐진 머피의 책장을 보면 쿠퍼는 결국 머피가 그 방으로 돌아오리란 믿음을 갖고, 머피에게 준 시계에 중력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열쇠를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머피는 시계를 발견하고 중력 방정식을 풀어냅니다.
반면 이성은 비판을 그 목적으로 합니다. 특히 현대 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은 모두 오류 가능성을 전제하고 끊임없는 비판을 시도합니다. 물론 그와 같은 비판을 통해 인류는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얻을 수 있었고, 미신이나 잘못된 신념을 고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성의 순기능을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는 비판적 합리주의라는 이론을 활용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이와 같은 이성이 비판적이려면 사실상 기존 이론에 대한 불신이 전제로 깔려야 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면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죠. 물론 이것 역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플랜 A가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플랜 B, 즉 기존 인류의 전멸을 전제로 새로운 식민지에서 인구 폭발을 일으키는 방법을 고안합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 브랜드 박사는 중력 방정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 즉 플랜 A는 실패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것은 만 박사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리고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플랜 A가 가능할 것이라는 거짓 희망을 탐사대원들에게 심어놓습니다. 끔찍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에서 말이죠. 이는 그들의 이성적 판단이 일정 부분에서는 불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탐사대원들에 대한 불신, 혹은 중력 방정식을 절대로 풀 수 없을 것이라는 불신 말입니다. 물론 인간의 지적 성장을 위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비판되는 대상을 수용하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서로에 대한 믿음이 바탕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서 설명했듯 영화에서는 이성과 사랑을 대비되는 개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성과 사랑, 이 두 가지 요소는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즉 이 두 요소를 모두 갖출 때 우리는 소위 말하는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떤 학자는 이성적 판단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였고, 어떤 학자는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둘을 조화시키려는 학자들 또한 있었습니다.
저 역시 이성과 사랑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저는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제가 배워온 이론들을 바탕으로 제 나름대로의 윤리관을 구성해 보았는데요. 그 윤리관의 핵심 가치가 바로 합리적 사랑입니다. 여기서 저는 사랑이란 가치에 방점을 두되, 실천적 지혜를 활용하여 상황과 맥락에 가장 타당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랑은 영화에서 브랜드의 박사의 다음과 같은 대사를 통해 잘 설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우린 너무 오랫동안 이론에만 집착해왔죠. 사랑은 우리 인간이 발명한 게 아니지만 관찰이 가능하고 강력하죠 뭔가 의미가 있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이라는 가치가 위대하게 여겨질 리는 없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한 엠페도클레스처럼, 사랑은 사람을 모으고 통합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다른 목적이 아닌 서로를 이른바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하는 진실한 소통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 연대라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이성이 없는 맹목적인 사랑은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 행위나, 연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집착과 괴롭힘 등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상황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것은 상황과 맥락에 따른 가장 적절한 실천적 지혜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랬을 때, 사랑의 정신은 단순히 근처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감싸는 연고주의로 빠지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선을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위대한 사랑이 이성의 인도를 받아 제대로만 실천된다면,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현대 사회는 사회 구조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그 원동력으로 삼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좇는 행위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국부, 즉 공동선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애덤 스미스의 핵심적인 아이디어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를 정치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사회 이론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로크는 인간의 천부인권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권리를 사유재산권이라고 천명합니다. 그의 이론에서 자유는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권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이런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듯 현대 사회구조의 전제가 개인의 이기심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이기적인 행위들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사회사상이 바로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입니다. 그들의 전제는, 개인의 권리는 공동체에 참여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므로 민주 사회의 시민은 공동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개인은 공동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개인의 이익 역시 공동의 이익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이기적인 이익의 추구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는 과거 공자의 대동사회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및 윤리학, 그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또한 공유지의 비극이나 저축의 역설이라는 사회 현상을 통해서도 이를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향하는 합리적 사랑 역시 이와 같은 공동선의 추구를 그 목적으로 합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익과 성장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보장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합리적 사랑을 추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인들만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째서인지 살기가 더욱 팍팍해졌습니다. 이기심에 기초한 경제 시스템은 개인의 이익 증진을 부추기고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는 나날이 늘어만 갑니다. 내가 살 수 있는 제대로 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이른바 영혼까지 끌어서 대출을 받아 평생 대출 이자를 갚아야 합니다. 그마저도 가능하다면 다행입니다. 단칸방에서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고 인력 사무소에서 일을 잡는 것조차 여의치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었고, 아주 좁은 기회를 잡기 위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기회를 좁은 문으로 만든 세상을 탓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번 사람을 보며 우리는 분개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미디어나 SNS는 일부 사람들의 화려한 삶의 모습만을 조명합니다. 그것과 비교해 보면 나 자신은 너무나도 초라해지죠. 그렇기 때문에 그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로 향합니다. 이른바 “~충”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면서 말입니다. 마치 오징어 게임에서 456억을 벌기 위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참가자들처럼, 오늘도 우리는 잠재적인 경쟁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랑이 갖는 강력한 힘을 믿고 있습니다. 앞서 사회구조가 이기적인 행위들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는 아주 작게나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부정의하고 혼란해도 그 속에서는 누군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는 더 나은 방향의 연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은 명확합니다. 상대방을 밟지 않으면 우리는 경쟁에서 살아갈 수 없죠. 이상은 불확실합니다. 내가 현재 주위의 사람을 믿고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믿음으로써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껏 더 나은 이상을 실현해 왔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독재 국가였습니다. 그렇지만 공동선을 향한 국민들의 믿음과 연대가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 손으로 성숙한 민주국가를 이뤄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지금은 서로를 불신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성숙해가면서, 서로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소통하면서 언젠가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어쩌면 정말 흔하고 진부한 단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족을 통해, 학생들을 통해, 동료 선생님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느낍니다. 서로를 믿어 주고 이해하며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생각하는 형태로 말이죠. 진부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대한 사랑이, 요즘 같이 어려운 이 시대에 재평가되길 바라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사랑을 통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