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행복으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겉핥기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Doctor Strange in the Multiverse of Madness, 2022)(감독: 샘 레이미, 출연: 베네딕트 컴버배치, 엘리자베스 올슨, 추이텔 에지오프, 베네딕트 웡, 소치 고메즈, 레이첼 맥아담스 외)
* 이 글에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마블 완다비전, 마블 왓이프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행복에 관한 영화이자, 사랑에 관한 영화입니다. 호러 장르를 표방한 히어로 무비에서 행복과 사랑이라니, 어찌 보면 진부하고 어찌 보면 안 어울리는 듯 보입니다만,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제 말의 의미를 대충은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의 초반부터 인간 스티븐 스트레인지(베네딕토 컴버배치 분)에게 주변 인물들은 묻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행복해?” 스트레인지는 대답하죠. “그럼.” 과연 그는 행복할까요? 아니, 과연 그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았을까요?
최근 윤리와 사상 수업에서 스피노자를 수업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인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인이었지만, 그의 독특한 사상으로 인해 26세의 젊은 나이에 파문을 당하게 됩니다. 흔히들 그의 사상을 범신론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그래서 신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파문되었습니다만) 저는 그의 사상을 사랑과 행복의 윤리학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성장을 설명하면서 말씀드릴게요.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닥터 스트레인지는 행복하였을까요? 그의 성격은 닥터 스트레인지(2016)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오만하고 독선적입니다. 그는 자신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그 이유가 이번 영화에서 드러나죠. 자신이 구하지 못해 발생한 동생의 죽음, 그와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나서야 한다는 건데요. 그는 겉으로는 오만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여리고 겁이 많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그가 사랑하는(비록 다른 우주의 존재이긴 하지만) 크리스틴 팔머(레이첼 맥아담스 분)에게 고백하는 바와 같이 말이죠. 그래서 저는 극 초반의 그가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하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혹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후 영화에서는 그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행복과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과연 영화에서는 이 성장의 과정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요?
이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매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상처받았던 완다 막시모프(엘리자베스 올슨 분)가, 지난 완다비전에서 얻었다가 잃었던 자신의 아들들을 되찾고자 다크 홀드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스칼렛 위치가 되어갔고, 그 과정에서 멀티버스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아메리카 차베즈(소치 고메즈 분)를 납치하여 그 힘을 흡수하고자 하는 여정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 영화인데, 사실상 모든 극의 핵심은 완다에게 있는 조금은 아이러니한 영화인데요, 그럼에도 닥터 스트레인지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엄청난 내적 성장을 이룩합니다. 그의 성장을 보기 전에, 그와는 대척점에 있었던 완다의 모습부터 살펴보죠.
완다는 슬픈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릴 적 소코비아에서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부모님을 여의였고, 이후 하이드라에게 잡혀 개조를 당한 뒤 울트론에게 이용 당하였으며, 결국 울트론에 의해 자신의 쌍둥이 오빠인 피에트로를 떠나보냅니다. 이후 어벤져스에게 보호를 받으며 지내지만, 작전을 수행하던 중 실수로 와칸다의 대사들이 죽게 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죠. 그러다 함께 지내던 비전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행복도 잠시, 타노스의 침공을 막기 위해 비전의 이마에 있는 마인드 스톤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고. 타노스가 다시 비전을 살린 후 그를 두 번 죽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현실 조작 능력을 통해 헥사를 형성하여 죽었던 비전과 없었던 아들 둘을 만들어 내었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손으로 없앱니다. 이후 자신의 손에 들어온 다크 홀드를 통해 자신의 아들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그만 다크 홀드에 매료되어 흑화 하게 되는데요.
그녀는 자신이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것도 사실이고요. 그렇지만 멀티버스를 이동하는 능력까지는 없었던 그녀는 자신이 만들었던 아들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다른 우주로 이동할 수 있는 차베즈의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의 그녀의 생각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작은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왔으며,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녀는 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무기력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강한 힘을 이용하여 죄 없는 타인의 희생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카마르 타지를 공격했을 때의 그녀의 모습, 그리고 이후 838 우주에서 일루미나티를 해치우거나 닥터 스트레인지와 차베즈, 그리고 838의 팔머를 뒤쫓을 때의 모습에서 보여준 샘 레이미 특유의 공포 연출은 변화된 그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과연 그녀는 그렇게 수많은 희생을 통해 만난 아이들과 행복했을까요?
영화의 클라이맥스, 아메리카 차베즈가 838 우주의 완다와 아이들로 향하는 포털을 열었을 때의 그녀는 행복과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희생만 해 왔던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와 다크 홀드의 능력에 압도된 완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모습을 보입니다. 타인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길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모습이었죠. 그러나 자신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며,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시작한 이 모든 대혼돈을 스스로 정리하기에 이릅니다.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모습이군요.
앞서 언급했듯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강력한 힘을 지닌 그녀 역시 운명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평온한 모습을 보입니다. 과연 운명은 개척할 수 없는 것일까요? 운명을 거스르면 우리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을까요? 스피노자는 그렇다고 답합니다.
사실 운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극 초반의 닥터 스트레인지도 완다와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완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고 있는 닥터, 그런 그는 여전히 자신만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팔머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칼자루를 자신이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의 일에 관해서는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데요, 특히 이전 작품인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 시니스터 식스를 대상으로 원래 죽었어야 하는 존재들이라고 강조하는 장면이 그랬지요.
그랬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하지 못하는 스칼렛 위치(완다)라는 거대한 존재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다른 우주의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성찰하게 됩니다.
먼저, 극 초반, 아메리카 차베즈와 함께 이곳 우주로 넘어온 시체인 디펜더 스트레인지를 만나는데요. 그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지만, 아메리카 차베즈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아메리카 차베즈를 희생시켜 그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려다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후 스칼렛 위치를 피해 넘어간 838 우주에서의 닥터 스트레인지의 실상도 듣게 되는데요. 838 스트레인지의 경우에는 자신의 호기심과 오만함으로 인해 인커전(다중 우주들 간의 충돌)을 일으켜 상대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38 우주로부터 넘어간 다른 차원의 스트레인지인 시니스터 스트레인지로부터 자신이 다크 홀드의 힘으로 인커전을 일으켜 자신의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시니스터 스트레인지는 거기에 한술 더 떠, 크리스틴 팔머와 만나 서로 사랑하는 우주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다중 우주를 떠돌아다니기까지 합니다, 결국 팔머와 이어지는 우주는 찾지 못했다는 씁쓸한 사실도 알게 되죠. 이처럼 다중 우주의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트레인지는 자신을 성찰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자신의 가능성과 내면을 성찰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보통 우리가 스스로를 성찰할 때 자신의 좋은 점뿐 아니라 잘못된 점, 후회되는 점 등 다각도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처럼, 스트레인지도 다른 우주의 자신을 마치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성찰하는 점에서 그런 것 같았어요.
그가 그렇게 성찰한 결론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만큼 타인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다중 우주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오만하고, 자신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참담했지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도움과 연대도 필요할 듯합니다. 두 번째는 행복이란 운명을 개척하고 내가 어떤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어진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타인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운명과 다른 모든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앞서 언급했던 스피노자가 등장할 차례인 듯하네요.
스피노자는 비록 그 자신은 이단으로 파문당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이론은 결국 모든 만물을 사랑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종교적 가르침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사랑과 행복은 무엇일까요?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그가 생각한 사랑과 행복은 결국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유일한 실체인 신 즉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우주 전체와 내가 하나가 된다, 즉 자아의 개념을 확장하여 모두가 나라는 생각에 이르는 거죠. 도가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물아일체, 혹은 맹자께서 말씀하신 대아(大我) 개념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자아를 확장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연의 모든 것, 심지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운명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주변 사람도 마찬가지이죠.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원수를 사랑하는 것”까지도 가능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신의 자아를 원수까지 확장한다면 그 원수도 결국 나의 일부가 될 테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의 첫 번째 깨달음을 분석해봅시다. 타인을 신뢰하지 못했던 과거의 스트레인지는 자아의 개념이 굉장히 협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랬던 그가 타인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아의 개념을 단순히 자신으로만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자아 속에 포용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입니다. 물론 자아의 개념을 확장시켰다고 해서 타인과 자신을 완전히 동화시킨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삶, 자신의 자아 내에 타인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비유가 적절할 것 같네요. 그렇게 자아를 확장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타인으로 대우하는 것, 즉 배타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나와 같은 동등한 존재로서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물론 이 대목은 영화상에서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요. 이런 자아의 확장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사랑을, 필연적 인과 질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이에 순응하여 코나투스, 즉 자기 보존이 온전히 증대될 때 느껴지는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정의하며, 이것이 바로 윤리적 선이라고 주장합니다. 말이 어렵죠. 쉽게 얘기하자면 코나투스란 모든 양태(자연물)가 지니는 자기 보존의 본성인데, 이것이 증대된다는 것은 제가 해석하기로는 앞서 얘기했든 자아를 전 우주로 확장하여 전 우주와 하나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심지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더라도 세계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영원히 자기를 보존하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볼 경우 이제 더 이상 나와는 적대적인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며,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함으로써 그야말로 평온한 행복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연대의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 연대의 깨달음이야 말로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두 번째 깨달음도 분석해보죠. 행복은 운명을 개척하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말이죠. 그는 여러 스트레인지들을 통해 자신이 생각했던 유일한 행복의 길인 팔머와의 만남이 사실은 이뤄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을 받아들입니다. 마블 왓이프를 보셨던 분들이라면 닥터 스트레인지가 팔머와 사별하는 운명을 바꾸고자 하다가 온 세상을 멸망시킨 에피소드가 기억나실 겁니다. 스피노자는 불행이란 운명을 바꾸지 못해 발생하는 후회, 두려움, 격정 등 정념에 사로잡혀, 정념에 의해 수동적으로 행동할 때 찾아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그 이전까지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스피노자의 개념으로 보았을 때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행복은 팔머와의 사랑이 이뤄질 때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운명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는 스칼렛 위치를 막는 과정에서 그녀의 타락과 다른 우주의 닥터 스트레인지들이 보여준 운명을 거스르려 하면서 보인 타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운명을 거스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이 행복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결심을 합니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죠. 닥터 스트레인지의 진정한 행복은 어쩌면 팔머와 함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팔머가 선물해주었지만, 교통사고 당시 부서져 있던 시계를 고치는 엔딩 장면에서의 그의 얼굴은 꽤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부서진 시계는 어쩌면 팔머와의 사랑에 대한 미련과 후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아는 시계가 고장 난 그 순간에 멈춰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즉 그는 사고 이후 마법의 힘을 얻어 닥터 스트레인지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팔머와의 사랑을 꿈꾸며 운명을 인정하지 못하는 스티븐 스트레인지의 자아로 정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던 그가 시계를 고쳤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행동이었죠. 이제 그는 행복할까요?
사실 운명이라는 표현 자체는 바꿀 수 있고, 개척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뉘앙스를 풍깁니다. 심지어 운명을 극복하지 않고 순응한다면 인생 자체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오해를 피하고자 야스퍼스의 표현을 빌려 운명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한계상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과 같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수많은 한계상황에 직면합니다. 가장 가까운 예시로는 코로나19 사태를 들 수 있겠네요. 학생이라면 열심히 공부한 후 받게 된 마음에 들지 않는 시험 점수가 어쩌면 한계상황일 수도 있고, 청년이라면 취업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한계상황일 수 있을 것입니다. 크든 작든 누구나 한계상황에 직면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계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한계상황을 수용하지 못할 때, 우리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상황에 절망하고 큰 불행에 빠지고 맙니다.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바꾸고자 한다면 내 뜻대로 안되었을 때에 받을 절망은 얼마나 크겠어요. 그렇지만 한계상황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삶의 태도를 보이게 될까요? 한계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한다는 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한계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마음의 태도에 가깝습니다. 만약 주어진 한계상황을 받아들인다면, 마음의 평온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 지금 일어난 일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야.”그럼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할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마치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러했듯이 말이죠. 혹은 아메리카 차베즈가 그러했듯 말이죠.
이쯤에서 아메리카 차베즈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메리카 차베즈는 자신이 지닌 능력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들을 잃은 과거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런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그러함을, 혹은 그냥 자기 자신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혹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선물이 아닌 저주라고 여기는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런 듯했습니다. 그렇지만 위기의 순간에서 그녀를 구해준 것 또한 그녀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통받던 그녀는, 깨달음을 얻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조언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직면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동안 통제할 수 없었던 자신의 힘을 통제할 능력을 얻게 되지요. 한계상황, 혹은 운명을 받아들인 자세가 그녀를 성장시켰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입장에서는 운명에 순응하고 타인과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했다고도 볼 수 있죠.
이렇게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스칼렛 위치가 된 완다는 자신에게 없지만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또 다른 완다의 아들들을 자신이 기르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아들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인은 생각하죠. 그렇지만 마지막에 그녀의 모습을 맞닥뜨린 아들들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입니다. 즉, 그녀의 사랑은 아들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사랑이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의 사랑은 앞서 언급한 코나투스가 증대되는, 운명에 순응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이를 제 식으로 풀어서 생각해본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란 나와는 다른 모든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란,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행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2016)에서 크리스틴 팔머는 교통사고를 당한 닥터 스트레인지의 곁에서 그가 행복하기를 지켜봅니다. 그가 파멸로 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물론 그것이 이뤄지진 않았지만 말이죠. 그녀는 닥터 스트레인지와 함께했을 때 주었던 선물인 시계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내 사랑을 알게 될 거야.” 시간이 지나 닥터는 그녀의 사랑을 뒤늦게 이해하였지만,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 이후였죠. 그는 이번 영화의 후반부에 그녀에게 고백합니다. 다중 우주의 어떤 팔머이든 자신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그러면서 그는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놓아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운명에 순응하면서, 팔머의 행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죠.
우리 주변에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저도 완벽하게 운명을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정말 어려운 일이더군요,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실천하는 일이란. 그렇지만 최대한 현재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평안함을 얻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 앞에,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운명도 받아들였다면, 주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쉬울 것이기 때문이죠.
어떤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저 사람을 내 식대로 바꾸고자 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타인을 내 입맛에 맞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시도를 한다면 그 사람과 자신 모두 불행에 빠질 거예요. 나는 내 마음에도 타인이 변화하지 않으니 불행하고, 상대방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맛에 바뀌어야 하니 자율성과 인격이 훼손된다고 느끼며 불행할 겁니다. 물론 주변의 사람이 내 마음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마저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허물까지도 보듬어주고 위할 때 사랑은 완성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이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면서 스피노자의 행복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이 행복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해 보았으면 하네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사랑 속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