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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May 26. 2023

윤리와 함께 영화 속으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저는 중등학교 윤리교사입니다. 윤리를 좋아합니다. 학생들과 함께 윤리적 대화를 나누는 것 역시 좋아합니다. 물론 윤리교육으로 인해 모든 학생들이 윤리적인 존재가 된다면야 더 바랄 나 위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 올해로 10년 차 교사로 일하면서, 물론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즐거웠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극장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본 후 영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방학기간에 혼자 있으면 걸어서 30분 거리의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거의 매주 한 편씩 영화를 빌려보곤 하였습니다. 대학생 때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를 보며 영화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한 관점을 지니게 되었고, 보아온 수많은 영화들이 제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제가 좋아하는 윤리와 영화를 함께 즐기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기존에 철학과 영화를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대체로 철학이 중심이었고, 영화는 철학을 설명하는 예시 정도로만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영화 속의 철학적 내용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영화의 시놉시스뿐 아니라 영화 속 상징적인 장치, 여러 씬들의 구도나 조명, 혹은 인물들의 동선이나 시선, 그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앵글, 사운드, 그리고 그것들로 이뤄진 영화의 미장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시청각적 상징과 자극을 통해 전달하는, 그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예술입니다. 따라서 내용만을 가지고 영화를 이해한다면 영화를 반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역시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은 아니기에 영화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미숙하거나 어설프겠지만, 영화의 여러 요소들을 최대한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철학(정확하게는 윤리)과의 접점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얼마 전,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이명세 감독)'를 다시 보았습니다. 내용과 형식 두 가지의 방향에서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폭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극 중 장성민(안성기 분)이 자행하는 직접적인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영구(박중훈 분)를 비롯한 형사(혹은 공권력)들이 자행하는 구조적 폭력입니다. 이러한 두 폭력에 대한 대비를 영화는 오프닝 씬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영화는 흑백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공터에 형사 영구가 홀로 난입합니다. 그의 복장에 쓰여있는 '안전제일'이라는 문구는 앞으로 일어날 폭력 상황과 묘하게 대비됩니다. 조직폭력배들과 마주한 영구. 영화 앵글은 조폭들이 마치 영구를 둘러싸고 있는 듯한 화면을 보여줍니다. 이윽고 영구가 폭력배들에게 다가설 때 영화의 사운드는 강렬한 록 음악을 들려줍니다. 이후 형사들이 줄지어 등장하며 더욱 거친 폭력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폭력의 순간순간을 멈추고 그 장면을 거친 유화로 표현합니다. 이때의 폭력은 배경 음악과 화면 모두 원초적이면서도 투박하게 묘사됩니다.


바로 이어 영화는 컬러로 노란 은행잎이 휘날리는 어느 계단을 비춥니다. 그 유명한 bee gees의 'Hollyday'가 흘러나오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던 소녀는 천둥 번개와 함께 사라집니다. 계단이란 공간이 낭만과 순수의 공간에서 유혈이 낭자한 폭력의 공간으로 치환되는 순간입니다. 장성민은 비 사이를 뚫고 목표물에게 다가갑니다. 장성민의 칼은 우산과 함께 우산을 들고 있던 목표물을 살해하고 천천히 사라집니다. 유유히 흐르는 음악은 이어지는 폭력적인 화면을 마치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세련되게 묘사합니다.


사실 공권력의 폭력과 개인의 직접적인 폭력은 성격상 반대로 묘사되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공권력의 폭력을 투박하게, 개인의 폭력을 우아하게 표현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형사는 깡패 같고, 범죄자는 과묵한 주인공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국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입니다. 어떤 폭력이든 결국 폭력은 폭력이라는 것을 시청각적 대비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폭력이라는 부분에서 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출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스틸컷

사회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 1930.10.24-)은 폭력을 직접적인 폭력과 간접적인 폭력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리고 직접적인 폭력이 사라진 상황을 소극적 평화라 부릅니다. 우리나라 사회에는 여전히 직접적인 폭력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 폭력은 이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 우리 사회는 직접적 폭력이 만연했습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청소년들에게 공공연히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요즘에는 의식 개선으로 인해 이와 같은 만연한 폭력은 어느 정도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 여겨집니다.


간접적인 폭력은 다시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으로 나뉩니다. 영화 상에서 공권력이 자행하는 폭력은 사실상 구조적 폭력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형사들이 행사하는 것은 직접적 폭력이지만, 사회구조가 이를 묵인하고 암묵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으므로 저는 이를 일종의 구조적 폭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경찰서 내부의 형사들을 비출 때 거의 매번 쇠창살 사이에 카메라를 두고 있습니다. 마치 쇠창살 안에 형사들이 갇혀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저는 경찰서 씬을 보면서, 형사들 역시 자신들이 자행하는 폭력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범죄를 제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처럼 보였습니다.


영화는 장성민의 폭력과 형사들의 폭력을 대비하고 있고, 실제로 그 둘의 폭력은 목적에 있어서 차이를 보입니다. 장성민의 폭력은 개인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폭력이고, 형사들의 폭력은 사회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적이고 공익을 위한 폭력입니다. 그러나 둘 모두 폭력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갈퉁은 폭력의 해결을 위한 폭력 역시 폭력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폭력을 제거하는 과정은 반드시 비폭력적인 방법이어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이처럼 영화의 내용(장성민을 쫓는 형사 영구의 이야기)뿐 아니라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영구의 폭력씬과 장성민의 폭력씬의 대비, 두 폭력이 폭력의 순간에서 마주하는 씬 등)을 함께 고려했을 때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더욱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저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윤리교사이자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분석하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윤리적 함의들을 제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사람마다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상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다양한 여러 감상 중 하나인 제 글이 영화를 즐기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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