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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Jun 16. 2022

공화주의로의 성장과 더 배트맨(2)

공화주의를 중심으로 더 배트맨 겉핥기

더 배트맨(The Batman, 2022)(감독: 맷 리브스, 출연: 로버트 패틴슨, 폴 다노, 콜린 패럴, 조이 크래비츠, 재프리 라이트, 존 터투로, 피터 사스가드, 앤디 서키스 외)   

  

* 이 글에는 더 배트맨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 이 글은 공화주의로의 성장과 더 배트맨(1)으로부터 이어지는 글입니다.     


3.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와 공화주의

 1) 정의로운 자경단의 가능성

 정의는 일반적으로 공정함, 공평함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발생한 부정의를 교정함으로써 균형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의는 교정적 정의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교정적 정의는 다시 배상적 정의와 형벌적 정의로 나뉘게 되는데요, 특히 범죄와 연관 지어 범죄자의 범죄 행위를 공정하게 처벌하는 것을 형벌적 정의라고 정의합니다. 이 형벌적 정의는 피해를 발생시킨 자에게 공정하고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일종의 공적인 복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적 복수로서의 형벌적 정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형벌적 정의를 수행하는 주체가 개인이 아닌 공적 주체여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를 수행할 주체가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혹은 완전히 부패해서 그 기능이 유명무실한 상태라면 어떨까요? 그러한 사회의 시민들은 사회를 신뢰하고 연대와 협력을 이뤄낼 수 있을까요?


 고담시는 이미 팔코네가 완전히 장악한 도시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시장, 판사, 의회 등이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압도적인 자금(토마스 웨인의 재개발 비용이었던)을 바탕으로 팔코네의 의지대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심지어 실질적으로 범죄 소탕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경찰까지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형벌적 정의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경단원으로서의 브루스 웨인, 더 배트맨 스틸컷

 물론 이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이를 감시하는 감시체계가 작동하고 있고, 시민들의 의식도 이전과 같지 않으며, 이를 견제할 만한 다양한 수단들이 존재하니까요. 그렇지만 고담시와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에만 기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상의 상황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한 존재가 바로 자경단원인 배트맨입니다. 물론 자경단의 경우 공식적인 법적 지위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활동 하나하나는 모두 불법입니다. 그렇지만 합법적인 모든 절차를 통해서도 범죄자가 처벌받지 못하는 극단의 상황이라면, 어쩌면 이와 같은 존재가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이 이 영화의 전제로 깔려 있습니다. 그의 처음 동기는 복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향한 복수의 방향은 범죄를 일으키는 범죄자로 향했죠. 그렇기에 그의 활동이 정당성을 얻는 것이었고, 고든 경감도 이를 묵인했던 것입니다. 즉 배트맨의 그와 같은 행동의 동기는 비록 복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공동선에 어느 정도는 기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막바지로 향하게 되면 그는 복수를 넘어서는 ‘희망’과 ‘정의’라는 상징을 지니게 됩니다. 즉, 자신을 희생하면서 동료 시민들의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인 공화주의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그 한 사람의 행동과 그 행동의 울림이 일반 시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그리고 그러한 선한 영향력이 고담시의 타락한 시스템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면, 정의로운 자경단이라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2) 고담시를 통해 본 공화주의의 필요성

 영화에서의 고담시는 앞서 서술했듯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이로 인한 계층 간 불신이 만연해 있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계층 간의 불신과 갈등이 리들러의 범행 동기이자, 리들러의 협력자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소위 말하는 지배층의 부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공정함이 이와 같은 부정의한 상황을 연출한 것입니다.

존 로크(출처: 나무위키)

 여기서 저는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지니는 본질적 한계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사상입니다. 초창기 자유 민주주의를 이끈 사상가 중 한 명인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모든 개인은 천부적으로 자연권을 지니고 있으며,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 중 사유재산권을 모든 자연권과 자유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즉 애초에 자유 민주주의 자체는 자본주의와 이론적으로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의 핵심적인 동력은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에 근거한 경제 활동이 공익 실현이 도움이 된다는,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이 이기심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합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와 함께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특성상,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는 것은 (비록 로크의 단서조건이 있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이기주의를 제도적으로 조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닙니다. 따라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도의적으로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면 정당한 행위라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20세기부터 여러 사상적인 충돌 과정을 통해 현재까지 최선의 제도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인간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아직도 존재하는 소외되는 사람들, 법을 지키면서 피해를 보는 선량한 사람들의 억울함, 극심한 빈부 격차와 이에 따른 범죄율 상승 등등의 여러 사회적인 문제들을 자유 민주주의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고담시의 기득권 세력들인 팔코네와 코블팟, 더 배트맨 스틸컷

 이 영화에서의 갈등은 배트맨과 리들러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리들러는 배트맨과 자신이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는 배트맨에게 어떤 위협을 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등의 핵심은 빈부격차에 따른 계급 간의 관계에 내재했습니다. 즉 부정한 방법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팔코네, 이전 고담 시장, 부패 경찰, 오스왈드 코블팟 등)과 재개발이라는 희망만을 바라보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소외된 계층 간의 갈등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이기심을 제도적으로 용인해 준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어두운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소외 계층을 테러집단으로 바꾼 리들러, 더 배트맨 스틸컷

 또한, 리들러를 비롯한 범죄에 가담했던 세력들은 모두 소외 계층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이렇게 소외받는 이유가 모두 사회 구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회 구조를 파괴하는 일에 기꺼이 나섭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사회 탓으로 돌리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반(反) 사회적 행위라고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이와 같은 소외 계층의 고통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립니다. 그러면서 가난하지만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논리를 펴죠.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이와 같은 범죄 행위는 옳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고담시의 사회 구조는 과연 문제가 전혀 없었을까요? 우연히 가난한 집 안에 태어나서 집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하루 벌어 하루 살다가 가난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삶은, 온전히 그 사람들만의 책임일까요?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흔히 말하는 노력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노력 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노력할 수 있는 것도 선천적인 능력이죠. 물론 가난한 위치에서부터 시작해 자수성가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을 했으니 그의 자산은 온전히 자신 만의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능력 역시 우연의 산물입니다. 자유주의자인 존 롤스(John Bordley Rawls, 1921~2002)는 사회적, 자연적 우연성을 바탕으로 자원을 분배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강변합니다. 왜냐하면 우연히 얻은 것을 기준으로 한정된 자원을 가져간다면, 우연히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우연성이 능력이건, 노력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개인이 이룬 성공 역시 개인 혼자만 잘났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사회가 그 사람의 능력을 받아 줄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다시 리들러로 돌아와서, 저는 그의 죄를 부정하자는 입장은 아닙니다. 다만, 사회의 기본구조가 이기적인 경쟁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협력의 구조였다면, 그와 같은 범죄자들이 탄생할 가능성은 낮아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앞서 말했듯, 물론 현실에는 완충 장치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극단적 상황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상, 제도적인 한계로부터 나오는 문제들을 문제의 원인이 되는 사상과 제도로 해결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공화주의입니다.


 공화주의는 개인의 권익만을 이야기하는 자유 민주주의와는 달리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시민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공화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은 공동의 이익에 근거할 때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즉 개인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공동체에 의존한다는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시민의 권리는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에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성취해야 하는 성격의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권리란 시민이 공동체에 대한 책무를 다할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트맨은 영화 내에서 이와 같은 공화주의적인 대안을 몸소 보여줍니다. 고담시의 안전이라는 공동의 선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희생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세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도 간혹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모습에 감명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자신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많은 사람들, 영화 내에서는 자신이 기득권을 누리고 있음에도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토마스 웨인 같은 사람들의 존재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그와 같은 행동들이 도의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그 행위 자체를 의무화하거나 강제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화주의에서는 그와 같은 행위가 적극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동체가 존재해야 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죠. 특히나 고담시와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공동선을 향한 움직임이 필요해 보입니다.


 3) 배트맨의 성장과 공화주의적 시민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리들러는 마지막 작전을 시작합니다. 고담시를 둘러싼 강물의 둑을 폭탄으로 파괴하여 고담시를 물바다로 만들고, 물바다를 피해 체육관으로 들어온 새로운 시장을 암살하는 것, 그럼으로써 기존의 지배 구조를 변혁하는 것 말입니다. 이 순간 고담시를 덮친 물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소외받고 차별받아온 계층들이 그동안 가둬왔던, 사회 시스템이라는 이름 하에 억눌려 있던 분노가 폭발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복수라고도 보였습니다. 이때의 물은 흙탕물입니다. 깨끗해 보이기만 했던 고담시의 가면 뒤에 추악한 현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리들러의 방법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복수가 기득권 세력을 포함한 고담 시민 전체를 향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를 우리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있을까요?


 뒤늦게 리들러의 계획을 알게 된 배트맨은 리들러 가면을 뒤집어쓴 폭도들을 제압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배트맨은 자신의 상징이었던 복수, 그리고 공포라는 도구가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되는 것을 목도합니다. 마지막 폭도를 제압한 그는 끊어진 전선이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을 홍수가 된 물속으로 던지며 위협을 제거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물로 뛰어드는 이 씬은, 일반 대중들과는 거리를 두면서 오로지 범죄자들만을 응징하고 복수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 시민들 속으로 기꺼이 함께하겠다는 배트맨의 다짐을 상징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씬을 통해 앞서 언급했던 배트맨의 상징이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배트맨이 갖던 “복수”라는 상징이 “희망” 혹은 “정의”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졌던 그가 다시 일어나는 컷은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는 것과 유사하게 그려집니다. 전통적으로 물은 죽음, 혹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합니다. 동양에서는 황천, 삼도천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아케론(Acheron), 코퀴토스(Cocytus), 피리플레게톤(Pyriphlegethon), 레테(Lethe), 스틱스(Styx)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강들은 모두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물에 빠지는 행위를 통해 이전 복수를 상징하던 배트맨은 죽었음을 은유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컷은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줄 때 죄인은 죽고 신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듯, 배트맨이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은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복수의 화신에서 공동선으로의 헌신이라는, 혹은 시민들에게 “희망”과 “정의”를 상징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죠. 특히 물속에서 일어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씬에서, 배트맨의 상징색으로 쓰였던 붉은색 신호탄을 사용하였고, 이후 물속에서 시민들을 구해내는 과정에서 신호탄을 든 배트맨을 시민들이 따라 나오는 연출을 통해 그가 공동의 선을 위해 희생하는 존재로 거듭났다는 것을 영화는 표현합니다.

자신을 헌신하여 공동선을 이룩하려는 배트맨, 더 배트맨 스틸컷

 특히 시민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같이 부모를 잃은 시장의 아들에게 손을 내미는 씬을 통해, 자신이 어릴 적 가지고 있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배트맨은 리들러에게 아버지를 여읜 시장의 아들 시장의 아들을 두 차례 응시합니다. 처음 사건 현장에서 슈트를 입고, 그리고 시장의 장례식장에서 브루스 웨인의 자격으로, 즉 그가 지닌 두 자아 모두 그 아들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그 시장의 아들에 투영된 것이죠. 그리고 그 아이가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손을 내밀어 줌으로써 과거 자신에게는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못했다는 그 상처가 극복되는 듯 보였습니다. 마치 과거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듯이 말이죠. 그리고 아마 배트맨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부모를 죽인 자를 복수할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자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하겠다고 말이죠. 방향의 전환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과 “정의”라는 새로운 상징이 된 배트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성장을 다짐합니다.      


“복수로 과거를 치유하지 못한다.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4. 마무리하며     

  이 영화는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배트맨의 성장기를 보여줍니다. 기술적인 부분이나 인격적인 부분 등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저는 이 영화가 주는 특별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Batman Begins, 2005)와는 다른, 배트맨이 된 이후에 방황하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더 배트맨(The Batman)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사운드, 색감, BGM 등 영화의 모든 부분이 배트맨이라는 인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기존 영화들의 배트맨은 모두 그의 내면보다는 그가 마주하는 사건에 초점을 맞춰, 배트맨이 사건에 따라 기능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배트맨은, 그 서사와 배트맨의 감정선의 변화 등을 통해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어, 배트맨 혹은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물의 모습이 더욱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배트맨의 시선을 따라 영화가 진행된다는 점도 좋았고, 추리극의 형식을 담은 탐정 영화 스타일로 연출이 된 부분 역시 원작의 팬으로서 흡족했습니다. 원작에서의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 그리고 세계 최고의 탐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럼에도 리들러의 수수께끼를 간파하고, 종국에는 리들러의 계획을 막아낸다는 점에서 세계 최고의 탐정으로서의 면모를 조금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역대 배트맨 영화 중에서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 다음으로 액션 묘사가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팀 버튼의 배트맨은 슈트 특성상 움직임이 다소 뻣뻣했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감독의 특성상 액션이 그리 강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이번 영화에서의 배트맨은 인간임에도 왜 그가 히어로인지를 잘 그려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팔코네의 집무실 액션 시퀀스에서의 극단적인 아웃포커싱을 통해 흐릿한 배경 속에서 그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범죄자들이 느낄 공포와 위압감을 관객에게 잘 전달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카메라로 다가와 그의 모습에 포커스가 닿았을 때 느껴지는 강조 효과는,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더 배트맨인지를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배트맨 영화냐고 물어보신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답변할 것 같습니다. 영화 내에 등장하는 상징성이나, 배트맨이라는 캐릭터 자체에 초점을 맞춘 연출, 추리극이라는 영화의 형식 등등이 모두 제 기대치를 높여놓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막상 영화의 진행은 추리극이라기보다는 단순 스릴러물 정도였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수수께끼를 풀거나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배트맨은 오히려 악역인 리들러가 쓴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수준에 그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작에서의 배트맨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주도면밀한, 말 그대로 신체적 능력뿐 아니라 지적 능력에서도 초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물론 초창기 배트맨이기 때문에 앞으로 발전이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네요. 또한 리들러 역할의 폴 다노의 연기는 워낙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이야기 내에서 캐릭터가 갖는 매력이 있는가 자문해본다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 2007)에서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보았기 때문에 폴 다노가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에 기대감을 품은 것은 사실이었고, 실제로 그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었지만, 그가 벌이는 행동들에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같은 위기감이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도시를 응시하는 배트맨, 더 배트맨 스틸컷

 다만,  영화에서 주는 여러 메시지들은 최근 할리우드에서 주목하고 있는 계급 간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생충(Parasite, 2019)이나 조커(Joker, 2019) 등의 영화에서도 현재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보여줄  있는 어두운 부분을  캐치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공감을   같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자성(自省) 통해 우리 사회가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은  살만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나 타인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개인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고, 공동체의 문제는 정치인들에게 내맡겨도 괜찮다는 자유주의적 사고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그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성찰이 이뤄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공화주의를 제안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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