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학파로 그린 나이트 겉핥기
그린 나이트(The Green Knight 2021)(감독: 데이빗 로워리, 출연: 데브 파텔, 알리시아 비칸데르, 조엘 에저튼 외)
* 이 글에는 그린 나이트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잔혹한 운명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인간의 성장 과정을 담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잔혹한’ 운명이란 인간의 기준에서 운명을 평가한 것입니다. 자연 전체로 볼 때 그 운명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 가웨인은 그 운명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그리고 성장의 여정을 나서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가 하나의 거대한 메타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메타포가 품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떠오른 것은 스토아학파였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전 우주가 로고스에 의해 지배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세계 이성이라고 불리는 로고스는 스토아학파의 이론에 따른다면, ‘신’입니다. 이 신은 필연적인 인과 법칙으로, 자연법칙이자 도덕 법칙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세계 이성을 본성으로 부여받았습니다. 바로 이성이라는 본성이죠, 인간은 이 이성을 통해 세계 이성의 필연적인 법칙을 깨닫고 그에 순응해야 한다고 스토아학파는 설파합니다. 그들이 생각한 행복이란, 바로 이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운명을 거스르고자 할 때 피어오르는 감정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와 같은 평온함과는 대척점에 있는 가웨인을 주목합니다. 이번 리뷰는 영화의 진행 순서에 따라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메타포들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 영화는 색이 중요한 영화라 생각합니다. 제목에서는 초록색을 메인 색으로 상정하고 있으며, 감독은 성주 부인의 입을 통해 색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에 본격적으로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영화를 보며 든 영화 내(內) 색의 의미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초록: 자연, 생명, 부패를 상징하며, 궁극적으로는 필연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상징
빨강: 인위적인, 혹은 본능적인 욕망 등 어리석은 인간이 운명에 대항해 지니는 욕망을 상징
파랑: 가웨인의 심리를 묘사하는 색으로, 가웨인의 만족과 편안함을 상징
노랑: 쇠락, 해 질 녘, 인간 생의 가을, 생명 혹은 개인에게 주어진 운명의 끝에 이르렀음을 상징
앞으로 이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 스토아학파의 이론과, 색에 대한 제 해석을 중심으로 글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영화는 왕좌에 앉아 있는 가웨인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태양 모양의 왕관이 하늘에서 그의 머리 위로 서서히 내려옵니다. 그리고 가웨인이 그 왕관을 쓰자 그의 얼굴에 불이 붙습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의 머리 위 아름다운 하늘을 비춥니다. 인간의 허황된 욕망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비라도 하듯 말이죠. 왕관은 인위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인간들에게는 가치가 있으나 자연에게는 그저 금속 덩어리일 뿐인 그 왕관 말입니다. 그리고 왕관을 쓰자 가웨인의 얼굴이 불길에 휩싸입니다. 붉은빛 불길은 욕망을 상징하면서도, 그 욕망에 사로잡혀 죽을 운명을 맞이하는 가웨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씬이 바뀌며 카메라는 평화롭게 거닐고 있는 동물들을 비춥니다. 동물들은 자연스럽게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저 멀리 집에서는 불이 납니다. 인간에게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죠. 그러나 동물들은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자리를 피한 자리에 남성과 여성이 다급하게 마구간에서 말을 끌고 나옵니다. 전쟁 혹은 분쟁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같은 상황, 같은 공간에서 평화로운 동물과 다급해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비하여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인위적인 가치(명예, 재물 등)가 자연의 눈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러한 다급함을 비추는 창문 안에 널브러져 있는 가웨인을 비춥니다. 그는 매음굴에 있습니다. 그곳의 횃불은 붉은색,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햇빛은 푸른빛을 띠고 있습니다. 가웨인은 본능적 욕망을 충족시키며 나름 행복해 보입니다. 아직은 말이죠.
“가웨인 경과”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문구는 여러 폰트로 변화합니다. 가웨인의 “이야기”가 여러 책을 통해 후세에 전승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웨인은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 안 역시 곳곳에 붉은빛 횃불과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푸른빛이 가득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붉은빛을 등지고 푸른빛과 붉은빛이 섞여 있는 가웨인의 방으로 들어옵니다. 그녀는 붉은빛을 등지고, 그녀의 얼굴 역시 붉은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아마 그녀는 가웨인이 왕이 되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그녀의 욕망이 가웨인에게 점차 투영됩니다. 사실 가웨인은 왕이 될 그릇도 자질도 없어 보이고, 그 역시 왕좌에 그렇게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사건으로 인해 그는 그가 얻을 수 없는 명예를 위해 길을 나서게 됩니다.
가웨인은 어머니 대신 아서 왕이 주최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가합니다. 그는 붉은빛 횃불들을 지나 연회장의 둥근 창에서 들어오는 푸른빛을 받으며 그곳에 도착합니다. 그는 그냥 파티를 즐길 생각으로 온 모양입니다. 그 유명한 아서왕은 이미 기력이 많이 쇠한 모습입니다. 그는 가웨인을 부릅니다. 아서왕의 친족인 가웨인의 어머니(원작에서의 모건 르 페이 일 것으로 보이는)가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아서왕은 원래 가웨인의 어머니가 있어야 하는 자리로 그를 부른 것입니다. 그 자리로 이동할 때에도 가웨인의 주변에는 붉은빛 횃불이 맴돌고 있습니다.
가웨인의 어머니가 주술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가립니다. 저는 이를 통해 그녀가 운명을 속이고자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서왕 뒤의 둥근 창과는 달리, 가웨인의 어머니 뒤에는 삼각형의 창이 있습니다. 둥근 모양은 자연을, 삼각형의 모양은 인위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삼각형의 창에서는 약간 녹색의 빛이 내려옵니다. 가웨인의 어머니는 그 녹색을 뒤로하고 자신의 눈을 가립니다. 그리고 그린 나이트를 소환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합니다.
아서왕은 가웨인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영웅으로서의 무용담을 말이죠. 본능적인 욕망만을 좇던 가웨인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무용담이 필요한 가웨인 앞에 어떤 존재가 나타납니다. 그린 나이트입니다. 그는 붉은빛의 욕망이 늘어선 주랑을 가로질러 옵니다. 그가 지나갈 때 횃불은 초라한 연기를 남기며 꺼집니다. 운명 앞에서 인간의 욕망은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연회장의 원탁 가운데에 서서 게임을 제안합니다. 자신에게 한 행동을 1년 뒤 똑같이 응수하겠다는 게임, 운명이라는 게임을 말입니다. 운명은 이처럼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원탁의 기사들은 그린 나이트의 게임에 선뜻 응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술과 여자 사이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던 가웨인은 죽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그 운명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나서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어리석으면 용감해지는 것일까요.
지혜로운 아서왕은 가웨인을 불러 세우며 묻습니다. 조건은 알고 있느냐고. 가웨인은 너무나도 쉽게 그렇다고 답합니다. 운명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운명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실제로 자신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말입니다. 가웨인은 운명 앞에서 무기력하고 어리석은 인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서왕은 엑스칼리버를 그에게 쥐어줍니다. 가웨인은 그 검으로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벱니다. 그린 나이트의 도끼 주위로 그의 붉은 피와, 도끼에서 자라난 녹색 이끼가 어지럽게 섞입니다. 그린 나이트는 1년 뒤에 녹색 예배당에서 보자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머리를 들고 유유히 원탁을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그린 나이트가 두고 간 도끼의 이끼를 통해 1년이 지났음을 알려줍니다.
가웨인의 “이야기”는 왕국 곳곳에 퍼집니다. 그 이야기는 인형극으로 만들어집니다. 가웨인의 목이 달아나는 결말을 가진 인형극으로 말이죠. 그동안 가웨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운명이 제시한 1년, 그 1년이 오지 않을 것처럼.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하루하루를 낭비하는 인간들처럼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다가옵니다. 아서왕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온 가웨인을 바라봅니다. 크리스마스에 어떻게 할 것이냐는 왕의 질문에 가웨인은 그냥 게임 아니었냐고 대답합니다. 그는 운명이 자신을 피해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네요. 이제 그는 녹색 예배당을 향해 내키지 않는 모험을 떠나야 합니다. 자신의 목을 바치는 모험을 말이죠.
여정을 떠나기 전, 가웨인은 애인인 에셀에게 가야 할지 묻습니다. 에셀은 그 머리가 붙어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가웨인은 서약을 했으므로 지켜야 하며, 그래야 위대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속마음은 그것이 아님에도, 그는 인위적인 욕망에 떠밀리는 모습입니다. 그런 그에게 에셀은 근원적인 질문을 합니다. “왜 위대해져야 해요? 괜찮은 사람인 걸로 부족해요?”
그녀의 어머니는 가웨인에게 녹색 벨트를 선물합니다. 어딜 가든 벨트를 차고 있으라고. 그렇다면 목을 떳떳이 들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녹색 벨트의 존재 역시 운명을 속이는 장치로 보입니다. 그 벨트의 속은 피처럼 붉은색입니다. 욕망을 상징하는 붉은색 벨트 안에 주술을 걸어놓고, 겉을 녹색 천으로 감쌉니다. 녹색은 운명입니다. 마치 욕망을 운명처럼 위장하는 것, 곧 운명을 속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가웨인은 길을 떠납니다. 명예를 위한 위대한 여정이어야 함에도 그가 가는 길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장난기 어린아이들이 쫓아오는 길. 양치기가 모는 양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가는 길. 그렇지만 가웨인에게 그 길은 단순히 길이 아니라,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길로 여겨졌겠지요. 그렇지만 가는 길이 초라한 만큼, 갈림길에 갇혀있는 해골 역시 초라하게 죽어 있습니다. 죽음을 향한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습니다.
그는 숲에 들어섭니다. 수많은 나무들에 둘러싸인 숲. 그 숲에서 붉은색 여우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가웨인은 그 붉은여우를 따라갑니다. 붉은여우는 욕망, 그중에서도 명예욕이라는 욕망을 상징하며, 가웨인은 우연히 만난 명예욕을 별생각 없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는 전쟁 통에 죽은 시체를 발견합니다. 사실 가웨인은 명예를 위해 간다기보다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을 시체를 통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는 숲에서 빠져나옵니다. 전쟁터에서의 죽음과 그 사이를 걷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쟁은 겉으로 보았을 때 명예롭지만, 실상은 죽음을 불러오는 행위입니다. 그 사이를 가웨인과 어떤 한 사내가 걷습니다. 그들의 대화 중에도 안개는 그들을 감싸고 지나칩니다. 마치 인간의 모든 가치가 허망하게 날려가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가웨인은 다시 숲에 들어서 강도를 당합니다. 방금 만난 그 사내를 포함한 강도 무리에 가웨인은 명예도 잊은 채 살려달라고 구걸합니다. 그는 나무 등치에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시계방향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한 바퀴를 돈 그 카메라의 끝에는 시체가 된 가웨인을 비춥니다. 그대로 있을 경우 시간이 지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태양이 밝게 가웨인을 비추고 있네요. 그리고 카메라는 다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오는 것 같습니다. 그는 허망하게 죽을 자신을 상상하고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다가올 죽음을 피해 갈 기세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단지 그가 두르고 있던 노란 망토만을 걸친 채 길을 나섭니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네요. 그는 그렇게 명예욕을 뿌리치고 살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집으로 향합니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어떤 집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그는 잠에 빠집니다. 그가 일어나자 그의 앞에는 위니프레드라는 여성이 서 있습니다. 그녀는 호수 안에 있는 자신의 머리를 꺼내 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웨인은 머리를 꺼내 주기로 합니다. 호수에 들어가 머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붉은빛 호수가 그를 감싸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목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살고 싶습니다. 그의 욕망은 사실 본능적인 단순한 욕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이 모든 상황은 그를 명예욕이라는 인위적인 욕망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는 본능적인 욕망과 인위적인 욕망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그리고 목을 구해옵니다. 아마도 미래의 자신의 모습인 듯 해골이었던 머리는 위니프레드의 얼굴로 변해있습니다.
위니프레드는 얼굴을 되찾은 뒤 이야기합니다. “그린 나이트는 당신이 아는 사람이에요.” 아마도 그린 나이트는 예정되어 있는,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가웨인은 사실 이 여정을 떠나면서 자신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니프레드와의 만남은 사실 자신이 맞이할 운명을 미리 마주한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죽음을 피해 집으로 가려던 가웨인은 위니프레드의 머리를 구해주며 아주 조금, 운명을 맞이할 용기를 얻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앞에 그린 나이트의 도끼가 나타납니다.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가웨인의 앞에 말이죠.
이 순간부터 가웨인은 붉은여우와 동행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했듯 저는 붉은여우가 명예욕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여우와 함께한다는 것은 운명을 향한 이 여정이 겉보기에는 명예욕을 향한 여정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그리고 가웨인은 대 자연을 만납니다. 거인족의 행렬을 맞닥뜨리게 된 것인데요. 가웨인은 대 자연인 거인에게 의지하려고 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대 자연은 그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큰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우는 그 거인을 경계합니다. 명예와 자연은 너무나도 상반된 개념입니다. 명예는 계속 자연을 거스르라 합니다. 인위적인 가치는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라 합니다.
그는 여우와 동행하면서 어떤 성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 성에서 성주의 환대를 받습니다. 성주의 안내를 받으며 성에 들어선 가웨인. 그는 성 내부를 돌아보다 그림을 발견합니다. 붉은여우가 앞서가고 있고, 인간은 그를 뒤쫓습니다. 아마 욕망을 좇는 인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에셀과 똑같이 생긴 성주의 처를 만납니다. 성주의 처는 가웨인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유혹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가웨인은 그에 응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입니다. 명예로운 기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네요.
그리고 저녁, 가웨인과 성주, 그리고 성주의 처는 붉은빛에 노란빛이 감도는 벽난로 빛을 조명 삼아 이야기를 합니다. 성주는 세상이 논리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예기치 못한 우연과 운명의 연속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사실 필연적인 운명도 어리석은 인간의 눈에는 우연으로 비출 따름이죠. 그리고 그는 가웨인에게 말합니다. “내가 뭘 잡든 자네에게 주겠네. 자네도 여기서 얻은 것을 나에게 주게” 자연과 운명은 공짜가 없음을,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들립니다. 즉, 자연의 순환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주의 처는 녹색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녹색은 생명의 색이자 부패의 색, 그리고 그 녹색은 누구에게나 여지없이 찾아오며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불가피한 색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적색은 욕망의 색이라 규정합니다.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카메라는 계속 그녀를 향해 나아갑니다. 어쩌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그녀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주는 묻습니다. 녹색과 맞서 싸워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말이죠. 가웨인은 명예를 얻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기사답게 행동하는 이유라면서 말이죠. 그러자 성주는 또 묻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것이냐고. 그리고 질문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가웨인을 향해 성주는 질문을 참 못 알아듣는다고 말합니다. 운명이 하는 질문, 운명이 주는 사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 대목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 같습니다. 하나의 행동을 하면 없었던 명예가 생기는 것인지, 왜 명예를 얻고자 하는지 등과 같이 성주가 던지는 실존적인 질문에 가웨인은 피상적인 답변만 늘어놓습니다. 가웨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만든 상황에 떠밀려 명예를 찾는 길을 떠났으나,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본능만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길을 떠나며 결국 운명을 향해 계속 나아갑니다.
대화가 끝난 후 카메라는 성에서 초반에 보았던 그림의 반대편을 비춥니다. 노란색 망토를 지닌 자가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비춥니다. 이제 그는 명예를 좇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 그린 나이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요? 가웨인은 성주와의 대화를 통해 명예라는 인위적인 욕망보다 더욱 중요한 어떤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 말이죠. 명예는 결국 사람이 만든 가치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겉만을 꾸며줄 분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인위적인 욕망을 이뤘을 때 비로소 자신이 완성된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것, 우리 사회의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 많은 돈과 명성을 얻는 것. 그것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인간이 만든 허상입니다. 인간 사회를 벗어나면 한없이 덧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지 못해 결국 자신의 공허함을 외적이며 인위적인 가치로 메우려 합니다. 영화는 그것이 결국은 허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가웨인은 성주의 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습니다. 성주의 처는 가웨인이 강도를 당해 잃어버렸던 마법의 녹색 벨트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가웨인은 원한다고 답합니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것은 녹색 벨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실질적으로 육체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웨인은 에셀을 두고 다른 사람과 유사 성행위를 욕구한 것에, 즉 본능적인 욕망에 굴복한 것에 수치심과 굴욕감,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며 허겁지겁 성에서 도망칩니다. 그리고 숲에서 만난 성주는 획득물 교환을 요구합니다. 가웨인은 교환할 것이 없다고 거짓을 말합니다. 녹색 벨트를 숨기며 말이죠. 살고자 하는 본능을 그는 끝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숲을 지나 강으로 향하는 가웨인의 주변은 노란빛 안개가 감싸고 있습니다. 마치 그가 두른 망토와 같이 말이죠. 앞서 언급했듯, 노란색을 쇠락, 해 질 녘, 인간 생의 가을, 개인에게 주어진 운명의 끝에 이르렀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면, 가웨인이 향하는 여정이 끝에 다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길을 여우가 가로막습니다. 여우는 운명을 피하라고 충고합니다. 그곳에 가면 죽음뿐이라고 말이죠. 사실 이 이야기는 거짓으로 끝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의 여정이 거짓이라는 것은 사실 가웨인 본인밖에 모르죠. 거짓으로 돌아온다면 운명을 피하고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웨인은 그곳에서 여우를 내쫓습니다. 거짓으로 얻은 명예는 명예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을까요. 혹은 녹색 예배당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넙니다. 강을 건너는 행위는 전통적으로 죽음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강가를 뒤덮은 수많은 나뭇가지들의 주인공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냅니다. 어리석고 겁 많은, 즉 본능으로서의 욕망에 쉽게 굴복하는 인간, 그렇지만 동시에 허울뿐이고 인위적인 욕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 가웨인은 그런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존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도착한 녹색 예배당은 고요합니다. 녹색 이끼와 나무들이 무너져 내린 예배당 건물을 점령한 모습입니다. 예배당 건물에 위치한 의자에는 그린 나이트가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발치에는 물이 아래로 흘러내고 있네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은 피할 수 없는 숙명, 운명,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그린 나이트를 마주한 가웨인의 심장박동은 매우 빠르지만 이내 곧 느려집니다. 가웨인은 그 앞에 앉습니다. 새벽이 되며 주위는 푸른빛을 띠고 있습니다. 가웨인이 그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노란빛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죽음이라는 순리대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가웨인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내밀죠. 그린 나이트가 목을 치려 하자 가웨인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도망칩니다. 노란빛을 뒤로하고 그를 막는 수많은 가지를 뒤로 하고 말이죠.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떠납니다. 이제 더 이상 노란빛은 없습니다. 흐릿하고 우중충한 푸른빛만 남아 있죠.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성주의 처가 준 녹색벨트를 항시 착용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속이는 행위를 말이죠. 그리고 그는 아서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됩니다. 에셀은 가웨인의 아들을 낳고 버림받았습니다. 가웨인은 새로운 부인을 맞이합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그의 아들은 전쟁터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패색이 짙어 가는 전쟁에 가웨인의 성은 함락 직전입니다. 최후를 인지한 그는 자신의 배에서 창자를 뽑아내듯 녹색벨트를 풀어 헤칩니다. 그러자 그의 목은 뎅강 잘려나가죠. 녹색벨트가 그동안 목이 잘릴 그의 운명을 교묘하게 속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상상을 마친 가웨인은 비로소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나무 등치에서 묶였을 때 죽음을 상상하고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던 그의 모습과는 달리 말입니다. 집으로의 여정은 말 그대로 가웨인의 집을 향한 여정일 수도, 아니면 가웨인이라는 존재가 왔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집을 향한 여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준비됐다”
그의 표정은 어찌 보면 모든 것을 통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평온한 표정인 것 같기도 하네요.
“잘했다 용감한 기사여, 이제 네 머릴 자르마”
운명은 인간이 그 운명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운명을 피하는 자는 고통 속에 죽어갈 뿐이겠지만,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는 평온하게 자신의 생을 마감합니다.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가웨인의 성장을 엿보았습니다. 영화 전체의 이야기는 어떤 거대한 업적을 쌓는 이야기도 아니고, 영웅적인 면모를 뽐내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성장했습니다. 그는 원초적인 욕망만을 좇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명예라는 인위적인 욕망을 위해 어리석게 헤매는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린 나이트 앞에서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그는 본능적 욕망이나 허울뿐인 명예욕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연 혹은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정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낸 것입니다. 스토아학파에서 이야기하는 평온한 자유, 아파테이아(Apatheia)를 말이죠. 이 말의 어원은 ‘pathos(정념)’에 없다는 뜻을 지닌 ‘a’를 붙여 정념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가웨인은 전형적으로 욕망에 휘둘리는 인물이었으나, 마지막에 가서 비로소 그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를 그린 나이트는 용감하다고 표현합니다. 운명에 대한 순응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롭게 자신의 행복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맨 처음 하늘에서 내려왔던 그 왕관은, 에필로그에 와서는 땅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아이는 그 왕관을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동양의 노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노자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강조하는데요, 무위자연과 가장 가까운 인간 존재가 바로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무위는 인위와 대척점에 있는 개념으로, 인간의 잣대로 형성된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자신 앞에 주어진 사물을 어떤 가치 판단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인위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에게 그 왕관은 인생의 모든 것이겠지만, 어린아이에게는 그냥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인위적인 가치는 사실상 무가치에 가깝기 때문이죠. 영화는 이 에필로그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응축하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운명 앞에 인위적 가치는 사실상 의미 없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여러 신체적인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렇지만 최대한 고통을 수용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통을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신체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함으로써 고통으로 인한 고통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스토아적인 방법은 신체적인 고통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얻지 못하였을 때 겪을 수 있는 정신적인 고통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일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여러분만의 탓은 아닐 겁니다.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수많은 상황들이 원인과 조건이 되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원하는 일들이 모두 이뤄졌다면 그건 여러분이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받아 줄 사회가 없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기 때문이지요. 혹은 운이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거나 아니면 다른 새로운 길을 향한 과정이라 담담히 받아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성취를 했다면 그것은 우연이 쌓여 만들어진 필연의 결과이니 겸손하게 자신이 얻은 바를 베푸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분의 삶에서 펼쳐지는 일이 어떤 “이야기”이든, 그것은 “삶”으로서, “이야기”로서 있는 그대로 가치 있습니다. 성취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우리는 주어진 운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당장의 성공과 실패는 사실 인생이라는 긴 이야기의 작은 에피소드일 뿐입니다.
소위 말하는 그 성취라는 것도 사실은 인위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연의 관점에서는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얻지 못했다고 우리가 불행할 이유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결국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같은 환경과 조건에서도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한 것은, 결국 행복이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은 나 자신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결심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이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