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와 요나스를 중심으로 아이언맨 겉핥기
아이언맨(Iron Man, 2018)(감독: 존 파브로,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기네스 펠트로, 테렌스 하워드, 제프 브리지스 외)
* 이 글에는 아이언맨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근에는 그 위세가 많이 약해졌지만 저 역시 마블 영화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영화가 나올 때마다 챙겨보고 있는데요. 불현듯 그 마블 유니버스의 시작을 알린 작품, 아이언맨에 대해 리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당시에 재미있게 보았지만, 그때는 찾지 못했던 의미들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생각보다 상징하는 바들이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슈퍼히어로 영화 장르는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삼고 있고, 이 영화 역시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만 아이언맨의 경우에는 자신의 신체적인 능력뿐 아니라 자신의 공학적인 지식을 활용한 과학기술의 힘을 빌렸다는 데에 차별점이 있는 히어로인 만큼, 그의 개인적인 성장과 더불어 그가 창조해 낸 과학기술과 관련한 이론을 중심으로 이 영화를 핥아보려 합니다.
먼저 개인적인 성장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여러 흥미로운 상징들이 눈에 띕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상징은 영화의 시작 배경이 되는 사막과 그 뒤로 펼쳐진 설산을 들 수 있습니다. 토니 스타크는 그 사막을 가로지르는 군용 차량에 타고 있다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새롭게 성장하게 되는데요. 저는 이 사막이 풍요로운 삶 속에서도 허무하고 건조한 그의 삶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정말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으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향락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라스베이거스에서 한 기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의 모습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나는데요. 토니 스타크의 무기로 고통받는 국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기자의 배경에는 고풍스러운 건물과 조각상이 비추어집니다. 즉 기자는 토니 스타크에게 도덕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그 질문을 받은 토니 스타크의 배경에는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조명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의 자아는 향락 속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황량한 사막 뒤에 펼쳐진 설산은 그의 내적 자아가 뛰어넘어야 하는 대상 혹은 시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어 설산과 같은 산속에 위치한 동굴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이 공간은 토니 스타크에게 있어서 시련의 공간임과 동시에 자신의 행동들이 낳은 부정적인 결과들을 돌아보는 성찰의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미군들은 그 산속 기지를 찾지 못하는데요. 이 찾기 어렵다는 특징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임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토니 스타크는 그들로부터 탈출할 때 아이언맨으로 거듭나며 그 설산을, 말 그대로 도약하여 탈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통해 내적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이와 같은 토니 스타크의 성장 과정과 관련하여 저는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가 떠올랐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는데요. 특히 이 영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 실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실존은 심미적 실존입니다. 이 단계의 자아는 자신의 실존을 향락을 통해 확인합니다. 즉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함으로써 자신만의 이기적인 삶을 영위하는 단계인 것이죠. 영화 초반의 토니 스타크는 이 심미적 실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며 영화에서는 이 심미적 실존의 단계를 사막으로 상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미적 실존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허무함입니다. 향락의 추구는 결국 만족되지 않은 삶으로 이어지고, 이는 개인의 내적 상태를 허무한 상태로 몰고 갑니다. 이러한 허무함을 극복하고자 결단하게 된다면, 새로운 실존의 단계인 윤리적 실존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다고 키르케고르는 이야기합니다. 영화에서는 사막 속 산에 갇혀 있던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 마크 1을 만듦으로 인해 그 산 위로 뛰어오르며 윤리적 실존으로의 도약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서는 개인이 자신이 따라야 할 윤리 규범을 스스로 상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산에서 탈출한 이후 토니 스타크는 자신이 초래한 악한 결과들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아이언맨이 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천에 옮깁니다. 즉 윤리적 실존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가 윤리적 실존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성찰하게 해 준 존재는 산속 감옥에서 만난 잉센이라는 과학자였습니다. 잉센은 토니 스타크의 가슴에 박힌 미사일 파편이 심장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그의 가슴에 거대한 자석을 박아 놓는 수술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토니 스타크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죠. 그런 잉센과의 첫 만남에서 잉센은 토니로부터 뒤를 돌아 거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거울을 보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토니 스타크의 양심과 같은 존재로서 토니 스타크가 자신을 돌아보게끔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삶을 낭비하지 말라며 새로운 삶을 살 것을 토니에게 제안합니다. 그제야 토니는 잉센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게 되죠. 이는 토니의 자아가 변화하고 도약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테러리스트의 수장이 제리코 미사일을 만들라는 요구를 거부한 토니에게 물고문을 가합니다. 그리고 토니는 물고문을 당하면서 페퍼 포츠, 즉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만들었던 아크 리액터의 모습도 떠올립니다. 즉 그 물고문을 통해 토니 스타크는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존재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는 아이디어도 얻게 된 것입니다. 흔히 물이 죽음 혹은 부활로 상징되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토니 스타크의 심미적 실존은 죽고, 윤리적 실존으로 도약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는 살아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만든 아이언맨 마크 1을 타고 설산을 도약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인데요. 그런 그가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행위는 기자회견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자회견은 영화가 끝날 무렵 다시 한번 열리게 되는데요. 이때 기자회견은 그가 자아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공표하는 장치로 쓰입니다. 첫 번째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사업 중 군수사업을 정리하겠다는 발언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영이 초래한 결과를 바로잡기 위해 대중들이 보기에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 것인데요. 그리고 마지막 기자회견을 통해 그는 자신이 아이언맨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자신이 윤리적 실존으로 거듭났음을 공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시작하는 신호탄 역할을 하기도 했죠. 기존 자신의 정체를 가리던 슈퍼히어로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셈이니까요.
이 영화에서는 토니 스타크의 성장만큼이나 그가 창조한 과학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과학기술은 영화 상에서 불로 상징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의 불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을 이용하여 인간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 냈지만, 동시에 불을 통해 만든 무기로 인해 인간은 다른 문명을 파괴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불은 창조와 파괴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요. 영화 속에서 토니는 동굴 속에 갇혀 있으면서 불을 바라보며 현재 상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그 불을 이용하여 아크 리액터, 아이언맨 마크 1을 창조함과 동시에, 테러리스트에게 무기를 전해준 자신의 과오를 아이언맨 마크 1의 화염 방사기를 통해 파괴합니다. 또한 토니를 감시하던 테러리스트들이 중간중간 불을 쐬는 장면을 보여줌으로 인해 토니와 테러리스트 모두 불에 의존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선사한 불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유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의 불을 현대의 과학기술로 이해한다면, 과학기술 역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에게 희망이 될 수도, 혹은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토니가 완성한 아이언맨 마크 1의 등장 씬은 마치 공포 영화의 그것과 유사한 연출을 보여주는데요. 히어로의 등장이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연출이 과학기술이 갖고 있는 위와 같은 양면성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불과 관련된 묘사는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다시 등장하는데요. 영화의 최종 빌런인 오베디아 스탠이 토니의 아크 리액터(과학기술)을 탈취하는 장면의 배경에서 벽난로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에 오베디아 스탠은 아이언 몽거에 탑승하여 토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기를 없애겠다더니 엄청난 걸 만들었어.” 이 역시 과학기술의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목에서 과학기술과 과학자의 책임과 관련한 독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의 이론이 생각났습니다. 요나스는 인류가 종말의 위험에 놓여 있다고 경고하였는데요. 그 위험을 초래한 것이 바로 인류, 특히 인류가 지닌 거대한 힘으로서의 과학기술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거대한 힘은 책임과 필연적으로 연계되는데요. 인류가 맞닥뜨린 위험을 막을 수 있는 능력 역시 인류에게 있고 그 위험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위험을 막을 책임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영화 상에서 토니 스타크는 엄청난 지적 능력을 통해 진보된 무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즉 그는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일종의 과학자인 셈이었죠.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과학기술이 가져온 결과를 외면했습니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그의 과학기술을 활용한 무기들은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요나스는 과학기술이 가져올 이와 같은 부작용, 즉 일어난 결과뿐 아니라 그 기술이 초래할 미래의 해악까지 예견하여 책임질 것을 이야기합니다. 즉 책임의 범위를 현재, 인류뿐 아니라 미래와 미래세대, 그리고 자연 전체까지 확장시켜야 한다고 역설한 것인데요. 그것은 현재 인류, 특히 과학기술자를 비롯한 인류만이 책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나스는 미래세대와 전 지구의 생존을 위해서 인류 특히 과학기술자는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여 책임지는 예견적 책임, 미래세대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자연적으로 갖게 되는 자연적이고 당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큰 감흥은 없었습니다. 같은 해 개봉한 다크나이트(The Dark Knight, 2008)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이 영화를 접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과학기술이 주된 히어로라는 특징을 빼놓고는 그냥 평범한 오락 영화 그 이상의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에서의 그 영향력은 오히려 다크나이트의 그것을 뛰어넘는 부분도 있는 것처럼 보이고, 제 기억보다 더 생각할 거리들이 많은 영화라 나름 즐겼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아이언맨 슈트의 매력은 부정하지 못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