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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Jul 12. 2022

채찍질은 교육이 될 수 있는가, 위플래쉬

불교와 로저스의 이론으로 위플래쉬 겉핥기

위플래쉬(Whipalsh 2014)(감독: 데이미언 셔젤, 출연: 마일즈 텔러, J.K. 시몬스, 폴 레이저 외)

    

* 이 글에는 위플래쉬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는 영화적인 매력을 즐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이후 이 영화에 대해 찾아보면서 의외로 플래처 교수의 교육 방식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 영화보다 교육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더욱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사로서 저 자신의 교육관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교육이라는 관점으로 위플래쉬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교육의 주요 관계자인 학부모, 학생, 그리고 교사의 입장을 확인하고, 9년간 교사로 근무하면서 느낀 점과 더불어 불교 이론과 인본주의 심리학자 로저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위플래쉬에 대해 적어보고자 합니다.      


학부모: 네이먼의 아버지     

네이먼의 옆을 지켜주는 아버지 / 출처: 위플래쉬 스틸컷

 먼저, 네이먼의 아버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화 내에서 그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의 직간접적인 언행을 통해 그가 어떤 학부모였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좋은 아버지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합니다. 또한 그는 이 영화에서 플래처 교수와 가장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가장 훌륭한 재즈 뮤지션이 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플래처와는 달리, 그는 가장 행복한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플래처가 말하는 성공에 집착하며 점점 정서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렇지만 이른 이혼으로 혼자 아들을 키우면서 여러 버거운 점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지만, 아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는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입니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서 팝콘에 건포도를 뿌릴 때 사실 아들은 그동안 건포도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그의 취향조차 오랜 시간 동안 모르고 있었죠. 그는 어떻게 아들에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떻게 공감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부분이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은 바로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 씬입니다. 가족들은 재즈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 재즈에 대해 부정적인 가치 평가를 내립니다. 친척이 미식축구에서 보인 활약을 과도하게 칭찬한 것과는 대비적으로 말이죠. 네이먼의 아버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을 두둔할 만한데도, 예의 없이 말하는 네이먼을 나무라기만 합니다. 사실 그는 그의 아들이 왜 그렇게 드럼에 집착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네이먼은 더더욱 플래처의 피드백에 집착하게 됩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말이죠.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네이먼이 플래처의 함정에 빠진 것을 눈치챈 아버지는 네이먼을 향해 달려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을 안아줍니다. 자리를 떠나자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네이먼은 다시 연주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광기에 찬 연주를 하는 자신의 아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교육의 주체는 교사라 하지만,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학부모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만약 학부모가 과도하게 자녀를 통제하거나 과도하게 방관을 한다면, 훌륭한 교사가 있어도, 훌륭한 교육을 받더라도 학생은 제대로 된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의 지지와 지원이 정말 중요한 셈이죠. 이런 관점에서 네이먼의 아버지는 좋은 학부모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관심을 갖고자 노력하고,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때로는 자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충고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혼자 아들을 키워야 하는 입장이기에 어머니의 역할인 공감과 지지를 하지는 못했지만, 좋든 싫든 그는 아들의 곁에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가정교육이 아닐까 싶습니다.      


학생: 네이먼     


 제가 보기엔 네이먼은 많은 결핍을 안고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어떤 요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교성도 적고 자존감도 낮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아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드럼에 집착합니다. 아마 이혼 후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순간이 드럼을 쳤을 때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내적 결핍을 드럼 연주로 채우는 네이먼 / 출처: 위플래쉬 스틸컷

 이와 같은 네이먼의 삶에 갑자기 플래처가 난입합니다. 네이먼은 나소 밴드에서 드럼 보조였습니다. 해당 밴드에서 네이먼은 어떤 교류도 없이 홀로 앉아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음악활동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고립되어 있던 그를 플래처가 발탁합니다. 그러니 네이먼은 플래처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공허했던 자아가 조금씩 채워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존감이 올라간 네이먼은 평소 눈여겨보던 극장 직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네이먼의 자존감은 그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여자친구와의 관계는 드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한다 / 출처: 위플래쉬 스틸컷

 그리고 첫 연습, 플래처는 자신의 템포에 맞지 않다며 네이먼을 향해 독설과 폭력을 휘두릅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던 플래처였기에 네이먼의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플래처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 대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연습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단지 인정받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경연대회에서 악보를 잃어버린 스튜디오 밴드의 메인 드러머 대신 메인 드러머 역할을 맡아 플래처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네이먼은 가족과의 식사자리에서 자신의 조력자가 되어야 하는 가족으로부터 고립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때 카메라는 마치 네이먼이 가족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듯이 묘사합니다. 가족들을 비출 때는 그들의 얼굴만을 비추지만, 카메라가 네이먼을 향할 때는 가족들의 뒷모습이 걸리는 듯이 촬영된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결핍을 말 그대로 피나는 연습과, 플래처의 인정으로 채우려고 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는 점점 폭력성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위대해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연습 중 피가 났을 때 얼음물에 손을 담그자, 얼음물이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을 통해 마치 피와 같이 그의 욕망이 강렬하게 퍼져나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연습을 하며 욕과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리고 시작된 더블 타임 스윙 연습. 플래처는 세 명의 드러머를 학대하며 자신의 템포에 맞추라 강요합니다. 이때부터 숨 막히는 드럼 연주가 시작됩니다. 아니, 이것은 연주가 아닌 학대, 말 그대로 위플래쉬(채찍질)입니다. 그 와중에 다른 연주자들은 서로 교류하지 않습니다. 플래처가 밴드 연주자들을 어떻게 고립시켰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온 손이 피투성이가 되고, 결국 네이먼이 메인 드러머의 자리를 확보합니다. 새벽까지 계속된 연주에 그는 비틀대며 돌아갑니다.      


 공연 당일, 자신의 자리를 코넬리에게 넘기려던 플래처에게 욕설과 함께 화를 내는 네이먼. 점차 그는 광기에 사로잡힙니다. 마치 플래처 교수처럼 말이죠. 그리고 교통사고를 당해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그는 경연대회 무대 위로 오릅니다. 연주가 제대로 될 리가 없죠. 그는 결국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되고 플래처는 그런 그에게 넌 끝났다고 선고합니다. 자아가 무너진 네이먼, 그는 이제 잃을 것이 없습니다. 그는 욕을 하며 플래처에게 달려듭니다. 교사의 모델링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무대에 오르는 네이먼 / 출처: 위플래쉬 스틸컷

 네이먼은 고민 끝에 플래처를 고발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우연히 플래처를 만나게 됩니다. 플래처와 대화를 하면서 그의 교육철학을 듣습니다. 네이먼은 평온한 플래처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 그가 플래처에게 느꼈던 이해받는 느낌을 다시 받은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드러머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플래처에게 제의를 받고 그는 자존감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 여자 친구에게 다시 연락을 보내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플래처의 함정이었습니다. 이미 연습했던 곡을 연주할 것이라는 플래처의 말과는 달리 아예 다른 곡을 악보도 없이 연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곡 한 곡을 완전히 망치게 됩니다. 플래처는 네이먼에게 다가와 다시는 재즈판에 발을 딛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네이먼은 쓸쓸히 무대 아래로 내려옵니다. 아버지의 위로를 받았지만 그는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그리고 솔로 연주를 시작합니다. 뭐하는 거냐는 플래처의 말을 무시한 채 자신만의 연주를 하는 네이먼. 신기에 가까운 드럼 실력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 연주가 자신의 템포에 맞았는지, 플래처는 네이먼의 연주에 맞춰 지휘를 시작합니다. 네이먼은 플래처와 함께 환상적인 연주를 펼칩니다. 많은 분들이 이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플래처가 맞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독기로 가득 찬 네이먼 / 출처: 위플래쉬 스틸컷

 그러나 생각해볼 점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네이먼의 실력은 향상되었고, 환상적인 드럼 실력을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교육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네이먼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현재 그의 자아를 채워줄 유일한 것은 드럼입니다. 그렇다면 드럼을 제외한 그의 삶을 어떨까요? 플래처로 인해 그는 드럼 외에 자신을 채워줄 유일한 존재일 것으로 보였던 여자 친구를 떠나보냈습니다. 오로지 드럼만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버렸습니다. 만약 드럼이 삶에서 없어진다면, 혹은 새로운 천재적인 드러머가 등장하게 된다면 그는 끊임없이 자학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플래처는 결핍이 많은 네이먼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을 드럼으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교사의 교육에 따라 한 인간이 어떻게 변해버리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따라서 학생으로서의 네이먼은 잘못된 교사에 의한 피해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사실 교사 한 명 만으로 한 사람의 삶이 좌지우지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네이먼과 같이 가정에서 공감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도 결핍을 지니고 있는 학생이, 그것을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교사를 만나 잘못된 교육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는 불행할 수밖에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교는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라 설파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끊어 버렸을 때 진정한 행복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집착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입니다. 이것에 집착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고통 속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세상의 모든 가치, 심지어 자기 자신이 영원할 것이라는 자아의 개념까지 모두 잊고,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경지를 깨달음이라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신체적인 고통은 고통에 집착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비참하게 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우리가 어떤 세속적인 가치를 얻지 못했을 때, 혹은 친구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을 때, 혹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 친구관계, 원하는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집착을 내려놓으라 했지 모든 것을 포기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을 위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이를 감내하라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옭아매려는 가치들에 휘둘리지 말라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좋음이 곧 나쁨이고, 나쁨이 곧 좋음인 것처럼, 모든 중생이 곧 부처이고 모든 부처가 곧 중생인 것처럼, 인간이 내리는 가치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네이먼 역시 위대한 드러머라는 가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교사: 플래처     


 플래처는 제 교육관으로 보았을 때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교사입니다. 그는 셰이퍼 음악학교에서도 가장 실력 있는 지휘자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고급스러운 연습실에서 그 학교 최고의 학생들을 스카우트해서 연주를 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각종 경연대회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좋은 결과를 내는 자가 가장 훌륭한 교사라 한다면 그는 가장 훌륭한 교사일 것입니다. 문제는 훌륭한 교사의 기준이 과연 당장의 좋은 결과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논리에 따른다면, 가장 대학을 잘 보내는 교사가 가장 훌륭한 교사일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 가장 빠른 길이 반드시 가장 좋은 길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통해 어떤 업적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교육은 한 인간을 성장하는 것을 돕는 과정입니다. 당장의 좋은 결과는 겉으로 보기엔 훌륭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빠른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은 결코 교육적이지 못합니다. 윤리적 문제도 야기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잠재력을 제한시킨다는 점에서도 문제입니다.     


 그의 교육 방식은 다음의 말로 요약됩니다. “내 템포에 맞지 않아.” 이 한 마디에 그의 교육철학이 담겨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템포”에 학생들을 맞출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개성과 창의성은 사장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그 “템포”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게 됩니다. 따라서 스튜디오 밴드의 모든 인원들은 플래처화 되는 것입니다. 물론 플래처라는 인물의 실력이 최고의 실력일 수는 있지만, 그와 동일시된 단원들에게서 나온 음악이 최고의 음악이 될 수 있을까요? 그저 또 다른 플래처가 양산되는 것은 아닐까요?     

채찍질을 휘두르는 플래처 / 출처: 위플래쉬 스틸컷

 두 번째 그의 철학은 “맞지 않아”라고 인원들을 평가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그의 단원들을 살펴보면 서로 거의 교류가 없습니다. 처음 네이먼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화를 내며 부당하게 단원을 내쫓습니다. 그때 그의 폭정에 대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플래처는 그 학생들을 고립시켰기 때문입니다. 드러머 셋 중에서 메인 드러머를 뽑는 학대 씬에서, 중간중간 바깥의 단원들을 비춥니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플래처는 단원의 자존감을 깎아내려 자신의 말만을 듣게 만들어 버립니다. 영화를 볼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새 유행하는 말이 있죠. “가스 라이팅” 이 말은 의학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본다면 스스로의 판단력을 의심하도록 만들어 판단을 타인에게 의존하게끔 조작하는 행위 정도로 정의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단원들에게 자신만이 옳다고 믿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면서 말이죠. 그래서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교육, 혹은 성장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의 이런 교육 방식은 그의 첫 등장에서부터 드러납니다. 그가 들어서자 군대를 연상케 하는 연출이 뒤를 잇습니다. 단원들은 차렷 자세로 고개를 숙입니다. 상하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연주하는 곡은 위플래쉬, 채찍질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는 친절한 모습을 보입니다. 마치 단체로 있을 때의 폭언과 폭력이 연극인 듯,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게끔 말이죠. 그리고 그는 연주자들을 뽑는 경연대회 자리에서도 자신의 명성에 먹칠하지 말라며 일갈합니다. 그 자리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님에도 말이죠.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단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이른바 모델링이 되어서, 단원 모두 그와 같이 신경질적이고 날카롭게 서로를 대합니다.      


 그는 부원들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없습니다. 심지어 처음으로 자신의 진솔한 감정을 이야기했던 자리에서조차 그는 거짓말을 합니다. 부원들은 플래처 자신의 완벽한 연주를 위한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어차피 셰이퍼 음악학교에서는 그의 밴드에 들어오고자 하는 학생들이 줄을 섰으니,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갈아치우면 그만입니다. 그런 그의 태도는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온 네이먼에게 그대로 연주를 시키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스스로에게 세뇌합니다. 최고의 뮤지션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이죠.     


 후에 네이먼과 우연히 만난 플래처는 자신의 교육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이 한계를 뛰어넘도록 돕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한계까지 학생들을 밀어붙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이런 교육관에는 한 가지 중요하고도 심각한 가정이 존재합니다. 학생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가정 말입니다. 그는 최악의 단어가 “Good Job”라고 말합니다. 그 단어를 통해 학생들은 스스로 안주하게 된다고 말이죠. 과연 그럴까요?      

플래처가 자신의 교육 철학을 담담히 이야기하다 / 출처: 위플래쉬 스틸컷

 물론 무조건적인 칭찬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잘한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칭찬을 통해 학생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단단한 자아를 형성시킬 수 있습니다. 남이 자신에게 하는 채찍질은 그 자신을 노예로 만들지만, 자신이 성장을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채찍질은 그 사람을 성장하게 합니다. 플래처는 자신이 채찍질을 해야 학생이 성장할 것이라 단정합니다. 그러면서 좌절을 이겨내지 못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하죠. 학생에 대한 존중과 믿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타인의 채찍질은 당장에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타인에 의한 채찍질 없이 성장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의 논리에 따르면 좌절을 이겨낼 사람은 타인의 채찍질 없이도 스스로 좌절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네이먼을 함정으로 초대한 플래처 / 출처: 위플래쉬 스틸컷

 잘못된 방향성을 지닌 교사가 열정을 갖게 되면 이와 같은 결과가 초래됩니다. 잘못된 전제에서 잘못된 결론이 도출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교육을 바라보는 시점은 이런 방향성과 어느 정도 결을 같이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참 교육”이라는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 교육”이란 어떤 잘못을 한 사람에게 어떤 폭력 행위를 동반한 복수를 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행위를 말하는데요, 교육이 폭력이라는 개념을 만나 진정한 교육이라는 표현이 되었다니 교육활동을 하는 입장에서 정말 씁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폭력을 통한 교정은 상대방의 자존감을 꺾고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변화라 할 수 없습니다. 폭력이 사라진다면 그는 똑같이 행동할 테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교육이란, 어떤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라기보다는 교사가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교육 대상이 자신 만의 올바른 방향성을 갖고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실제 교육현장에서 이를 실현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일단 학생이 많고, 해야 할 업무도 많고 수업도 많기 때문이죠. 그리고 교사가 어떤 극적인 변화나 성장을 이룩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다만 멀리서 학생을 지켜보면서 성장하도록 지켜봐 주고, 실패할 기회를 줌으로써 장기적으로 성장한다면 사실 그것이 교육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방식은 당장은 효과가 없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학생들도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학생은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존중감을 바탕으로 실패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저도 사람인지라 감정적으로 대할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지만, 이 방향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선설과 인본주의 심리학     


 플래처는 학생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최고의 성과를 거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마다하지 않는 교사였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죠. 저는 교육의 목적과 수단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래처의 목적은 학생이 한계까지 성장하는 것이며, 그를 위한 수단으로 가혹한 채찍질이라는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그런 그는 비관적인 인간관을 지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며, 외부의 자극이 없이는 구제할 수 없다는 견해를 보입니다.      


 저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봅니다. 인간은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선천적으로 타고났으며, 만약 제대로 된 환경과 교육,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그 인간다움이라는 본성은 꽃 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리학과는 다르게 저는 본성이 완성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씨앗과 같은 상태로 인간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죠. 그 씨앗이 제대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좋은 흙과 거름, 햇빛과 비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교육이죠. 따라서 저는 교육을 통해 그들의 잠재성, 특히 선한 본성을 키울 수 있도록 교육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본 심리학자가 바로 로저스(C.R.Rogers)입니다. 그는 인간의 기본적인 경향성으로서 자기실현을 지향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는 이를 “실현 경향성”이라 명명합니다. 그는 유기체로서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고 규정하며 독특한 개인적 행동방식을 창조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종 경험을 통해 내적인 실현 경향성을 제대로 발휘하여 “충분히 기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서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 “일치성”, “공감적 이해”의 방식을 활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위의 방법들은 인간이 자기실현적 존재로서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희망적인 인간관, 즉 성선설에 가까운 인간관에 기초합니다. (물론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아 본질을 규정하는 성격을 지닌 성선설과는 이론적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는 인간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상담자, 혹은 교사는 내담자 혹은 학생을 인간으로서 공감해 주고, 진실하게 대우하며, 어떤 조건화된 가치 때문에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긍정적인 존중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플래처와 비교해 본다면 인간에 대한 전제의 차이로 인해 교육 방법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은 카타르시스를 줌과 동시에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환상적인 연주를 해낸 네이먼, 그는 플래처에게 복수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반에 가서 플래처는 네이먼의 연주 실력을 인정하고 그의 연주에 따라 밴드 전체를 지휘합니다. 그리고 서로 완벽에 가까운 호흡을 보여줍니다. 카메라는 지휘하는 플래처와 연주하는 네이먼을 번갈아 보여주며 둘 사이의 감응을 쉴 새 없이 담아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플래처의 교육이 네이먼을 성장시켰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의 연주로 인해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강력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국 네이먼이 플래처화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플래처는 자신의 “템포”에 맞지 않는 연주는 연주로 보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 그가 네이먼의 연주에 반응했다는 것은 네이먼의 연주가 플래처의 “템포”와 완전히 일치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네이먼의 성장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을까요?     


 교육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우리는 12년간 정규 초중등교육을 받고, 몇몇은 4년간의 고등교육을 받고 자라납니다. 100세 인생의 20% 혹은 그 이상을 우리는 교육과 함께 합니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겼던 교육이 어떤 모습인지, 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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