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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Oct 14. 2022

삶의 목적과 행복의 상관관계, 소울

실존주의, 행복,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소울 겉핥기

소울(Soul, 2020)(감독: 피트 닥터, 출연: 제이미 폭스, 티나 페이 외)   

  

* 이 글에는 소울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두 영혼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 영혼은 자신이 정한 삶의 목적을 향해 주위를 살피지 않았고, 한 영혼은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삶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서로 너무나 다른 입장의 두 영혼이 만나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도 돌아볼 수 있는 영화이지 않나 싶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두 주인공인 조 가드너와 22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실존주의, 그리고 우리나라 교육과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성장

1) 조 가드너 – 삶의 목적에 집착하는 성인     

 영화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곡인 ‘When you wish upon a star’를 엉망으로 연주하는 학생들의 음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음악을 지휘하는 기간제 음악교사 조 가드너는 그 음악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는 그 음악뿐 아니라 그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그는 재즈 뮤지션이 꿈 입니다만, 번번이 오디션에 실패하여 자신의 꿈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정규직 제안이 들어옵니다. 정규직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자신이 꿈꿔왔던 재즈 뮤지션의 꿈이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그런 그의 내적 갈등을 다음과 같은 씬으로 표현합니다. 정규직 제안을 받은 직후 교실로 들어온 조 가드너. 그의 시선은 재즈 뮤지션을 담은 사진을 향해 있습니다. 즉 그가 삶에서 지향하는 것은 재즈 뮤지션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아이들의 엉망인 연주입니다. 이렇듯 그의 시각이 지향하는 바와, 그의 청각이 받아들이는 현실의 정보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조 가드너가 느낄 절망감은 크게만 느껴집니다.

조 가드너의 시선은 재즈 뮤지션, 즉 이상을 향해 있지만, 그의 청각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제자였던 컬리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그가 연주하고 있는 밴드인 뉴욕 최고의 재즈 밴드, 도로테아 윌리엄스 밴드의 피아노 연주자 자리에 대한 제안을 받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꿈을 찾을 기회를 얻게 된 조 가드너. 그는 공연장을 찾아가 훌륭하게 연주를 해냈고 피아노 연주자에 합격하게 됩니다. 그는 성공의 기쁨에 취해 주변의 위험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맨홀 뚜껑에 빠져 저 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삶의 목적 이외에 어떠한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조 가드너의 성향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이 지닌 삶의 목적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의 현실은 그가 지닌 삶의 목적을 중심으로 재구성됩니다. 물론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집착은 그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즉 삶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은 그의 삶은 실패한 삶이며, 행복하지 않은 삶처럼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삶의 목적 이외에는 어떤 관심도 두지 않는 조 가드너 / 출처: 소울 스틸컷

 그는 죽음 뒤의 세상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날, 죽을 순 없어” 저는 이 표현이 중의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날은 그토록 원하던 재즈 뮤지션으로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삶의 관점을 얻게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조 가드너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삶 이전의 세계인 “그레이트 비포”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롭게 태어날 영혼의 멘토 행세를 하게 되죠. 그가 행세한 멘토는 보겐슨 박사입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심리학자로, 그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면, 어떤 환자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그 그림을 뒤집음으로써 환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이는 마치 조 가드너가 앞으로 동일한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시각을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22를 만납니다. 그에게 있어 22는 삶의 목적을 갖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자신은 이미 삶의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22 역시 삶의 목적을 쉽게 가질 수 있을 것이며 그래야만 지구로 가는 티켓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22와 함께 그는 멘토의 명예의 전당으로 갑니다. 그리고 조 가드너의 인생의 일상적인 단편들을 조우합니다. 그러나 그 대단하지 않은 작은 순간들 중에는 그가 그 순간을 음미하고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카페에서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나, 컬리에게 드럼을 가르치는 모습, 지하철에서 따사로운 햇빛을 느끼는 모습 등등이 바로 그것이죠. 그러나 조 가드너는 그런 자신의 순간들을 삶의 목적이라는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의미’한 순간들이라 단정 짓습니다.


 이후 조 가드너는 22를 따라 육체와 영혼 사이의 공간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만난 문윈드를 통해 조 가드너는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우연한 사고로 22가 자신의 육체로, 그 자신은 고양이의 육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처음 본 것은 고양이의 시선으로 본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조 가드너는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고양이의 몸에 들어와 자신을 관찰하는 조 가드너의 모습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을 은유하는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온 이후부터 조 가드너와 22는 여러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저는 그 과정이 조와 22가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성장을 상징하는 것이 ‘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맨 처음 조 가드너가 그레이트 비포로 가는 과정에서 네모 형태의 여러 문을 지나치며 삶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후 지상으로 돌아와 22가 처음으로 뉴욕을 온몸으로 느낄 때 역시 병원 문을 나서고 나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이발소 역시 문을 열며 들어가고, 그곳에서 조 가드너는 이발사 데즈가 원래는 수의사를 꿈으로 삼고 있었으나 현재 이발사로도 행복하게 지낸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후 엄마의 양장점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 엄마와의 솔직한 소통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때 열려 있는 문은 조의 엄마가 조에 대해 어느 정도 열린 마음을 지닌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도로테아에게 가는 과정에서 테리가 만든 문을 통해 다시 그레이트 비포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역시 문을 통과하였고, 그곳에서 조는 삶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조 가드너는 문을 지나며 삶, 삶의 목적, 엄마와의 관계 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문은 공간과 공간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동시에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문이 닫혀 있다면 우리는 문 너머의 공간을 보거나 느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문을 연다면 우리는 새로운 공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영화에서의 문은 조 가드너가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볼 수 있게끔 하는 하나의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꿈에 그리던 연주를 하게 되었고, 연주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기실 거울을 보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입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던 재즈 뮤지션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칩니다. 그리고 이게 전부냐고 묻는 조 가드너에게 도로테아는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젊은 물고기는 바다를 찾는데,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이 바다인지 모르고 있더라는 이야기인데요. 우리는 행복을 마치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잘 찾아보면 행복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우리 곁에서 자신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로테아의 이야기를 들은 조 가드너의 얼굴 뒤로 화려했던 조명이 꺼집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향한 앵글은 그대로인 체 뒤의 배경이 공연장에서 지하철로 바뀝니다. 그리고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성공적인 데뷔를 한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자신이 비칩니다. 그가 꿈꾸던 장소인 공연장과 현실 속 피로에 쩔은 지하철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만 조 가드너는 동일합니다. 그는 인생의 기로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지만, 그 자신은 동일합니다. 결국 나의 행복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길을 가느냐가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습니다. 나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이전과 똑같은 현실이라도 나는 불행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영화는 극명한 장소의 대비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목적이라는 거창한 것도 사실은 그냥 내 삶의 일부일 뿐이며, 우리는 삶의 목적이라 부르는 순간을 포함한 모든 순간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 가드너는 재즈 뮤지션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치렀지만 그가 그리던 꿈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 모두 그 자신이 그대로 있음을 알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온 조는 22가 자신의 몸을 통해 느꼈던 삶의 짧은 순간들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지나쳤던 삶의 단편들을 회상합니다. 나를 목욕시켜주시던 엄마의 따뜻한 눈빛, 아버지와 함께 음악을 듣던 순간, 자전거를 타며 느꼈던 햇살과 바람, 어릴 적 불꽃놀이의 설렘, 컬리에게 영감을 주던 순간, 발치에 느껴지는 파도의 시원함, 창가에 비친 노을 등, 그동안 그가 간과했던 삶의 순간들, 사회적인 성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앵글은 그의 창문, 엄마의 양장점, 공연장, 뉴욕, 지구, 우주 등으로 확장되며, 삶을 이어가는 지금 이 순간 모든 생명의 경이로움을 표현합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과 그들이 누리는 삶의 순간이 지니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인위적인 목적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님을 영화는 울림으로 보여줍니다. 그렇게 조 가드너는 성장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그는 행복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2) 22 – 삶에 두려움을 느끼는 청소년     

 22는 아직 지구에서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영혼입니다. 삶의 불꽃이 모두 채워진 영혼만 지구로 내려갈 수 있는데 22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불꽃을 찾지 못했거나 안 한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그는 멘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직 세상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마치 아직 사회에 나오지 못한 청소년을 비유한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은 이미 책이나 기타 매체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세상을 실제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합니다. 청소년들, 특히 고3 혹은 대학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경우에는 22와 같은 두려움을 똑같이 느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조 가드너의 몸을 빌어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22가 성장하는 과정 역시 ‘문’을 여는 것을 통해 비유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22가 처음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 역시 병원 문을 나서고부터입니다. 이를 통해 22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형성합니다. 경험을 통해 말이죠. 그리고 그는 집에 도착한 후 집으로 찾아온 코니를 향해 문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코니의 연주를 들으며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열정을 직접 느낍니다. 그리고 조 가드너를 따라 이발소, 조 엄마의 양장점 등의 공간을 지나며 그는 간접적으로 실제 삶을 경험합니다.

작은 일상에 감동과 열정을 느끼는 22 / 출처: 소울 스틸컷

 그리고 다시 그레이트 비포로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 그는 어떤 집의 문 앞에 걸터앉아 고민합니다.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문턱에서 그는 그 문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아직 이 세상을 더욱 알고 싶어 합니다. 부모의 손을 잡고 즐거워하는 아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무엇보다 나뭇잎에 포개지는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자신의 손으로 내려오는 나무의 씨앗. 그리고 그전에 삶에서 경험했던 소소하지만 행복을 주는 경험을 떠올리며 그는 사소한 순간을 즐기는 것 역시 불꽃, 즉 삶에 대한 열정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그레이트 비포로 돌아간 22는 불꽃을 완성시킵니다. 그러나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조 가드너의 말에 22는 삶의 목적을 찾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문 앞에서 다시 그 문(그레이트 비포)으로 돌아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22

 영혼이 집착 상태에 빠지면 집착의 응어리들이 덩어리가 되어 영혼을 감쌉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목적이 아님을 깨달은 조 가드너는 그런 22를 집착에서 구하기 위해 22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22의 응어리들에서 멘토들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멘토들은 22에게 삶의 목적을 강요하며 22를 비난합니다. 심지어는 조 가드너까지 말이죠. 이 모습을 보며 청소년들에게 무조건 삶의 목적, 성공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작은 순간순간을 즐기며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청소년들의 모습이 어른들의 눈에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왜 열정이 없냐며, 왜 꿈을 갖지 않느냐며 그런 청소년들을 한심하게 대합니다.

삶의 목적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히게 된 22 / 출처: 소울 스틸컷

 특히 영화에서 영혼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22 역시 겉모습으로는 멘토들의 강요에도 상처를 받지 않은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그렇지만 집착의 응어리를 통해 22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처를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어른들은 분명 자신도 사춘기를 경험했음에도 사춘기 시기의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한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렇지만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비난, 강요 등을 모두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다만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죠.


 그렇게 내적으로 고통을 겪는 22를 찾아간 조 가드너. 그는 22가 느꼈던 현실을 상기하는 상징물로써 나무에서 떨어진 나무 씨앗을 보여줍니다. 그 씨앗을 본 22의 영혼은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저는 이 씨앗이 22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지구로 갈 준비를 마친 22가 조 가드너의 손을 잡고 지구를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모습과 나무에서 천천히 22를 향해 내려오는 씨앗은 같은 하강의 이미지를 상징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즉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청소년의 용기 있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현실에서 과연 어떤 삶을 살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갖고 현실을 즐기며 살아갈 때, 그는 무엇을 하든 행복하리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2. 실존주의와 영혼의 뛰어듦     

 영화에서 불꽃을 찾은 영혼들은 지구를 향해 뛰어내립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설정은 실존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모두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누구도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태어난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피동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선고’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피투성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기투성(企投性)의 존재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던져진 존재이지만 우리의 삶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 내던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그레이트 비포의 어린 영혼들 역시 그들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22 역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은 반드시 불꽃을 채워 지구로 떨어져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즉 그들이 지구에 떨어져야만 하는 상황을 통해 그 영혼들은 피투성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영혼들은 무작정 지구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지구에서의 삶에 대한 불꽃, 즉 일종의 열정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지구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영혼들은 뒤에서 누가 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구에 자신의 몸을 던집니다. 즉 기투성의 존재인 것이죠.


 영화의 22 역시 마찬가지로 지구로 떨어져야만 하는 피투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삶을 살아갈 불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멘토들은 불꽃과 삶의 목적을 동일시하며 삶의 목적이 필요하다고 그에게 강요하죠. 그러나 영화 말미에서 드러나듯 불꽃은 삶의 목적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영화 내에서 분명히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불꽃은 어떤 목적이나 능력과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열정, 원동력, 삶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22는 결정적인 불꽃, 삶에 대한 열정 하나를 찾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죠. 반드시 삶의 목적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역시 개인 실존이 지닌 자유와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삶을 잠깐 경험하면서, 길을 걷고 음악을 듣고 바람을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자연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는 과정에서 그는 불꽃을 찾기에 이릅니다. 이제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 삶에 뛰어들 준비를 마친 것이죠.     

결국 22 역시 세상으로 자신의 몸을 기투하게 된다.


3. 꿈을 강요하는 교육과정과 행복     

 교사 생활을 하면서 최근 들어 느끼는 점은 꿈이 없고 무기력해하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 학생들은 부족함이 없이 자랐기 때문에, 결핍에서 오는 강한 의지와 열정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어릴 적부터 장래희망을 명확하게 정해놓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직업군이 많지 않고 몇몇 직업군이 정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래희망을 고르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는 정말 다양한 직업군이 존재합니다. 그만큼 자신이 정말 잘할 수 있고 원하는 직업군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지, 그리고 그 직업에 대해 고려해야 할 사항들 또한 늘어났기 때문에 선뜻 장래희망을 특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당장 저 자신의 경우를 돌아보아도 대입에 있어 애초에 윤리교육과를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범대를 희망하고 있긴 했습니다만 수능 과목 중 윤리 과목은 단 하나도 선택하지 않았으며 윤리를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였습니다. 또한 대학에 들어가서 실제로 관련 학문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직업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이 달라 당황한 경험을 한 성인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성인들 역시 자신의 진로를 찾는데에 많은 시간을 쏟고, 그마저도 확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대입 준비를 위해 공부에만 매진하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희망 진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교육과정은 아이들의 장래희망, 즉 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수시 전형 중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자신의 희망 진로를 희망하는 학과에 맞춰 정교하게 세팅해야 합니다. 즉 꿈을 아직 찾지 못했거나 너무 많은 꿈을 갖고 있는 학생들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학생부 종합전형의 취지는 점수에 맞춰 학과에 진학하는 정시와는 달리, 단순히 수치화된 성적뿐 아니라 학생들의 적성과 재능에 정합적으로 맞는 학과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입시전형이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중등교육, 특히 고등학교에서의 교육이 대입에 맞춰져 있는 현재의 교육 실정상, 이러한 입시제도는 잠재적 교육과정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학생의 학교생활이나 교사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잠재적 교육과정이란 학교의 물리적 조건, 지도 및 행정적 조직, 사회 및 심리적 상황을 통하여 학교에서는 의도하고 계획을 세운 바 없으나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 학생들이 은연중에 갖게 되는 경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잠재적 교육과정은 반복적이고 장기적으로 배우게 되어 그 학습결과는 항구성을 지니게 된다고 합니다.* 즉 장래희망을 명확히 갖고 그에 맞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대입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이 실제 고등학교 생활에서 장래희망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잠재적 교육과정의 형태로 학생들에게 학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실제로는 희망 진로가 없음에도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성급하게 장래희망을 결정하게 되고, 심하면 자신의 성향과는 다른 진로를 희망한다고 거짓되게 행동할 수도 있게 됩니다. 제도의 이상과 개인의 진학에 대한 욕심 사이에서 제도적 괴리감이 발생하여 막상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최근 대학 입학 후 자퇴하거나 전과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심지어 서울대학교에서 지난해에만 4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자퇴를 했고, 연세대 700여 명, 고려대 800여 명이 자퇴를 하는 등 자퇴율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4년제 대학교에서 지난해에만 9만 7천여 명이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한편 교사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희망 진로에 정합적으로 맞는 학과에 진학하도록 하기 위해 상담 중 장래희망을 묻고, 그를 위한 활동에는 무엇이 있는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희망 진로가 마치 삶의 목적인 듯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 역시 그런 교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진로 상담을 하면서 꿈이 공무원이라는, 혹은 꿈이 없다는 학생들에게 공무원은 꿈이 아니라며, 꿈을 가져야 한다며 강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꿈이 없다고 답하는 학생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잠재적 교육과정의 영향으로 학생과 교사는 마치 장래희망, 즉 직업이 삶의 목적인 듯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삶의 목적은 삶에서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중학교 도덕에는 삶의 목적과 행복 단원이 존재합니다. 해당 단원에서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렇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인 역시 어렵습니다. 이 단원에서는 삶의 목적에도 위계가 있으며 그 목적을 따라가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의 목적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과정에서 마치 삶의 목적, 즉 합당한 꿈이 있어야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학습됩니다. 나아가 목적을 이뤄야 한다는 목적지향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행복이라는 것이 마치 삶의 목적들을 성취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일상에서의 행복, 소위 말하는 장래 희망이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의 행복을 도외시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영화 속 조 가드너처럼 말이죠.


 사실 행복을 고정된 목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집착하게 됩니다. 행복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는 행복이란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그에게 있어 행복은 어떤 목적을 성취한 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영혼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꿈 혹은 삶의 목적은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라 볼 수 있지만 그 자체는 추구의 대상이라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희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만 나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며 과연 내 영혼이 탁월하게 발휘되고 있는지, 성찰하며 매 순간 행복을 느끼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극 중 22는 삶의 목적이 없는 것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왜 다른 영혼들과 같이 삶의 목적이 없는 것일까. 사실 이 고민은 대한민국의 많은 학생들도 함께 느끼는 고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삶의 목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삶의 목적이 반드시 있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일상에서의 행복이라는 불꽃을 얻게 된 22는 막상 삶에 뛰어들기 위해 섰을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러한 22의 옆에서 그의 손을 잡은 조 가드너는 22를 위해 함께 지구를 향해 뛰어줍니다. 물론 지구까지 도달하는 것,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그 삶을 영위하는 것은 22 자신일 것입니다. 단지 조 가드너는 그가 자신을 세상에 기투할 수 있도록 동행해줄 뿐이었습니다.


 무엇이든 명확하고 단순했던 예전과는 달리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은 복잡합니다. 할 수 있는 자유가 너무나 방대하여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아이들이 세상으로 기투하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저는 어른, 특히 교사는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꿈을 가져야 한다며 꿈이 없는 그 학생을 평가하기보다는 학생의 옆에서 그의 선택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 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죠.

힘든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이 용기 있게 삶에 기투하기 위해 교사는 지지와 응원을 해줄 필요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교육학 용어사전-잠재적 교육과정)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12005&cid=42126&categoryId=42126)

**YTN 뉴스(작년에만 2천 명 넘게 자퇴... SKY에 대체 무슨 일이?)

(https://www.youtube.com/watch?v=brq1_GXMF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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