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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Aug 29. 2022

프레임에 갇힌 인간과 시리어스 맨

칸트의 인식론과 불교 이론, 현상학으로 시리어스 맨 겉핥기

시리어스 맨(A SERIOUS MAN 2009)(감독: 코엔 형제, 출연: 마이클 스툴바그, 리처드 카인드, 프레드 멜라메드, 사리 레닉, 아론 울프, 제시카 맥매너스 외)     


* 이 글에는 시리어스 맨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코엔 형제의 작품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 2007)’는 이 형제 감독의 가장 유명한 영화 중 하나죠. 이 감독의 영화 중에는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수상작인 ‘바톤 핑크(Barton Fink, 1991)’나 동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파고(Fargo, 1996)’, 동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인사이드 르윈(2013)’과 같은 명작들도 많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번 애프터 리딩(Burn After Reading, 2008)’과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만, 제가 시리어스 맨을 고른 이유는 이 영화가 어쩌면 코엔 형제의 세계관과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프레임(frame)’과 관련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때의 프레임은 단순히 ‘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지 레이코프(George P. Lakoff)가 정립한 개념으로서 사람이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 혹은 인지구조로서의 프레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험이나 독서, 혹은 매체나 타인과의 대화 등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여러 프레임들을 형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프레임을 벗어난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혼란을 겪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한 인물이 지닌 프레임을 벗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을 우화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프레임이라는 개념이 영화에서 어떻게 등장하고 있고, 실제 우리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 프레임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해결방안이 있을지에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칸트와 프레임     

 이 영화는 Rashi라는 유대인의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이 문장은 주어지는 사건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고 조언하고 있지만, 이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영화에서 펼쳐지는 모든 사건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일종의 프레임이 형성된 것이죠. 이후에 영화는 그 의미가 아주 모호한 한 사건을 비춥니다. 과거 한 유대인 남성이 눈보라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오는 길에 망가진 수레를 누군가 고쳐주어 그를 초대했다고 자신의 부인에게 이야기하는데요. 부인은 남편을 도와주었다는 그 사람이 3년 전에 죽었다는 소문을 친척으로부터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남편을 도와주었다는 그가 들어옵니다. 부인은 자신이 들은 소문이 진실이라 여기고 도와준 그 사람이 사탄이라고 판단하고 의심합니다. 남편은 도와준 사람과 부인 사이에서 당황해하고 있네요. 결국 부인은 도와준 그 사람의 가슴에 송곳을 내리꽂습니다. 도와준 사람은 가슴에 피를 흘리면서, 자신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며 유유히 일어나 집을 나섭니다.


 이 간단한 에피소드를 보며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을 되새깁니다. 물론 이 에피소드는 모호합니다. 도와준 그 사람이 실제 사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인이 망상에 걸린 것일 수도 있겠죠. 특히 이 부인의 경우에는 자신이 귀로 들은 이야기를 믿고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즉 자신이 들은 소문을 바탕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남편을 도와준 사람을 사탄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듣는다는 행위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에피소드가 끝나고 카메라가 처음 비추는 것은 주인공 래리의 아들 대니의 귓속이라는 점, 그 이후 건강검진을 수행하는 의사가 바라보는 곳 역시 래리의 귓속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귀로 소식을 접하는 래리 / 출처 : 시리어스 맨 스틸컷

 이러한 프레임과 관련하여 저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칸트 이전의 인식론은 경험론과 합리론으로 점철됩니다. 경험론은 진리란 우리가 경험을 통해 파악된 것이라는 입장으로, 이성적인 진리는 객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진리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합리론은 경험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불완전하며, 추론과 연역처럼 변화 가능성이 없는 보편타당한 인식은 이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칸트는 두 이론을 각각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경험 없는 지성은 공허하며, 지성 없는 경험은 맹목적이다.” 즉 경험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지성은 내용이 없고, 지적인 판단이 없는 경험만을 추종하면 맹목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내세운 이론이 바로 그 유명한 『순수 이성 비판』입니다.


 그는 이 이론을 통해 경험론과 합리론을 결합시키는데요, 먼저 그는 인간의 인식 체계를 설명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메타인지, 즉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인지를 하는지를 검토합니다. 그는 인간이 감성을 통해 경험을 받아들이고, 지성을 통해 받아들여진 경험을 정리하고, 순수 이성을 통해 이론적 체계를 수립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그는 인간은 인간 외부의 경험적인 감각 정보를 감성이라는 능력을 통해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경험론과, 최종적으로 보편타당한 인식을 위한 선천적인 판단은 순수 이성을 통해 가능하다는 합리론을 절충한 이론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 이론을 확장시킨다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지식조차 사람마다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래 그림과 같은 유명한 착시현상이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는데요.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아래 그림이 유리잔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같은 것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외부 대상이나 사건을 인식할 때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물 혹은 상황을 재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착시현상은 우리가 사물을 구성하여 인식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 출처: 구글

 이러한 이론에 따른다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프레임이라는 것은 사실 모든 사람들이 인식을 할 때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이 프레임이 없다면 사실상 의미 있는 인식을 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즉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관점이 바로 프레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이와 같은 프레임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주로 프레임이 타인에 의해 수동적으로 만들어질 때입니다. 즉 어떤 상황이나 사건, 혹은 대상에 대해 어떤 주체(언론이나 정치인 등)가 하나의 프레임을 씌워서 그 상황, 사건, 대상을 그 프레임으로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 때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상황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을 방해하고 상황을 프레임을 씌운 주체에게 유리하게끔 만들어 버려서 그들이 부당한 이익을 취할 수 있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주관적인 프레임을 최대한 넓힐 수 있도록 하나의 사건, 대상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보자면 ‘듣는다’는 것은 프레임 형성에 중요한 하나의 행위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처음 우리에게 하나의 프레임을 씌웁니다. 모든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라. 그렇지만 모호한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단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황을 최대한 단순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 속 가장 극단적인 상황은 주인공이 사건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행위를 통해 접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주인공 래리는 들으면서도 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의 프레임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는 주인공 래리의 프레임을 바탕으로 ‘프레임’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고자 합니다.     


2. 래리의 프레임

 이 영화는 래리 고프닉이라는 한 물리학 교수의 프레임에 따라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가 겪는 사건의 진상은 영화라는 프레임의 밖에 존재하고 있고, 관객은 그 전말을 전혀 알 수 없거나 혹은 뒤늦게 알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의 프레임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도 그의 프레임은 ‘모든 일에는 신의 의미가 존재하며 이 의미를 파악해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그가 겪는 시련을 따라가 보시죠.


 그의 첫 등장 씬은 그의 귀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는 병원에서 정기 건강검진을 받습니다. 그는 의사로부터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네요. 그리고 그는 클라이브라는 동양인으로부터 성적이 마음에 안 들며, 성적을 올려달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래리를 당연히 거부를 합니다만, 클라이브는 어떤 봉투를 하나 두고 갔네요. 그 안에는 거액이 들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딸은 매번 파티를 가야 하는데 화장실을 못쓴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아들은 티비가 나오지 않는다며 짜증을 부립니다. 그 짜증을 뚫고 거실로 들어온 그는 아내로부터 이혼식을 요구받습니다. ‘사이’라는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면서요. 당연히 래리는 놀랍니다. 그러나 부인은 “당신은 항상 그렇게 놀란 것처럼 행동하잖아요”라며 싸늘하게 말하곤 자리를 떠납니다. 그 와중에 그의 집에 얹혀사는 아서는 하루 종일 몸에 난 종기를 짜느라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집을 구할 생각조차 없죠. 그리고 종신 재직권 심사와 관련하여 동료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는데요. 어떤 투서가 와서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래리는 클라이브의 투서일 것이라 단정 짓죠. 그리고 클라이브의 아버지가 래리의 집으로 찾아와서 고소를 할 테니 성적을 올려달라고 협박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며칠 사이에 벌어집니다. 갑작스러운 시련들의 등장으로 그는 점차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하고 유대인으로서 그는 랍비에게 도움을 청하러 갑니다. 원래 만나고자 한 랍비는 만나지 못한 채 젊은 랍비로부터 이상한 주차장 얘기만 듣네요. 그 와중에도 일은 걷잡을 수 없습니다. 대니는 계속 티비를 고쳐달라며 짜증을 부리고 출근길에 접촉사고가 났으며, 어떤 레코드 회사에서는 요금이 미납되었다며 계속 전화를 걸어오고, 갑자기 ‘사이’가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랍비를 만나게 되죠. 그는 두 번째 랍비로부터도 그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는 불륜남의 장례를 자신의 집에서 치르면서 아서가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신 재직권은 투서로 인해 위태로울 것 같고, 아서는 체포되었으며, 레코드사는 계속 요금을 독촉하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그는 은퇴한 다른 랍비를 만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 그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종신 재직권을 얻고, 아서의 변호사 선임비는 뇌물로 받은 돈으로 해결하였으며 성적은 조작했고, 결혼생활도 지켜졌습니다. 그리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건강검진을 했던 의사는 불안하게도 결과를 지금 당장 직접 병원으로 오라고 주문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실제로 위와 같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게 된다면 저라도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래리의 입장에서 위의 일들은 사실상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들이었기 때문인데요. 그는 이러한 일들을 마주하면서 끊임없이 그 의미를 찾습니다. 특히 신의 의미를 말이죠. 이와 같은 시련들이 사실은 신의 뜻일 것이다라는 믿음과 그럼에도 이게 진짜 신의 뜻이 맞을까 하는 불신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영화가 시작할 때 나왔던 문구처럼, 모든 일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래리는 강의를 통해 양자역학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중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설명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예시입니다. 슈뢰딩거는 양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비판하기 위해 양자의 크기를 실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크기만큼 키운다고 했을 때에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가능한지를 예시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는 상자 안에 고양이를 죽일 수 있는 일종의 장치를 해놓고 상자를 닫을 경우, 우리가 상자를 열어 관측하기 전까지 고양이가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존재할 수 있겠느냐고 반증합니다. 이 예시가 영화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가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존재하는 상황이 바로 우리가 프레임을 쓰기 이전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장치를 관측할 때, 즉 프레임을 쓸 때 고양이가 살아 있는 것을 관측할 수도, 죽어 있는 것을 관측할 수도 있겠죠. 즉 우리가 어떤 프레임을 쓰느냐에 따라 상황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인데요. 뒤에 꿈에서 나오는 불확정성의 원리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래리의 시선을 따라 사건들을 마주했기 때문에, 래리의 프레임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프레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을 꼽자면, 영화 상에서 클라이브가 성적 조작과 뇌물 수수를 시도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종신 재직권 위원회에 속한 한 교수로부터 어떤 편지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교수는 걱정하지 말라며 래리를 안심시킵니다. 이때 래리는 자신 앞으로 왔다는 그 편지가 클라이브가 보낸 편지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편지가 안 좋은 내용일 것이라는 프레임을 쓰게 됩니다. 관객 역시 마찬가지이죠. 그리고 부인과 불륜을 벌인 ‘사이’의 사망 후 래리의 부인이 래리에게 귓속말로, 종신 재직권을 따기 위해 사이가 편지를 썼다고 말합니다. 이미 종신 재직권 위원회의 투서는 좋지 않은 내용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부인과 바람이 난 ‘사이’에게 좋지 않은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래리는 ‘사이’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을 것이라 단정 짓습니다. 심지어 '사이'는 영화 내에서 시종일관 래리에게 긍정적인 모습만을 보이는데도 말이죠. 결과적으로는 아마도 그 편지 때문에 래리가 종신 재직권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즉 편지의 내용은 악성 투고가 아니라 긍정적인 내용이었다는 사실이 영화 말미에 드러나죠. 이처럼 관객은 래리의 프레임으로 래리의 상황을 들여다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사실로 인해 그 프레임이 깨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합니다.

래리의 프레임으로 보면 뻔뻔한 불륜남일 뿐인 “사이”  / 출처 : 시리어스 맨 스틸컷

 그리고 이와 같은 래리의 프레임은 세 번에 걸친 그의 꿈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첫 번째 꿈에서는 죽은 ‘사이’가 나타나 자신과 부인이 관계를 맺었다며 래리를 조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퇴한 랍비인 마샤크를 찾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꿈에서는 우연히 알몸을 본 게 된 옆집 부인과 성관계를 맺습니다. 이 모든 시련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그의 관점이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세 번째 꿈에서는 뇌물로 받은 돈으로 아서를 다른 곳으로 피난시키고, 그런 아서와 자신을 옆집에 살고 있는 인종주의자로 보이는 백인이 총으로 쏘아 죽는데요, 아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관점, 그리고 옆집 남자에 대한 그의 관점 등이 복합적으로 꿈에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래리는 신실한 사람(sireous man)이 되고자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고뇌가 꿈으로 드러나며 후에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의 프레임이 그의 현실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습이네요.


 결과적으로 래리가 겪는 모든 시련이 시련으로 관객에게 다가온 것은 관객이 사실상 래리의 프레임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내의 불륜은 비록 아서의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래리는 다시 가족을 지킬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종신 재직권을 얻었으며, 아서의 문제 역시 (물론 부정한 방법이었지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부정적인 프레임으로 받아들였던 모든 일들이 결론적으로는 잘 풀린 셈인데요, 그는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정작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던 건강 검진의 결과는 매우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예상되면서 그의 프레임이 얼마나 세상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 보입니다.      


3. 랍비의 프레임

 이 영화에서 랍비는 마치 래리가 처한 모든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할 존재처럼 그려집니다. 그렇지만 래리는 두 명의 랍비를 만나면서 그가 “원하는” 어떠한 해결책도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두 랍비들의 조언은 아무 소용이 없는 조언이었을까요?


 첫 번째 랍비는 래리가 만나기 원하던 랍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등장할 때 마치 중요한 존재가 등장하듯, 크게 울리는 소리, 검은 화면과 함께 “첫 번째 랍비”라는 자막으로 소개됩니다. 래리는 자신이 상담하길 원하는 랍비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문은 뒤에서 열립니다. 당시 래리는 성적조작 혹은 뇌물수수의 시련, 아들과 딸들의 짜증 섞인 요구, 아내의 이혼 요구, 종신 재직권 문제 등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찾아온 시기였습니다. 그가 원하지 않은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상황이네요.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랍비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경험이 없는 젊은 랍비라는 프레임이 먼저 씌워진 것이죠. 물론 그 랍비의 이야기가 정돈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면, 올바른 관점을 지닌 사람 만이 진리를 바라볼 수 있다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지금 래리에게 일어나는 일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사실 래리가 자신의 프레임을 바꾼다면 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래리의 프레임으로 그 랍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랍비의 말을 불신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래리의 프레임을 영화가 영화적 프레임 속에서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랍비는 그가 만나고 싶어 했던 랍비, 나트나입니다. 그 사이에 래리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레코드 요금이 미납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사이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두 번째 랍비를 만날 때 카메라는 두 번째 랍비 앞에서 머리를 감싸고 있는 래리를 하이앵글로 비추고 있습니다. 첫 번째 랍비를 만날 때는 미들 앵글로 촬영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만큼 절망을 느끼고 있는 그의 심리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런 래리에게 두 번째 랍비는 한 치과의사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합니다. 한 치과의사가 한 환자의 치아 본을 뜨는데 아래 앞니 치아 뒷부분에 유대어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의사는 밤잠을 설쳐가며 그 문구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 치과의사는 랍비 나트나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랍비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신의 계시일까요? 모르겠네요. 사람들을 도우라는 뜻일까요? 그거 괜찮겠네요” 이 대답을 듣자 래리는 당황해합니다. 이 역시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일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합니다. 그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즉 그의 프레임이 그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죠. 신은 답을 주지 않고, 의미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두 번째 랍비의 프레임입니다. 즉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며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그냥 놓아주라는 것이죠. 이는 첫 번째 랍비가 이야기한 올바른 관점을 지니라는 조언을 구체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맨 처음 등장했던 문구, 즉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미스터리를 받아들이세요”라며 이상한 말을 했던 클라이브의 학부모의 말도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래리는 상담 업무에서 은퇴한 세 번째 랍비, 마샤크를 찾아가 상담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특히 마샤크는 랍비가 아닌 이름 자체가 영화에 자막으로 등장합니다. 그만큼 래리에게 있어 중요도가 높은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 시기에 래리의 상황은 극에 달합니다. 동생 아서는 체포되었으며, 종신 재직권 문제는 계속되고 있고, 영화 속 두 번째 꿈에서 마샤크를 찾아가라며 자신을 폭행하는 ‘사이’를 만나는 등 심리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는 로우 앵글로 래리를 비추며 그의 절박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래리는 마샤크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계속 좌절되고 있네요. 대니의 성인식 이후 마샤크를 찾아가는 의례가 있었는데요. 그때 대니가 그 마샤크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넓은 방에는 치아와 관련된 서적이 의미심장하게 놓여 있었고, 대니는 두려운 표정으로 방을 지나 마샤크 앞에 앉습니다. 그리고 마샤크는 말합니다. “진실이 거짓으로부터 밝혀질 때에 그리고 네 안에 있는 모든 희망이 사라질 때에”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노래 somebody to love의 가사를 말하며, 수업 중 압수당했던 대니의 카세트를 돌려줍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삶이 공허해지면 누군가를 사랑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노래는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마샤크의 프레임은 결국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랍비의 프레임은 래리의 진리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래리의 프레임과는 맞지 않습니다. 래리는 물리학 교수라는 직업적 특성상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고자 애씁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렇게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지 말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평가하는 래리  / 출처 : 시리어스 맨 스틸컷


4. 프레임에 대처하는 불교의 방법     

 래리는 여러 시련들이 발생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는 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래리의 프레임은 그가 귀로 들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듣지 않은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래리의 모든 시련들의 전조증상은 영화 프레임 밖에 있었습니다. 다만, 래리는 그것들을 담을 수 있는 프레임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는 눈앞에 어떤 일들이 있음에도 그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 즉 보거나 듣지 못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두려워하는데요. 그것이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이혼식을 요구하면서 그가 놀라는 모습을 보자 항상 그렇게 놀란 모습을 보인다고 래리를 비난합니다. 이는 평소 래리가 부인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들은 마약을 하고 있으며, 동생 아서는 도박과 남성 매춘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의 딸은 파티를 한다는 말만 할 뿐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즉 그의 프레임에 가족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즉 그가 처한 문제들은 평소에 그들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의 프레임 밖에서 진행된 모든 일들이 그의 프레임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는 고통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래리의 고통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인도의 승려 세친으로부터 형성된 유식(唯識) 사상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의 작용으로만 존재하며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즉 일체 유심, 모든 현상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말인데요.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릇된 마음에서 발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자기중심적인 잘못된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통에 휩싸인다는 것인데요. 극 중 래리의 프레임이 그러합니다. 그는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의미”에만 집착하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다양한 상황들이 발생하자 고통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통의 원인을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의 자아를 기준으로 세상사에 가치를 매기고 그 가치에 매달리는 집착으로 인해 우리의 고통이 발생하므로, 가치 판단을 내려놓고, 자아(이기적 욕망,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개인의 프레임)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인데요. 요샛말로 정신승리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물론 정신승리라는 단어에는 그 주체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유식사상의 해결책은 그것을 뛰어넘어 자아라는 프레임을 없애고 아예 가치를 매기지 않고 집착도 없는 일종의 관조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자아라는 프레임으로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무아(無我)의 개념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현실에 적용하기 쉬운(?) 개념으로 바꿔서 설명한다면, 아마도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먼드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판단 중지(Epoche)의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판단 중지란, 말 그대로 현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기존에 지니고 있던 가치관이나 관습적인 생각, 이론들을 제외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선입견, 고정관념 등 우리가 지닌 판단 체계 혹은 프레임을 최대한 잊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과정을 말합니다. 영화 시작 때 등장한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도 이와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학교폭력에 이 이론을 적용시켜볼 수 있겠네요. 일반 학교에서 학교폭력은 흔하게 발생하진 않습니다. 다만,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넘겨짚고 공격적으로 반응하면서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뒷담화와 같은 언어폭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사자끼리 대화하면 사실 별것 아닌 일도 제삼자인 다른 친구의 프레임이 씌워진 소문을 통해 어떤 친구의 이야기가 전해지면 그것이 왜곡되어 뒷담화, 혹은 왕따와 같은 형태의 폭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폭력을 담당하는 교사의 경우, 관련 당사자들에게 상황을 최대한 객관화하여 볼 것을 조언합니다. 혹시 자신이 상대방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화할 의향은 있는지 확인하고, 실제로 교사 대동 하에 대면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 오해가 쌓인 부분도 풀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비단 학교에서만 벌어지는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혹은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힘든 상황 속에서, 이와 같은 일들은 흔히 벌어질 것입니다. 이때, 현재 벌어지는 상황들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지, 아니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여러분 자신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길 조심스레 권해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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