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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Dec 27. 2022

운명을 통해 자유의지를 역설하는 테넷

칸트의 이론을 중심으로 테넷 겉핥기

테넷(TENET, 2020)(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로버트 패틴슨, 엘리자베스 데비키, 케네스 브래너 외)     


* 이 글에는 테넷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번 영화 테넷은 영화의 플롯이나 표현방식 등에 있어 난해한 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여러 의미로 충격을 받았는데요. 이 영화에 대해 곱씹을수록 영화 속 대사처럼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보다는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다시 보니 이 영화는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영화이며, 운명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이미지를 통한 인물의 상징성과,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물의 다의성을 바탕으로 영화 속에서 이야기하는 운명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인물의 상징성     

프로타고니스트
추상적인 주인공, 프로타고니스트 / 출처: 테넷 스틸컷

 주인공 프로타고니스트는 극 중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입니다. 제 생각에 그는 강한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씬에서 그는 뒷모습으로 특정한 공간들을 걸어 들어갑니다. 마치 그 공간을 침입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이런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능동적이고 망설임이 없는 자입니다. 그는 옳은 신념이 있다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그것을 주도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극 중 명칭 그대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주동자)입니다. 그는 영화 내내 감정에 휘둘리거나 내적으로 크게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극에서 가장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주인공의 인물인 것처럼 보입니다. 감독 역시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극에서 가장 강렬한 변화와 극적인 장면들은 조연인 닐과 캣을 통해 보여줍니다. 즉 감독은 극의 드라마를 조연들에게 분산시키고, 주인공은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만을 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감독이 강인한 의지와 관련된 주제의식을 이름도 없이 단지 프로타고니스트라고 불리는 이 추상적인 인물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테넷(Tenet), 즉 신념은 일종의 공동선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희생도 불사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극 초반 자신의 임무를 완료했음에도 오페라하우스에서 잠이 든 민간인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공간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때 잠이 든 민간인은 테넷 요원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 일반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극의 가장 마지막, 프로타고니스트는 터지지 않은 폭탄, 아무도 몰랐던 위험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진짜 폭탄이라 칭합니다.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강한 의지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러나 극에서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즉 과거의 모든 사건은 일어난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관점인데요. 이는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일반적인 의미의 자유의지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개념인 셈이죠. 이 대비를 영화에서는 프리야와 프로타고니스트의 대비로 보여줍니다.


 프리야와 프로타고니스트는 일단 같은 목적, 즉 미래 세력이 과거의 엔트로피를 역전시키는 것을 막는다는 목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화면상 그 둘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토르를 만나러 가기 전 프리야와 프로타고니스트는 한 건물의 여러 기둥들 안쪽 공간에서 나란히 걸어갑니다. 후술 할 닐과 프로타고니스트의 공간구조와는 상반된 구조인데요. 프리야와 프로타고니스트가 대화할 때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사토르를 제거하겠다는 말을 할 때 프로타고니스트는 길의 밖으로 살짝 이동합니다. 이곳에서 프리야와 프로타고니스트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극의 후반에서의 그 둘의 대화를 보게 되면, 그 둘은 여전히 나란히 걷고 있지만 그들의 배경은 다르게 묘사됩니다. 프리야의 얼굴을 비칠 때 프리야의 얼굴은 언덕 혹은 건물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반면 프로타고니스트의 얼굴은 배경이 되는 언덕 위쪽으로 솟아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프리야는 어떤 거대한 계획 안에 위치한 인물, 혹은 정해진 운명에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프로타고니스트는 계획 밖에서 계획을 주도하는 인물임과 동시에 능동적으로 운명에 따르고자 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화면으로 보여줍니다. 그러한 화면 구성 안에서 프로타고니스트는 프리야에게 캣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동반되는 행위입니다. 이에 프리야는 약속은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즉 그녀는 약속이라는 행위, 즉 개인의 의지를 동반한 행위는 정해진 결과 혹은 운명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대비는 운명과 자유의지에 관한 영화의 주제의식을 보다 명료하게 말해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프로타고니스트의 조력자, 닐 / 출처: 테넷 스틸컷

 조연인 닐은 프로타고니스트의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합니다. 그는 프로타고니스트의 주도적인 계획에 대한, 그리고 운명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유능하게 수행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극 후반에 밝혀진 바와 같이, 프로타고니스트와 마찬가지로 옳은 신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래에서 온 인물로, 미래로부터 사건이 벌어지는 현재까지 인버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현재와는 다른 타임라인에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배경을 통해 보여주는데요. 영화를 보다 보면 프로타고니스트와 닐은 항상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그들의 개인 클로즈업 쇼트 혹은 둘이 함께 있는 미디엄 쇼트 상의 배경이 상이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첫 만남에서 둘이 차를 마실 때에도 서로의 배경이 다르게 잡힙니다. 또한 옥상에서 둘이 이야기할 때에 닐의 배경은 도시, 프로타고니스트의 배경은 바다로 확연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공항버스에서의 대화에서도 닐의 배경은 승객을 비추었고, 프로타고니스트의 배경은 도로를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둘이 나란히 걸어갈 때에도 건물의 기둥을 사이에 두고 닐은 건물 쪽에, 프로타고니스트는 도로 쪽으로 걷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로터스 작전이 끝난 이후에서의 호텔룸에서도 프로타고니스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닐은 집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프로타고니스트와 닐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화면은 그 둘을 분리하여 담는다 / 출처: 테넷 스틸컷


 닐이라는 인물은 아마 미래에서 프로타고니스트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며, 극 중에서 그의 모든 서사는 프로타고니스트와 함께일 때 완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닐이 프로타고니스트의 작전에 적극적으로 따르고, 테넷의 룰이 우리의 룰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제 생각이지만 아마 프로타고니스트는 미래에 닐과 공동선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았을까, 그래서 닐 자신 역시 그런 프로타고니스트와 마찬가지로 희생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았습니다.


 닐은 영화 상에서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그의 대사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닐은 극의 마지막, 프로타고니스트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러 가는 길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라는 말은, 일어난 일을 방관하려는 핑계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이야기를 말이죠. 저는 이를 통해 이 영화가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염세주의가 아닌, 오히려 주어진 운명에 스스로 몸을 맡기고 중요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의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자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를 얻게 되는 가장 극적인 캐릭터, 캣 / 출처: 테넷 스틸컷

 자유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는 캣은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는 인물입니다. 그녀가 등장하는 초반 장면을 보면 그녀는 지속적으로 세로 혹은 가로 이미지의 배경에 갇혀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처음 프로타고니스트와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뒤를 보면 세로의 이미지, 그리고 네모의 이미지가 그녀를 가두고 있습니다. 캣이 아들의 학교 앞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그녀의 배경에 학교의 철창이 비치며, 요트에서 사토르와 대화할 때에는 그녀의 배경으로 바다가 보이지만, 그 바다는 요트의 가로 난간에 가로막혀있어 그녀를 가두는 이미지가 영화 속에 지속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그녀는 예술 작품의 진위를 가리는 직업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녀는 아름다움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아름다움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자유와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그녀의 영혼은 사토르라는 인물의 소유물로 전락한 것처럼 그려집니다. 그랬던 그녀는 프로타고니스트를 만나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프로타고니스트와 함께 하는 것은 도박이었지만, 사토르에게 총을 맞고 회복된 이후에는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사토르를 죽인 후 자신을 가로막고 있었던 요트 난간의 쇠줄을 끊어 버리고 그 밖으로 사토르를 밀어버립니다. 그녀의 복수와 자유가 실현된 순간입니다. 극 초반 수동적이었던 그녀는 이제 자유를 향유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변모한 것입니다.     


사토르
전형적인 악역, 사토르 / 출처: 테넷 스틸컷

 이 영화의 빌런인 사토르는 악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고자 하는 존재이며, 만약 어떤 것이 자신의 소유가 되지 못한다면 누구도 소유해서는 안된다는 뒤틀린 사상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인인 캣 조차 소유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의 첫 등장씬에서 캣과 프로타고니스트의 불륜을 의심하며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습니다. 후술 할 예정이지만, 캣에게 있어 바다는 자유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토르의 배경에 바다가 있다는 것은 사토르가 캣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캣에게 총을 쏘기 전, 그녀와 갈등을 일으키던 창고를 보면, 캣의 배경은 깔끔한 반면, 사토르의 배경에는 각종 총기가 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지닌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가 현생 인류의 배신자라는 점 역시 배경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프로타고니스트가 사토르를 바다에서 구해준 후 둘이 요토 안 사토르의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시면, 프로타고니스트는 책장 안쪽에 위치하여 관객은 마치 프로타고니스트가 그 책장의 책들을 대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책이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현대의 인류가 쌓은 지식의 보고입니다. 즉 인류의 성취와 역사를 담은 것입니다. 그에 비해 사토르는 책장으로부터 벗어난 위치에 앉아 있습니다. 이는 그가 과거로부터 현세대로 이어져오는 역사의 바깥에서 현생 인류를 배신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물의 다의성     


 이 영화에서는 바다라는 배경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통상 바다를 생각할 때 물이 흐르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이 영화는 시간의 순행과 역행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바다가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또한, 바다 혹은 물은 문학적으로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물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육지에서 사는 존재가 물속으로 들어가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죽음의 이미지를 합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의미 또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과 죽음의 관계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죽은 사람이 강을 건너 저승으로 가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물과 부활은 종교의식 중 물로 세례를 주는 행위를 통해 신자로 거듭 태어나는 형태로 상징됩니다. 이처럼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 물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 각기 다른 형태로 드러납니다.


프로타고니스트

 처음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작전에서 프로타고니스트가 자살약을 먹은 후, 그의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으로 찍은 화면 위에 영화 타이틀이 올라갑니다. 주인공이 죽는 장면이 영화의 시작이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뒤이어 그는 정신을 차리는데요.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바다 위를 가르는 한 배의 침실이었습니다. 즉, CIA 요원으로서의 프로타고니스트는 죽고 테넷 요원으로서의 그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깨어난 그에게 테넷 요원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사후세계에 잘 왔다는 말을 건네는 장면을 통해 더욱 명확해집니다. 이를 통해 프로타고니스트에게 있어서 물 혹은 바다는 부활, 혹은 새로운 탄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극 초중반의 캣은 벼랑 끝에 내몰려 있는 위태로운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그녀는 과거 베트남 여행에서 아들과 함께 요트로 돌아오던 중 바다를 향해 뛰어드는 여성을 보며 ‘자유’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암울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의 역할을 바다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에게 있어 물은 ‘자유’ 혹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구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극 초반 사토르가 프로타고니스트를 의심할 때, 그녀의 배경에는 바다가 있었으나 요트의 난간이 바다를 가로막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극 후반에 이르러 그 난간의 쇠줄을 끊어 버리고 사토르를 바닷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 바다에 뛰어듭니다. 결국 자유를 얻는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녀를 가두던 배경의 이미지는 더 이상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기다리던 학교 앞 철창 역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토르

 사토르 역시 바다를 배경으로 영화 상에 자주 등장합니다. 제 생각에 사토르에게 있어서 바다는 ‘운명’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토르는 이미 암으로 인해 죽어가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운명과는 달리 그의 소유욕은 끝이 없죠. 자신이 소유할 수 없다면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거대한 운명 속에서 자유의지를 포기한 인간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운명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체념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는 온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미래 세력의 제안을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물에 빠지는 장면은 모두 두 번 등장하는데요. 그 두 장면 모두 캣에게 떠밀려서 빠집니다. 즉 그는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운명에 떠밀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운명에 절망하고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자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또한 그의 운명이었을까요.     




운명과 자유의지


 이쯤 되면, 이 영화는 운명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들은 모두 일어난 일들, 즉 정해진 대로 이뤄진 일들이라는 것을 영화 말미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통상 우리는 운명과 자유의지는 대비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마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영화인 것처럼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모든 것이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면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요?


 만약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이 유전자, 혹은 환경에 의해 필연적으로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죄를 짓든, 착한 일을 했든 그 일들은 정해진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책임을 물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테넷 요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세계의 종말을 막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다는 얘기는 테넷 요원들은 이 세상을 지키는 행위가 단순히 결정해져 있는 행위가 아니라 무언가 의미 있는 행위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와 같은 테넷 요원들의 태도는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자유의지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선 자유의지는 심리학적 용어로 “자신의 행동과 의사 결정을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됩니다. 이때의 자유의지는 내 행위를 통제하는 역할로서의 자유의지를 지칭하며, 결정론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든 것이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의 자유의지 역시 개인의 유전적 성향이나 환경 등에 의해 결정되어 있을 것이 이러한 주장의 근거입니다. 이 논리는 1980년대 캘리포니아 대학의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t, 1916 – 2007)에 의해 진행된 리벳 실험에 의해 지지됩니다. 이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뇌전도(Electroencephalogram, EEG) 검사를 통해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시계를 보도록 했으며, 시계를 보는 동안에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버튼을 누르도록 했습니다. 실험 결과, 실험 참여자들이 ‘마음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버튼을 누르기 300-500 밀리초(ms) 전에 손가락의 움직임과 관련된 뇌파가 나타났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통해 뇌 반응은 인간의 의지에 앞서며, 버튼을 누르는 행동은 인간의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뇌의 행동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나 운명론 혹은 결정론을 수용한다고 해서 자유의지를 완전히 부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기본적으로 운명론을 인정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칸트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고전 물리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이기 때문에 기계론적 자연관, 즉 무수한 원인에 따라 필연적인 결과가 존재한다는 자연관이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신체가 현상계(물리적 현실 세계)에 속해있기 때문에 필연적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입장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그는 인간의 정신은 예지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과법칙을 벗어나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입장도 동시에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자유의지란, 자연적인 경향성을 초월하여 이성을 통해 스스로 수립한 도덕 법칙에 따르려는 자율적인 의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 행위의 결과는 필연적 인과법칙에 의해 정해져 있으므로 인간은 결과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 행위의 동기는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있어 자유의지는 필연적인 결과와는 독립되어 있는,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이성적 판단에 따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그의 자유의지는 단순히 신체의 행위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수준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운명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단순히 운명에 체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단 운명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종의 한계상황입니다. 지금 내 앞에 일어난 일들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칸트는 단순히 주어진 운명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미 정해진 운명은 받아들이되,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과는 우리의 손을 떠나 있지만 우리의 의지, 즉 옳은 행위를 선택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영화 상에서 사토르는 주어진 운명 앞에 모든 것을 체념한 인물입니다. 그의 최후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빠져 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모든 운명을 받아들이되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행위를 위해 직접 운명에 뛰어들기를 선택한 프로타고니스트는 운명에 스스로를 기꺼이 내던졌습니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어서 사토르와 프로타고니스트는 동일하지만, 그 운명에 대한 태도가 수동적이나 능동적이냐에 따라 그들의 행위는 달라졌습니다. 극의 마지막에서 닐은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체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옳은 일을 끝마쳐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그 운명을 향해 자신의 걸음을 묵묵히 옮길 뿐이었습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운명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운명을 바꾸려고 스스로를 괴롭힐 것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 안에서 어떤 것이 옳은 행위인지를 판단하고 능동적으로 선택할 때 우리는 옳은 선택, 행복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가능하다는 강한 신념(Tenet)을 갖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리학용어사전,

 자유의지(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8634&cid=41991&categoryId=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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