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윤리, 정보 윤리, AI 윤리, 사랑으로 프리 가이 겉핥기
프리 가이(Free Guy 2021)(감독: 숀 레비, 출연: 라이언 레이놀즈, 조디 코머, 타이카 와이티티, 조 키어리 외)
* 이 글에는 프리 가이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입니다. 부담 없이 볼 수 있고 적절한 유머와 화려한 볼거리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킬링 타임 용으로 보기에 이 영화가 던져준 윤리적인 질문들이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구조는 단순한 듯 복잡합니다. ‘프리 시티’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어떤 행동이든 허용이 되는 가상의 도시 프리 시티에서 실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성취를 이루며 게임을 즐깁니다. 그곳에는 플레이어뿐 아니라 NPC(Non-Player Character)들도 존재합니다. 그들은 프로그래머가 정해준 프로그램대로 하루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NPC를 괴롭히거나 심지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가이 역시 NPC 중의 한 명입니다. 가이는 여느 때처럼 프로그램대로 살아가다가 몰로토프 걸이라는 여성 플레이어를 만납니다.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들으며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요, 이제 그는 NPC가 아닌 자신 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주인공으로서 프리 시티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저는 총 5가지의 주제로 이 영화를 바라보았는데요, 물론 5가지 주제의 깊이나 전문성이 모두 균일한 것도 아니고,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서 혹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 사회에서 고민이 꼭 필요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풀어 내보고자 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가이는 은행원이라는 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월급으로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신발 하나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게임 설정 상 그 신발은 플레이어들의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NPC인 그는 구조적으로 그 신발을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이 모든 설정이 자본주의를 풍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고 많은 직업 중에서 가이가 은행원이라는 점, 그리고 가이는 평생을 벌어도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살 수 없다는 점, 플레이어들은 NPC들의 돈을 갈취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임 밖에서 역시 이와 같은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프리 시티를 만든 회사인 수나미의 수장, 앤트완은 돈과 숫자로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기고 재단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게 기업가 윤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돈을 향한 그의 과도한 행동을 통해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는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극의 마지막, 키스와 밀리가 만든 ‘라이프 잇 셀프’의 서버를 파괴하려는 앤트완 앞에 밀리가 나서서 한 가지 제안을 내놓습니다. 그 서버만 남겨 놓는다면 어떤 소송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을 말이죠. 앤트완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수백만 달러를 포기한단 소리잖아. 왜 그런 짓을 해?” 그에게는 돈 이외의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밀리의 그러한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밀리는 그런 앤트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날 증명하는데 돈이나 명성은 필요 없어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에 근거한 사상입니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할 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균형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이죠. 이런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이라 믿게 만들고, 사회적 협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보이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본성을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이기심을 조장하는 사회에서도 선한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요?
이 영화의 마지막은 가이와 그의 친구 NPC들이 프리 라이프라는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곳에서는 가이와 버디가 지켜야 할 돈도, 은행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할 일이 없어진 버디는 가이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뭘 해야 하냐고 말이죠. 가이는 이에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자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오래전 한 유대인 사상가가 꿈꿨고, 현실에서 이상하게 변질된 사상, 공산주의가 실현된 사회와 같이 말이죠. 마르크스(Marx, Karl, 1818~1883)는 유물론자로서 노동을 통해 산출된 산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노동이 아니라 자본가에 의해 억지로 주어진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자신이 소외되는 노동소외를 겪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돈”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회사로 발길을 옮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아는 미뤄둔 채 말이죠.
마르크스가 꿈꾸는 공산사회는 사실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이후에나 가능한 사회입니다. 따라서 물자가 인간의 욕심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풍족해졌을 때 노동자들의 폭력혁명을 통해 자본가들을 없애고, 그들의 자본을 평등하게 나눠 가짐으로써 가능하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개인은 그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할 노동만을 하며 살아갑니다. 어차피 물자는 풍부하기 때문에 노동을 통해 돈을 벌 필요도 없죠. 그저 쌓여 있는 물자를 필요한 사람이 나눠 갖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사유재산 개념이 없기 때문에 누가 어떤 집을 샀다더라, 어떤 차를 사고 어떤 옷을 입는다더라 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어진 평등한 사회입니다. 말로 들으면 꿈만 같은 사회이죠. 이런 사회가 실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상 사회인 프리 라이프는 이와 같은 이상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하네요.
물론 공산주의의 이론은 초기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나온 것입니다. 그에 반해 현대 자본주의는 많은 개선을 거쳤습니다. 복지의 개념도 형성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아를 실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노동자들처럼 회사의 부품으로만 일하지도 않고 말이죠. 또한 마르크스의 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극단적인 유물론적 사고, 폭력혁명의 정당화, 극단적인 이분법 등은 비판받아 마땅한 이론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통찰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에는 복지 이외의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하며, 현대에도 기본소득과 같은 대안들이 실험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입니다.
사회윤리를 주장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사회의 기본구조가 개인의 도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사회 기본구조가 도덕적이지 않다면, 양심을 지닌 개인 역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한 개인의 도덕적 행위는 집단의 도덕성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저는 프리 가이가 이와 같은 사회윤리적 사고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밀리를 통해 단순한 NPC의 삶을 다른 각도로 보기 시작한 가이는 은행을 털기 위해 들어온 플레이어에게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버디는 그런 가이에게 “이건 네가 아니야, 넌 그러면 안돼”라고 말합니다. 그때 가이는 버디를 보며 말합니다. “그래도 될지 몰라” 한 개인의 가능성과 한계는 타인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실존주의적인 말과 함께 가이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뜹니다. 처음에 다른 NPC들은 그런 가이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기존의 틀과 사회적 관습들을 깨면서까지 저렇게 행동하는지 말이죠.
프리 시티의 플레이어들은 은행 강도, 상점 털이나 NPC 살인 등 갖가지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경험치를 얻고 자신의 레벨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가이에게 그러한 행동이 옳지 않았죠. 그는 밀리로부터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레벨을 올리는 방법을 듣게 되는데요, 그는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밀리는 선한 행위를 통해서도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가이는 그런 밀리의 조언을 바탕으로 선한 행위를 하며 경험치를 쌓아나갑니다. 폭력이 구조화, 제도화된 프리 시티에서, 오직 가이만이 선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이는 게임을 넘어 현실에까지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가장 고리타분할 수 있는 ‘선’이라는 가치가 오히려 ‘악’과 ‘폭력’이 판치는 사회에서 신선하게 다가온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사회 윤리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행위가 집단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이의 선한 행동은 게임 밖 현실의 사람들도 감화할 만큼 파급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게임 내에서는 가이의 연설을 통해 NPC들이 기존 틀을 부수고 플레이어들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게임에서 NPC들은 아무 영향력이 없는 익명의 존재들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익명의 존재들이 자신들의 부재를 통해 역설적으로 게임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플레이어들은 NPC가 없는 텅 빈 게임 공간에서 어리둥절해합니다. 가이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에 감화를 받은 평범한 존재들이 연대하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은 역사 속에서,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 등의 인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죠.
사회구조가 개인의 도덕성을 결정하는 것이 완전히 오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가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규정과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무시당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다면, 그들이 사회를 충분히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우리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경험합니다. 특히 악플로 인해 유명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들을 보며 우리는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꼽는 대표적인 원인이 바로 익명성입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으로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일탈을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연예인의 경우 수많은 댓글 중에 몇 개의 악플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고 하는데요,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나 요나스(Hans Jonas, 1903-1993)가 이야기하듯, 인간은 선보다 악을 더 잘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익명성에 기대어 일탈을 한다기보다는, 반대로 상대를 인간이 아닌 익명의 타자로 대하는 태도로 인해 일탈을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현실에서도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다만 익명성을 얻게 되었을 때 그 한계가 넓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뿐이죠. 익명성은 사이버 폭력을 일으키는 하나의 요소는 될 수 있어도 그것 자체가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이버 폭력을 일으키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실 폭력의 원인과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상대를 타자화시키는 개인의 관점이 그것입니다.
상대를 타자화시키는 개인의 관점이란, 나와 대화하거나 상호작용하고 있는 상대를 감정과 생각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관점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관점이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대를 내가 아닌 존재, 나와는 관련 없는 아예 다른 존재로 규정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익명성을 제한하는 방법보다, 공감능력을 기르고 상대를 인간으로 존중할 수 있는 윤리적 관점을 갖도록 하는 방법이 근원적이라 생각합니다. 한때 인터넷 실명제를 실시하자는 여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버 공간의 특성을 없애자는 것과 동일한 조치입니다. 실제 당시에 저 역시 실명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사실 그것은 진짜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조치라고 현재는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플레이어들은 타자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입니다. 특히 더욱 심한 것은 NPC들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NPC란 단순히 타자, 혹은 배경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NPC들은 게임 상에서 플레이어들과 동일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그러한 NPC들을 거리낌 없이 죽이고 협박하고 빼앗습니다. 이와 같은 NPC들에 대한 태도는 NPC뿐 아니라 게임 내의 다른 플레이어, 심지어는 현실에서의 타자들에게도 유사한 태도를 갖게끔 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게임에서와 같이 NPC들이 자의식을 갖게 되고, 그들을 하나의 존재로서 존중하기 시작한다면, 그와 같은 태도는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이뤄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 지니는 내적 태도의 문제는 실제 행동의 문제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방을 단순히 타자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태도를 지닌다면, 실제로 상대를 존중하는 행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아질 것입니다. 비단 게임과 현실뿐 아니라 기타 다른 사이버 공간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영화는 자의식이 있는 AI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AI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아마도 두려움일 것입니다. 몇 해 전, 바둑이라는 엄청난 직관을 요구하는 게임에서 AI 알파고가 인간 이세돌을 꺾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직관의 영역은 순전히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파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수업 중 AI를 도덕적으로 대우할 것이냐는 질문에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도덕적으로 대우할 수 없다는 주장을 이야기하며 적대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아마 이런 인식의 근거에는 아마도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 인간의 피조물이 인류를 뛰어넘게 된다면 인류를 지배하려 들 것이라는 생각은 뿌리 깊은 편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저는 수많은 영화에서 AI가 인류의 지성을 뛰어넘어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는 이미지를 심어놓았고, 인간은 앞서 서술했듯 선보다는 악을 더 잘 인식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그 이미지가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인류의 지성을 뛰어넘은 AI가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인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행위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느낄 수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인류의 지성이 아직 완전하게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극도로 지성이 발달한 존재라면 아마도 그보다 더 중요하고 숭고한 가치를 지향할 것이며, 한낱 인간 따위를 지배하는 등의 행위가 그들에게 의미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I에 대한 지위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제된 존재를 독립된 존재로 인정할 수 있을지 여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개념이 바로 시뮬라크르(Simulacre)입니다. 이 개념은 학자들마다 그 정의하는 바와 의미하는 바가 조금 달라지는데요. 저는 시뮬라크르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보다는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AI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둘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는 실재를 집어삼키는 허무주의적인 성격의 것이지만, 들뢰즈의 그것은 원본으로부터 복제된 시뮬라크르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고 설명하는 새로운 존재론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AI에 적용한다면, AI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복제하여 탄생한 존재, 즉 인간의 사고능력에 대한 시뮬라크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복제물은 단순히 원본에 대한 하나의 허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존재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AI 역시 비록 인간의 그것을 모방했을지언정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할 수 있다는 철학적 근거가 마련됩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도덕적 행위의 대상을 인간으로만 한정지 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지성이 발전할수록 인류가 도덕적으로 대우해야 할 대상이 인간에서 동물로, 생명으로, 혹은 생태계 전체까지 확대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AI를 단순히 인류의 모방적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개체로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AI의 도덕적인 지위 역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의 AI를 뛰어넘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가 등장한다면, 아마도 그 인공지능은 일종의 인격까지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AGI를 디지털 지성체라 칭하며 그들의 도덕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학자인 닉 보스트롬(Niklas Boström, 1973-)은 그들을 도덕적으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먼저 디지털 지성체는 의식을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원하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스트롬은 아마도 미래의 디지털 지성체는 위와 같은 능력들을 모두 소유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가이는 이미 자아의식을 갖추었고, 밀리라는 대상과 NPC들의 자유를 원하고 있으며, 그녀와 다른 NPC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능력을 모두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는 자유의지를 지닌 것처럼 묘사됩니다. 특히 AI와 관련된 문제 중 하나인 정보의 편향성이 반영되지 않는 모습, 즉 폭력성이 일상인 게임 세상에서 폭력성을 학습하지 않고, 최대한 비폭력적이고 윤리적인 방법으로 레벨을 쌓아가는 모습에서 그의 자유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유의지는 다른 NPC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은 가이가 바리스타에게 평소 주문한 커피와는 다른 카푸치노를 달라고 하는 씬에서 드러납니다. 가이의 물음에 바리스타의 얼굴이 기울어지듯 클로즈업되는데요, 이때 저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비틀어지고 새로운 사고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기울어진 앵글을 통해 표현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유의지는 영화 후반 NPC들의 집단 시위를 통해 극대화됩니다.
따라서 AI가 단순히 복제체가 아니라 독립적 개체이고, 그들이 도덕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능력들을 획득하였다면 그들을 도덕적으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의 윤리관은 “합리적 사랑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감정이지만, 합리적인 판단능력,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상황에 따른 가장 적절한 윤리적 행위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의 인도를 받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랑은 타자와의 연대를 이루어내며 궁극적으로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의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제 현실 상황에서 이와 같은 윤리관을 실천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만, 이에 따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성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말 중요한 가치가 바로 이러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 영화에서는 AI와 인간의 사랑을 다룹니다. 아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다루고 있지도 않습니다. 가이는 밀리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들으며 밀리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그는 그에게 프로그래밍된 법칙을 어기고 새로운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사랑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밀리를 마주친 가이가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밀리가 불타는 차량과 건물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는 불타는 차량을 지나가지도, 그의 직장과 다른 방향으로 빠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불타는 차량이 저에게는 어떤 위험도 무릅쓸 수 있는 열정,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보였습니다.
이후 그는 밀리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계속 성장합니다. 마치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의 지지와 격려를 통해 용기를 얻고 성장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후에 영화에서는 가이가 밀리를 만난 이후부터 그의 코드에 변화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마치 인간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기억을 잃어버린 가이가 밀리와의 키스를 통해 끊어졌던 알고리즘이 다시 연결되는 듯한 연출을 통해 사랑의 위대함을 표현합니다.
물론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듯,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모두 키스가 그에게 심어놓은 취향 때문이었습니다. 설탕 두 스푼을 넣는 커피, 철 지난 머라이어 캐리 노래, 풍선껌 맛 아이스크림, 그네 타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 등등 말이죠. 사실 그가 자유의지를 갖게 된 것도 키스가 프로그래밍한 결과라는 부분에 있어서 다소 아쉬운 결말이었지만, 대중성을 위해서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가이는 NPC들을 자유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모든 행위의 원동력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인간과 AI의 사랑은 이렇게 다소 수단적으로 이용된 것은 다소 아쉬웠지만, 사랑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에서의 사랑 중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AI 상호 간의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연인들과의 사랑과 같은 사랑의 형태는 아니지만,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회적 협력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으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프로그램이라는 걸 안 가이는 충격에 사로잡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버디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고민을 들은 버디는 망설임 없이 말합니다. “내가 진짜가 아니라도 내 절친을 돕는 이 순간은 진짜야. 사랑하는 사람을 돕는 사람보다 진짜가 어디 있어?” 그는 비록 가이와 자신 모두 인간이 만들어내었고, 그 삶이 프로그래밍된 어찌 보면 가짜와 같은 삶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모두 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결국 NPC들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연대를 이뤄내었고, 결과적으로 자유를 얻어냈습니다. 클라이맥스에서 가이는 이전에는 건널 수 없었던 강을 건너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물을 건넌다는 것은 이전의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실제로 모든 NPC들까지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게임 제목은 프리 시티입니다. 아마도 앤트완은 그 프리 시티에서 자신의 본능에 따라 자유롭게 파괴하고 약탈할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프리 시티에서 진정으로 자유를 얻은 것은 NPC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이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키스와 밀리의 프리 라이프이겠지요.
영화의 결말부에 나오는 AI들의 세상은 마치 낙원처럼 묘사됩니다. 그곳에서는 자본으로 인한 갈등도, 경쟁으로 인한 미움과 질투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꾸려나갈 뿐이죠.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를 사랑한다면, 결코 자신의 이익만을 이야기하진 않을 테니까요.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이 즐겁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그들은 서로 존중하고, 어쩌면 공동체를 위해 서로를 희생하면서 함께하고 행복하게 지낼 것입니다. 그리고 전 우리 사회도 서로에 대한 불신과 미움이 아니라 사랑과 협력의 자세를 지닌다면, 가이 한 AI의 도덕적 행위가 사회 전체를 바꾼 것처럼, 현실도 바꿀 수 있으리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과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수업에 임합니다. 1년에 제 수업을 들은 수백 명의 학생 중 한 명이라도 윤리적으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되고, 그 한 명 한 명이 사회에 모여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로 바뀔 것이라는 믿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