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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3의 고백

-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기도문 2

by 몽B


출처 : pexels




최초의 죄의식이었다.




아홉 살, 동네 친구들과 성당에 다녔다. 성당 마당 왼편에는 작은 교리실이 있었다. 교리실의 파란 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주일뿐 아니라 평일에도 우리는 교리실을 기웃거렸다. 가운데 놓인 커다란 책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수다를 나누거나, 누런 종이 묶음을 올려두고 기도문을 베껴 쓰곤 했다. 연필 깎는 소리가 사각거렸고, 또각이는 글씨들이 종이에 내려앉는 울림이 경쾌했다. 간식거리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 신부님이 캐러멜이라도 주시는 날에는 횡재가 따로 없었다. 성당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경험했고, 기도문이 입에 붙도록 반복해서 외웠다.



1986년 크리스마스이브 행사. 초등 저학년부는 연극을 준비했다. 교리실에서 배역을 정하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남자아이들은 '예수님'과 '요셉' 역할을, 여자 아이들은 '마리아' 역할을 서로 하고 싶어 했다. 나는 욕심 많고 당돌한 아이였다. '마리아' 역할을 절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하얀 치마를 입고 인자한 눈빛으로 아기 예수를 내려다보는 마리아 역할을 꼭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주요 역할들은 부모님이 성당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욕심이 들켜버릴 것 같아 울음을 삼켰다. 내가 맡은 역할은 <동방박사 3>이었다.



행사 두 달 전부터 학교를 마치면 어김없이 교리실에 들렀다. 예수님과 마리아, 요셉 배역을 맡은 아이들은 열과 성을 다해 대사를 외우고 무대 의상을 준비했다. 가벼운 역할을 맡은 아이들은 성당 마당에서 뛰어놀거나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예수 역할들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응원하고 지지했다. 나는 마당에서 뛰어 놀지도 않았고, 그들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주인공을 맡은 아이들을 먼발치서 바라볼 뿐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행사 당일. 성당에 다니지 않던 엄마는 내가 참여하는 행사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엄마는 이모집에 따라갈 것인지 물었고, 어린 나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형편없는 동방박사가 되느니 불참하는 것이 낫겠다 판단했다. 그날 밤, 갑작스럽게 사라진 동방박사 3 때문에 친구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연극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판단했던 그 순간, 어린 나는 알고 있었을까? 의무를 져버린 대가에 대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오롯이 존재하기 힘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과 그래서 내가 좋아하던 많은 것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모집 시계가 저녁 7시를 가리키는 순간, 동방박사 3의 대사가 귓가에서 왕왕거렸다. 크리스마스 행사가 시작되는 시간.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최초의 죄의식이 혈관을 따라 온몸을 파고흘렀다.






어리석은 확신은 오만하다.




그 날 이후, 두세 번 성당에 갔었다. 친구들, 선생님, 수녀님, 신부님. 그 누구도 동방박사 3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를 탓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동방박사 3은 형편없는 배역이 틀림없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동방박사 역할을 맡았던 나 역시 이 공동체에 의미 없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애늙은이처럼 사고했다.) 어리석은 확신은 오만하다.



죄의식과 오만함으로 나는 성당에 발길을 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친구들에게 나의 부재에 대해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 질문들이 나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렸던 나는 그들이 나를 찾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죄의식은 아주 깊게 자리 잡았고 고독의 실체를 희미하게 알게 되었다. 여태껏 기억나는 동방박사 3의 대사가 있다. "도대체 저것은 어떤 별이지?"





출처 : pexels




30년 전에 제가 이 성당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삶이 휘둘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육아와 직업을 겸하며 무엇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한 편은 항상 소홀해져 있었다. 직장에 집중하다 보면 집안일이 엉망으로 펼쳐졌고 아이들은 방치되었다. 가정에 집중하다 보면 직장에서 역할을 스스로의 기준만큼 해내지 못했다. 무언가에 소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는건 아닌지 의심이 들 때마다 죄의식이 고개를 내밀었다. 동방박사는 그 연극무대에 꼭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죄의식이 꿈틀거릴 때마다 완벽하려 더 애를 썼다. 소용돌이 속에서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아랫배와 허벅지에 힘을 주고 그 시간을 버텨왔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오로지 혼자였다. 나는 어떤 공동체에도 진심으로 속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아 공동체를 떠나버린 오만하고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있다. 저 먼 하늘 어느 별엔가에 갇혀 건네는 손을 잡지도 못하고, 먼저 손을 내밀지도 못하는 욕심 많은 아이가 있다. 도대체 그 별은 어떤 별일까.



12월 초, 어린 시절 떠나온 동네를 찾았다. 기억과 너무 달라져 있는 거리를 걸었다. 어린 동방박사가 쓸쓸히 걷던 길이었다. 벌판 같아 보였던 성당 마당은 아담하게 여겨졌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마당 한 켠에는 여전히 마리아가 서있었다. 마리아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30년 만이었다.



무턱대로 고해성사실로 들어가서 신부님께 고백했다. 고해성사하는 방법이 성사실 내부에 적혀있었다. "30년 전 제가 이 성당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최초의 죄의식 위로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더욱 날카로워진 자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그 어떤 보속이라도 감사하게 받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부님이 주신 보속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다. 오늘 미사를 끝까지 잘 참여하면 죄를 사할 수 있다 하셨다.



평범한 미사였다.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성가를 들으며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맞잡은 두 손은 지금의 내가 내민 것인 동시에, 어린 내가 건넨 것이기도 했다. 이 성당 어딘가에 갇혀있던 최초의 죄의식과 고독들이 예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출처 : pexels



누구에게나 오래 간직한 죄의식이 있다. 최초의 죄의식은 다양한 모습으로 삶을 뒤흔든다. 흔들릴수록, 소용돌이칠수록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고요하게 나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 자신을 다독이고 격려해야 하며, 용서해야 한다. 삶에 지칠대로 지쳐 있던 겨울밤. 뿌리 깊은 죄의식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30년 만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상처입은 나를 다독여주었다.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각자의 신을 향하여 혹은 자신의 내면을 향하여, 스스로를 다독이는 기도를 때때로 해야 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기도 속에 꼭 언급해야 할 말들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진짜 잘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고민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내 안의 어린 나에게 지금의 내가 반짝이는 별이 되어 줄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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