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뚱이에 대한 묵상
- 몸뚱이의 재발견, 신체성의 회복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는 독한 사람이었다. 맥박수 100 이상의 빈맥을 확인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믹스커피를 단호하게 외면하기로 했다. 하루 3~4잔 마시던 믹스커피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고,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단호함을 실천하고 일주일 후. 혈압은 둘째 하고, 맥박수가 정상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항상 90 이상을 유지하던 맥박수. 최근에는 100 이상을 넘어서던 맥박수가 커피를 끊고, 운동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정상으로 돌아오다니. 스스로 너무 대견했고, 몸은 내 의지대로 컨트롤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정상 맥박수가 나온 종이를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다. 인간 승리의 결과물인 양, 뿌듯하게 종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뒤늦게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문장.
측정 중 움직임이 발견되었습니다.
재측정하시기 바랍니다.
간에 2cm 종양이 있다는 것을 초음파로 발견하고 CT를 찍었다. 혹시 암일 수도 있으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의사의 생각이었다. 결과는 전화로 들을 수 있다고 말했으나, 해당 날짜가 되어 전화를 하니 직접 내원하여 설명을 들으라는 답이 돌아왔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아 내원하지 못했고, 시간을 내기까지 사흘의 시간이 다시 필요했다. 사흘간,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튼튼하지 못한 몸뚱이를 탓한 시간이 가장 길었다. 간을 걱정하며 뛰어대는 심장에 동지애를 느끼기도 했다. 어찌 됐건 결과는 2cm의 혈관종이었다.
"측정 중 움직임이 발견되었습니다. 재측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의 문장이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몸이 대상이 아닌 내가 되는 순간이었다. 몸을 물건이나 대상으로 여기며 탓하는 내가 있다. 내 몸속 장기들을 별개의 개체로 인식하고 동지애라는 단어까지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이 있다. 수치화된 몸의 기록에 좌절하는 나, 잘못 측정된 수치에 기뻐하던 내가 있다.
외부의 기계와 기준들이 나를 정상의 범주에 넣기도 하고, 비정상의 범주로 내몰기도 한다. 나 역시 나의 몸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수치화된 범주 속에서 몸을 인식한다. 마치, 주가가 올라 즐거워하거나 주가가 떨어져 비관하는 증권맨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몸속 각 기관의 상생과 몸과 정신의 순환. 그 모든 것이 '나'임을 인지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몸은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임을 알아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직장에서 수행해야만 하는 일의 목록이 한꺼번에 생각나며 나를 옥죄었다. 20년 간 같은 일을 반복해 왔음에도 늘 새롭다.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과 잘하고 싶다는 의욕이 무겁게 나를 짓눌러왔다. 밤에 자려 누으면, 방치된 우리 집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온다.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과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 이유에서 일까. 숙면을 한지 오래되었다. 늘 머리가 묵직하고, 몸이 무거웠다. 체중이 증가했고, 머리카락이 술술 빠져나갔다. 나는 시간 안에 갇혀,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지 못한 채 흘러만 왔다. 여기서 기인한 누적된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내 몸의 체계까지 망가뜨려 놓았다.
몸은 언제나 뒷전에 있었다. 나의 꿈, 나의 희망, 나의 성장이라는 가치 속에 '몸'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가끔 아프기라도 하면 짜증이 났고, 아픈 몸은 걸림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열흘 전 건강검진으로 비로소 내 몸을 인지하게 되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고민, 정신과 마음으로 존재하던 내가 몸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체중 5kg 증가, 공복혈당 113, 맥박수 105, 2cm 간 혈관종, 하지정맥류, 혈뇨, 탄력을 잃은 피부와 숱을 잃어가는 머리카락 등.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여자가 있다. 꿈과 희망, 성장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생긴 중년의 여자가 서있다. 이것이 '나'라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하다. 가엽다. 늙어감이 가여운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 왔던, 세월 속에 내쳐진 몸뚱이가 가엽다. 그리고, 고맙다.
꿈, 희망, 성장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몸뚱이가 따로 있을까? 밝은 얼굴과 날렵한 몸매, 활기찬 근육을 가진 몸은 그런 단어에 좀 더 가까이 닿아 있는 것일까? '꿈과 희망, 성장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게 생긴 중년의 여자'를 생각하는 나의 사고는 참으로 편협하다. 꿈, 희망, 성장이라는 단어와 몸뚱이는 같은 맥락에 있지 않다. 내가 지향하는 꿈, 희망, 성장이 있듯 내 몸이 지향하는 꿈, 희망, 성장이 있어야 함을 생각한다.
몸이 대상이 아닌 내가 되는 순간, 나는 독해질 수 있다.
몸이 대상이 아닌 내가 되는 순간, 나는 유연해질 수 있다.
나의 몸? 나의 몸뚱이? 내 몸뚱이는 나라는 존재의 소유물일까? 그동안 나의 인지는 그러했었다. 몸을 나의 소유물로 인지했으니, 조금이라도 피곤하거나 아프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이 놈의 몸뚱이"를 되뇌며 내 몸뚱이의 효율성과 쓸모에 대해 냉정한 시선으로 살피고 냉대해왔다. <믹스커피가 몸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라는 존재가 사랑하는 잇템이니, '몸'이라는 대상 너는 인내해야 한다. 그 정도는 '몸뚱이'가 참아줘야 한다.> 오만한 생각이다. 나의 일, 나의 꿈, 나의 성장처럼 나의 몸일 수 없다. 일이나 꿈, 희망, 성장과 같은 단어는 나 자신이 아니다. 하지만, '몸'은 나 자신이다.
몸을 대상으로 인식할 때 자신의 몸에 만족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 뚱뚱해서 불만이고, 코가 낮아 불만이고, 맥박이 빨라 불만일 것이다. 몸이 대상이 아닌 나 자신이 되는 순간 그 어떤 외모나 상황들도 나임이 당연해진다. 꿈, 희망, 성장이라는 단어를 쫒는 시간 안에 나라는 사람이 있다. 몸 역시 몸이 지니는 꿈과 희망과 성장이 있을 것이다. 믹스커피를 끊고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하게 되는 의지 속에는 내 몸의 메시지가 스며있다. 몸이 내가 되는 순간, 나는 독해질 수 있다.
몸이 대상이 아닌 내가 되는 순간, 강해짐과 동시에 유연해질 수 있다. 시간 안에서 헛돌지 않을 수 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 일과 느긋하게 쉬는 일이 시간을 좀먹는 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당연히 내 몸뚱이이기도 하다. 천천히 걷고, 깊게 심호흡하며... 계절을 느끼고, 삶을 사랑하며...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고, 말하고, 노래하며... 모든 관계 속에 내가 '몸'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항시 생각해야겠다 다짐하며... 잘 먹고, 잘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