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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중독된 건 아니었어!

4단계, 중독의 절정기

by 몽B


멀리 보다, 여행의 시작



2021년 여름 방학. 세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2박 3일 동안 서울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기차와 호텔을 예약하고 짐을 챙기며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나 혼자, 내가 좋아하는 일로 여행하는 것은 결혼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인문학 놀이터> 화풍정 선생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여름은 뜨거웠고 망원시장의 열기는 강렬했습니다. <멀리 보다>라고 적힌 글이 출입문에 걸려있었습니다. 여름의 망원시장 열기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오는 붉은색 간판이었습니다. '멀리 보다.' 2박 3일이라 생각하였던 나의 여행이 2년 이상 이렇게 멀리까지 이어진 시작은 그 작은 출입문을 여는 순간부터였습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사실 나는, 아주 많이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강의실과 상담실은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영상으로만 보던 강의장을 둘러보니 느낌이 새로웠습니다. 상담실의 가지런한 책들과 다양한 종류의 기타들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초면에 계시는 곳을 계속해서 두리번거렸으니, 큰 실례를 한 것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 집에도 기타가 많다는 너스레를 떨며 불편한 분위기를 애써 환기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과의 상담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내 사주를 예시로 궁금했던 명리 지식을 질문하고 답변받는 시간이었습니다. 나같이 수줍음이 많고, 염려가 많은 사람이 SNS를 통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일탈과 다름없는 일입니다. 화풍정 선생님께서는 이런 나의 일탈을 응원해 주셨습니다.


그런 대화 중에 존경하는 선생님들을 인터뷰해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불쑥 나왔고, 선생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찬성해 주셨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편안한 분위기에서 영상을 찍자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였고,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해보라는 선생님의 낮고 느린 목소리에서 진심이 전해졌습니다.


두 번째 목적지는 김병우 선생님이 계시는 <천인지 운명학>이었습니다. 천인지 운명학의 김병우 선생님은 내게 아주 특별하신 분이십니다. 선생님과의 전화 상담을 통해 공부에서 답답한 것을 많이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내게 이 공부에 계속 정진할 것에 대해 당부하셨고, 정규 교육 과정으로 이 공부를 쭉 해보라는 조언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선생님 조언에 힘을 얻어 공부의 폭을 넓혀나갈 수 있었습니다.


건국대 입구의 선생님 사무실은 작고 아담했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육신 강의와 60 갑자 간지 강의를 감사하게 들었고, 그것을 정리하여 긴 호흡으로 강의한 바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는 장소를 직접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명리학뿐 아니라 동양철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깊으셔서 주역과 불교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습니다.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난날 화풍정 선생님과 나누었던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혹시나 하며, 인터뷰에 대해 의사를 여쭤보았습니다. 잠시 생각도 하지 않으시고, 재미있게 찍어보자고 말씀하시며 매우 즐거워하셨습니다. 어떠한 바람은 이런 식으로 갑작스레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목적지는 선운 황성수 선생님이 계시는 <선운의 명리 터>였습니다. 6년 전 선운 선생님의 온라인 강의를 구매하며 내가 이 공부를 다 하고 꼭 찾아뵙겠다고 약속드린 바 있었습니다. 이후 긴 시간 동안 선운 선생님의 강의를 정리하고 공부해 왔습니다. 선운 선생님은 상담 시작 첫마디에서 내담자를 콕 찌르는 내공이 놀랍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의 내면 심리를 알면서 공감해 주시니,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나는 선운 선생님의 궁통 강의와 진평 선생님의 사행도를 접목해서 월지와 일간의 관계를 정리해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강의로 만들어 공유하고 싶기도 합니다. 선운 선생님을 만나러 간 진짜 목적은 궁통 강의의 내용을 나의 강의에 녹이는 것에 대하여 허락받기 위함에서였습니다.


궁통 강의 내용을 활용해도 될지 조심스럽게 여쭤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냥 하면 되지 그거 뭐라고 그런 걸 물어보러 여기까지 오느냐 하셨습니다. 그런 털털하신 반응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던 것일까요? 선생님께 인터뷰를 요청하면 해주실 수 있으신지 여쭤보았습니다. 여쭤보면서 무례한 일이 아닌지 어떤지 무척 긴장되었습니다. 나의 긴장을 눈치채셨을까요? ‘그냥 하면 되지, 그거 뭐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부산행 기차 안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내 얼굴을 공개하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선생님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찍을 수 있을까? 상담만 받아도 이렇게 긴장이 되는데,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로 실현되지 못할 꿈같은 이야기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꿈이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습니다.



명리학(命理學)이 뭐길래?



명예퇴직을 신청하겠다는 선언에 친정어머니는 앓아누우셨습니다. 왜 이때까지 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냐며 속상해하셨습니다. 같이 더 재미있게 근무하자는 사랑하는 동료 선생님들도 내 결정에 대하여 안타까워했습니다. 사실, ‘사주팔자’, ‘명리’라는 단어는 여전히 미신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작두를 탈 예정이냐?’, ‘방울을 흔들 생각이냐?’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빙긋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 학문을 대하는 왜곡된 시선이 안타깝다는 마음보다, 이 학문의 매력이 돋보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나는 명리(命理)가 학문이고, 철학이고,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자연이고 삶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화(變化)합니다. 바뀔 변(變), 될 화(化). 변화라는 단어는 바뀌는 과정(變)과 바뀌어 만들어진 결과(化)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變)하고 화(化)합니다. 바뀌어 만들어진 결과 역시 영원할 수 없으며 다시 그 무엇으로 바뀌고 또 다른 결과로 이어집니다. 명리는 이러한 변화(變化)를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어린 왕자, 흐르는 강물, 울창한 숲, 사과 한 알, 길가에 핀 민들레, 우리 집 마당, 사랑하는 사람, 행복한 마음, 그녀의 미소, 엄마, 아버지, 하늘, 선생님, 학문 그리고 나.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를 무작위로 내뱉더라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작은 방구석에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으며 눈물 콧물을 쏟아내던 열두 살의 내 모습이 떠오릅니다. 막내 아이 침대에 걸터앉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는 중년 여자의 담담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어린 시절 지루하게 읽었던 ‘어린 왕자’를 아이들에게 읽어주며, 울먹이는 중년 여자의 마음은 또 무엇일까요?


아버지와 이별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서 도무지 헤어나지 못할 것 같던 나는, 눈물 한 자락 없이 아버지 무덤의 풀들을 뽑고 있습니다. 지난밤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폭풍우 몰아치던 하늘이 오늘 아침 싱그럽게 빛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평생토록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짜인 틀 안에서 조용하게 살던 내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변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유튜브라는 채널을 통하여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배움의 일이라면 먼 길을 마다하고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나 역시 믿기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의 성격도 성향도 상황과 때에 따라 변(變)하고 화(化)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학(易學)이란 ‘변화’를 공부하는 동양의 학문입니다. 오술(五述)이란 변화를 관찰하는 다섯 가지 현실적 방법입니다. 오술(五述) 즉 변화를 관찰하는 다섯 가지 방법에는 명(命), 복(卜), 의(醫), 상(相), 산(山)이 있습니다. 명(命)은 인간 삶의 변화를 관찰하는 방법이며, 복(卜)은 해당 시점에서 점을 쳐 보는 일입니다. 의(醫)는 인간 몸의 변화를 관찰하는 방법이며, 상(相)은 사람이나 사물, 지형 등이 드러낸 형상을 통해 변화를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산(山)은 정신 수양 등을 통한 본성의 변화를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명리학은 동양의 오술(五述) 중 명(命)의 관점에서 인간 삶의 변화에 대해 관찰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한 사람을 대상으로 삶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특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람 개개인은 자기만의 특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기본적 특성은 사주팔자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사주팔자 원국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특성을 파악한 이후, 이 사람이 어떤 변화 속에 놓이는지를 살펴봅니다. 운(運)은 시간의 흐름으로 순환하며 개인의 삶을 변(變)하고 화(化)하게 합니다.


여기 고구마와 딸기가 있습니다. 고구마와 딸기를 찜솥에 넣고 쪄보겠습니다. 고구마는 먹음직스럽게 익어 있을 것이고, 딸기는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막 수확한 고구마와 딸기를 씻어서 식탁 위에 올려둬 보겠습니다. 고구마는 먹기 힘들어 식탁 모서리로 밀려나지만, 딸기에는 계속해서 손이 갑니다.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대상이 고구마인지 딸기인지 인지해야 합니다. 즉 변화하는 대상의 특성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명리학을 미신의 영역에 두고 있습니다. 오술(五述) 중 하나인 의(醫), 즉 한의학이 학문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은 것처럼 명리학 역시 학문으로 바르게 서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삶을 다루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면이 매우 많습니다. 얕은 공부로 혹세무민 하였던 세월로 인해 그 가치가 퇴색되어 버린 점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 공부의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 학문을 끌고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질과 권위를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명리라는 학문의 가치에 대한 믿음’만으로 공부를 이끌어 온 무명(無名)의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열정이 이 학문을 이처럼 오래도록 계승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대학 등에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고 축적되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뿐 아니라, 상담 도구로서 명리학은 긴 세월 우리의 삶과 함께 그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 이 공부는 음지(陰地)의 영역에 놓여있었습니다. 이제 명리학 역시 변(變)하고 화(化)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멀리 보다



부산 서면에서 오랜 기간 철학관을 운영해 오신 선생님을 소개받고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답답한 마음에 하시는 말씀이라며 굳이 이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정치하는 사람, 사업하는 사람, 학문하는 사람 등 많은 사람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철학관에 와서 조언을 구하지만, 돌아서면 미신으로 치부하며 하찮게 여긴다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50년 남짓 상담을 해오신 선생님이셨는데, 좋은 학벌과 직장도 다 버리고 이 학문에 파묻혀 보내온 세월이 한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들에게 대접받지 못하고 세월 다 버리는 이 공부를 왜 하려 하냐며, 관운이 계속되니 장학사나 교장으로 승진하는 쪽으로 시간을 보내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이 공부가 ‘개미지옥’이라 말씀하시며, 힘들어서 어쩌려고 이 공부에 몰두하느냐며 저를 안쓰럽게 바라보셨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조언을 해주셨는지 알았지만, 내 중독의 상태가 심각하여 계속 공부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송(宋)씨 여자 고집을 누가 말리겠냐며 웃으셨습니다. 그 만남 이후로 사주팔자 명리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어떠한가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편견이 더 심했을 터인데, 힘든 환경 속에서 이 공부를 이어오신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진하게 올라왔습니다.


오랜 세월 음지의 영역에서 흩어진 공부를 정리하고 이끌어 주신 선생님들의 삶이 인정받고 박수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항상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일종의 기운(氣運)입니다. 모든 일이 기(氣)의 상태로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운이 어떤 상태로 드러나기까지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2박 3일의 여행과 화풍정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인터뷰’라는 단어가 등장하였습니다. 실체 없이 존재하였던 나의 마음은 대상을 만나고 이야기가 교류하는 과정에서 현실로 실현됩니다.


화풍정 선생님 사무실 앞에 적혀있던 <멀리 보다>라는 글귀는 내 인생 여정의 또 다른 나침반이 되어주었습니다. 선생님들의 집념과 의지, 학문에 대한 애착은 커다란 가르침으로 전해졌습니다. 명리학이라는 것이 학문의 영역과 술수의 영역 사이에 존재하다 보니, 그러한 간극(間隙)을 좁혀나가는 노력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관법(觀法)의 차이는 학문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 공부하고 연구하여 후학들을 가르치시고, 수많은 상담을 통해 자신의 공부를 점검해 가신 선생님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습니다. 명리학이 혹세무민을 주도하는 공부라는 오명을 떨쳐내고, ‘학문’으로 혹은 ‘훌륭한 상담의 도구’로 인식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장비를 챙기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중독의 절정기’였던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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