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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이 머무는 곳에서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by 몽B


너도, 나도, 흘러간다



아침마다 우리 집은 북새통입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과 나, 등교 준비를 하는 세 아이가 있습니다. 북적거리는 아침 시간을 가만 생각해 보면 나름의 질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집의 아침은 막내 아이가 스타트를 끊어줍니다. 누가 깨우지 않아도 가장 먼저 기상하여 내 침대로 찾아옵니다. 막내를 잠시 안고 누워 있으면 알람이 울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막내는 욕실로 향하고 나는 주방으로 향합니다.


내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남편은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합니다. 큰 아이는 세 번 깨워야 일어나고, 둘째 아이는 두 번 정도 깨우면 일어납니다. 둘째가 밥을 먹는 사이 큰 아이는 욕실을 사용하고, 큰 아이가 식탁에 앉으면 둘째가 씻으러 욕실에 들어갑니다. 동시에 욕실을 쓰려하거나, 서로 먼저 다리미를 쓰려하는 등 서로의 동선이 중첩될 때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가 정하거나 약속한 것도 아닌데, 대체로 기상 순서나 욕실 사용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남편이 가장 먼저 집을 나서고, 큰 아이, 둘째 아이, 셋째 아이 순서로 집을 나섭니다. 예전에는 내가 가장 먼저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최근 순서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얼마 전 나는 퇴직을 하였습니다. 나의 소속이 변화하면서 우리 집에서 가장 늦게 집을 나서는 사람은 내가 되었습니다.


집을 나서면 각자의 다음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공간과 함께 항상 변화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인지함에 있어 '흐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 적절해 보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직선적 흐름으로 인지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개체는 장소를 이동하며 공간을 흘러 다니는 것처럼 느낍니다.


우리 각자는 집을 나서며 다른 시공간으로 흘러갑니다. 직장이나 학교로 흘러간 우리는 새로운 시간 배열과 공간 구성을 부여받습니다. 개개인은 흐름이 머무는 시공간 안에서 또 다른 타인과 교류하며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그 관계 안에는 순서나 지위와 같은 시공간이 부여한 의미들이 녹아 있습니다. 시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환경을 수긍하며 받아들이기도 하고,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며 펼쳐나가기도 합니다.


저녁 7시 무렵이 되면 우리 집은 다시 북새통이 됩니다. 저녁 먹은 설거지 소리가 달그락 거리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 거립니다. 거실에서 아들과 남편은 함께 게임을 즐기고 있습니다. 큰 딸아이는 막내 딸아이가 싫다는데도 귀여워서 졸졸 따라다닙니다. 막내 딸아이는 언니에게 이제 제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중2가 된 막내가 고3 언니 눈에는 여전히 귀여워 보이는가 봅니다. 그런 이야기를 멀리서 듣고 있으면 설거지를 하다가도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교차점에서 주거니, 받거니



글을 쓰다 보니, 이문세의 <깊은 밤을 날아서>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 떠올라 흥얼거려 봅니다.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쩌면 어린애들 놀이 같아~' 각자 삶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은 특정 공간을 형성합니다. 흐름이 멈추는 지점에서 우리는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게 됩니다.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정말로 어린애들 놀이 같습니다. 의도도 목적도 없습니다. 당연하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우리 집이 낮과 밤 동안은 깊은 고요 속에 있는 일은 당연하며 자연스럽습니다. 북적거리는 시간은 길(吉)하고, 고요한 시간은 흉(凶)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은, 해가 뜨고 지는 일,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나는 일, 계절이 순환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년월일시는 흐르는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사주팔자는 그러한 년월일시를 60 갑자로 표현한 부호체계입니다. 이러한 시간을 읽어가는 것이 명리학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머무는 곳에서 어떤 순서와 질서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학문입니다. 하늘이 내게 부여한 천명(天命)을 이해하고, 흐르는 시공간 속에서 나를 나답게 하며 살 수 있는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이 명리학입니다. 명리학은 너무 오랜 세월 미신의 영역에 있었습니다. 길흉과 득실을 따지고, 유불리와 성패에 전전긍긍하며 글자들을 이해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흐름이 머무는 자리,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관계 속에는 주고받음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 주고받음은 언어로 주고 언어로 받음일 수도 있고, 물질로 주고 물질로 받음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마음을 주고 물질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언어를 주고 마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는 내도록 무언가를 내어주고 또 받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득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실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관계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를 얻는다면 그것은 상대가 하나를 내어준 결과입니다. 내가 하나를 내어준다는 것은 상대가 하나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체를 넘어선 공동체의 큰 틀에서, 혹은 자연과 만물 및 우주의 큰 틀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얻거나 잃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입니다.


득실과 길흉을 따져보며 전전긍긍하거나 추길피흉이라 하여 길한 것을 따라가거 흉함을 피하기 위한 공부라 생각하면 명리학은 더 많은 시간이 지나도 미신의 영역을 넘어서기 힘들 것입니다. 대 순환 선상의 건도(乾道)의 한 지점을 의미하는 특정 년월일시의 시공간은 대순환 즉 하늘의 길을 순서대로 흐를 뿐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시공간에서 출생합니다. 그 지점에서 천명(天命)을 부여받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천명(天命)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떤 천명을 부여 받든 지 간에, 우리는 대순환 선상에 있습니다. 각자의 역할로 서로 관계하며 乾道를 흐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개개인의 천명(天命)을 년월일시라는 시간으로 읽어 오신 명리학의 대가들을 만났습니다. 내가 만나지 못한 재야의 고수들과 명리학자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오늘날 명리학은 여전히 미신으로 치부되고 있고, 학문으로 단단하게 정립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명리학을 미신의 영역으로 비하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견뎌야 하며, 학계 내에서 서로를 깎아내리는 문화에도 맞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공부를 해나가고 이런 글을 써가는 일이 타당한가에 대하여 계속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할래야 안할 수 없고, 떨칠래야 떨칠 수 없습니다. 나는 명리(命理) 공부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천명(天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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