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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의 잉태기, 심화기, 혼돈기

명리학 중독의 1,2,3단계

by 몽B


명리학에 중독되다



궁금한 것이 생기게 되면 밤잠을 설치는 사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람,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은 의지가 들끓는 사람. 이 세 가지 유형 중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명리 공부를 시작하는 것에 대하여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를 권해봅니다. 명리학에 중독될 소지가 다분하신 분들입니다. 명리 공부에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그 매력에 한 번 빠져들게 되면 중독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를 돌이켜 보자면,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밤잠을 설치는 사람입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둥둥 떠다닙니다.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명리학에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입니다. 명리학으로 이 공부를 시작하지만, 동양의 다양한 학문과 연결되면 중독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약도 없고, 답도 없습니다. 중독의 시작은 10여 년 전이었고, 그 상태는 동양의 다양한 학문과 연계되어 거듭거듭 깊어지고 있습니다.



명리학? 이거 궁금한데?



10여 년 전 동생을 따라 유명하다는 철학관에 갔습니다. 처음 사주를 보았던 경험입니다. 그때 나는 ‘점을 보러 간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점을 보는 장소의 이름이 ‘철학관’이라는 것에 대해 조소 섞인 웃음을 웃었던 나였습니다. ‘철학’은 고상한 학문이고, ‘사주팔자를 보는 것’은 흥미에 지나지 않는 미신이라 여겼습니다.


내가 갔던 철학관은 부산 온천장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건물 2층에 있었습니다. 건물 건너편에 성당이 있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건물로 냅다 뛰어들었습니다. 나는 가톨릭을 사랑하지만 게으름으로 성당에 가지 않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때도 냉담 중이긴 했지만, 무언가 죄를 크게 짓는 느낌 때문에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가톨릭 신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 30%,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70%를 손끝에 담아 성호를 그으며 계단을 올랐습니다.


좁고 낡은 계단에서는 향냄새가 진하게 풍겼습니다. 무언가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한복을 곱게 입고 부채를 든 여인이 나를 노려볼 것만 같은 상상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철학관 문을 열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부에는 책들이 보기 좋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사주를 봐줄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을 한 중년의 남성이었고,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우리의 등장을 보며 일어서서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강의하던 흔적이 남아있는 칠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 공간이 나쁘지 않게 여겨졌고, 긴장을 풀어도 되겠거니 생각하였습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상담이 진행되었습니다. 동생과 나는 예의 바르게 두 손을 무릎에 두고 생년월일시를 불러드렸습니다. 한자를 휘갈기며 뭔가를 써 내려가지 않을까 예측했으나, 이 선생님은 컴퓨터 자판에 생년월일시를 입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하는 거지?’


사주팔자는 서기로 표현된 태어난 순간의 연월일시를 옛사람들이 사용하던 부호체계로 나타낸 것에 불과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두꺼운 만세력 달력을 일일이 뒤져가며 찾아냈을 테지만, 요즘은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순식간에 사주팔자(옛날 달력이라고 해둘까?)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세력이 뭔지 전혀 몰랐던 터라 인터넷 사주를 통해 힌트를 얻으려는 속셈인가 하는 의심이 생겨났습니다.


"언니 사주 먼저 봅시다. 가르치는 일 하시겠네요. 선생님이세요?", ‘앗! 그걸 안다고?’ 이전의 의심 가득한 생각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동생과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로를 응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어딜 가나 사주를 물으면, 선생님인지 물어봅니다. 명리학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생년월일시만 넣었는데, 그걸 알 수 있다고?’



모래밭에서 콩알 줍기



고등학교 교사로 오래 근무하면서 ‘명리학’을 공부하시는 동료 선생님들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는 선생님들끼리 특정 주제로 연구하는 ‘전문적 학습 공동체’ 활동이 있습니다. 이 활동에서 학생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명리학’을 공부하는 모임이 많이 있었습니다. 관심이 없을 때는 참 이상한 공부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며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에 관심이 생기고 나니, 그 모임들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참 많이 존경하는 동료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도 오랜 기간 명리 공부를 해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하고 계시는 공부라고 생각하니, 이 공부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관심을 보이는 나에게 선생님께서 책 한 권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고미숙 선생님의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라는 책이었습니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命)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 누릴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사주명리학에 대한 고미숙 선생님의 시각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천간? 겁재? 상관? 정인? 이 책에 적혀 있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을 깊이 이해하고, 자유롭게 구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 공부에의 중독으로 향하는 전조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때였나 봅니다. ‘중독의 잉태기’라 해두겠습니다.


인터넷 서점에 판매하는 사주 명리 관련 책들을 거의 모두 구매하여 읽었습니다. 그때 내가 구매했던 책들은 대체로 2000년대에 쓰인 명리 서적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고전과 별개로 자기만의 견해가 녹아있는 책들이 많았습니다. 명확한 개념은 일관되었지만,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책들을 쌓아 두고 읽으며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여러 책을 펼쳐 두고 정답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다 혼자 답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명한 명리 선생님들의 인터넷 강의를 도장 깨기처럼 하나둘 들어 나갔습니다. 공부가 다 된 것 같다가도 부족함이 보이고, 된 것 같다가도 논리적 비약이 심한 부분에서 계속해서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10년째 공부 중입니다. 아마 50년 후에도 나는 공부 중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공부의 대상이 ‘사람’이기 때문에 공부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알아가는 공부가 어떻게 ‘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공부를 처음 할 때의 막막함과 답답함은 모래밭에서 콩알을 줍는,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콩알을 줍다가 어떤 날은 보석을 줍기도 하였습니다. 또 어떤 날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줍기도 하였습니다. 공부가 넓어지기만 하고 깊어지지 않음에 답답함을 느끼던 때, 정규교육 학사과정으로 대학에서 명리학 강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광디지털대학교 동양학과에 편입하여 공부한 것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이 학문의 전통과 역사 및 동양철학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게 되면서 이 공부의 진정한 가치에 매료당했습니다. ‘올인’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중독의 심화기’라고나 할까요?



직업병인가? 내 팔자인가?



나는 술월(戌月)의 신금(辛金)으로 월지(月支)가 정인(正印)입니다. 상관합살(傷官合殺)에 상관패인(傷官佩印)의 사주 구조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시지요? ‘상관’이라는 것은 나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고, ‘정인’이라는 것은 내게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결국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팔자입니다. 그러니 어디서 사주를 보든지, ‘선생님’이냐 물어보겠지요. 게다가 ‘재성’이 없는 팔자라 계획도 없고, 계산도 없고, 두서도 없고, 눈치도 없고, 결과도 없이 답답한, 좋게 말한다면 순수한(?) 나쁘게 말한다면 대책 없는(?)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직장 생활과 육아를 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운명과도 같이 딸, 아들, 딸의 순서로 예쁜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남들 진학할 때 진학하고, 취직할 때 취직했습니다. 남들 결혼할 때 결혼했고, 아이를 낳을 때 낳았습니다. 그냥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2016년 아들이 쓰러지기 전까지 나는 별다른 문제없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2016년, 아들이 7세이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자고 있던 아이가 호흡이 곤란해지고, 청색증이 왔습니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가는 동안에도 아이는 깨어나지 못했고 호흡이 고르지 못하였습니다. 호흡이 어려운 아이를 보면서,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자식의 아픔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애끓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롤란딕 뇌전증’을 진단받았습니다. 롤란딕 뇌전증은 유년기에 발병하며 주로 수면 중에 발작이 나타나는 질병입니다. 당시 연세 지긋하신 대학병원 교수님께서 엄마만 용감하게 옆에 있어 줄 자신이 있다면, 독한 약을 굳이 먹이지 않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습니다. 뇌전증 약은 뇌전증을 치료하는 치료제가 아니라, 뇌의 기능을 억제하여 발작을 눌러주는 약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용감하게 버틸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씩씩했고, 온 가족이 함께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커가면서 아이의 병은 잠잠해졌습니다. 다시 일상은 평온해졌습니다. 이제 다 끝났나 보다 생각하던 2020년, 아들에게서 틱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아들은 잠도 잘 자지 못했고, 호흡을 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도 힘들어했습니다. 나는 직장을 휴직하고 아이를 돌보았습니다. 그 힘든 시기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감내하기 힘든 일들이 연속하여 내게 벌어졌습니다.


불안이 엄습해 오기도 하고, 우울한 마음에 잠식되기도 하였습니다.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사람’과 ‘명리 공부’였습니다. 아이의 친구들과 그 친구의 엄마들. 항상 함께 고민해 주시던 의사 선생님, 친정어머니와 동생들.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상담 선생님, 보건 선생님 그리고 나의 동료 선생님들. 오랜 내 친구들이 보내준 따뜻한 마음과 도움들은 흔들리는 나를 바로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씩씩하게 버텨준 아이가 항상 내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남편과 두 딸이 자기 자리를 지켜주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살리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나를 살리고 있었습니다.


힘든 가운데 틈틈이 명리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들어오는 에너지 ‘정인’과 나가는 에너지 ‘상관’으로 세팅된 사람에게 습득하는 공부만 하는 일은 쉽지 않은가 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누군가가 전해주는 도움의 에너지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힘들었나 봅니다. 코로나 시국을 지내오며 온라인으로 학생들에게 수업하였던 방법으로 명리학 강의를 하나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튜브’라는 플랫폼에 올려보았습니다. 배운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고, 받은 마음을 다시 나누고 싶었습니다. 참, 팔자 모양 그대로네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수줍음이 많은 내가 유튜버가 되는 것에 대해 상상이나 했을까요? 명리 공부에 대한 몰입과 사람들에 대한 감사로 충만해진 나는 에너지의 발산이 필요했습니다. 발산하는 에너지로 떠들다 보니 어느덧 명리 강의는 100개가 되고, 200개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나는 자신감으로 충만하여 강의를 진행하였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명리학의 기본 틀이라 생각했었지요.


내가 사주를 제일 잘 보던 때는 공부를 시작하고 2개월쯤 지난 때인 것 같습니다. 그때 사주 상담사 1급의 민간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자격증 따는 일은 한 달 만에도 가능합니다. 그만큼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자격증이라는 이야기겠지요. 그때 나는 자격증을 등에 업고 지인들의 사주를 봐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나도 모르게 확신의 말들을 마구마구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10년이 넘게 팔지 못하고 있던 친정 부모님의 시골집이 팔리는 시기를 대충 말하였는데, 정확하게 그 시기에 집을 매도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사주를 보던 실력은 A형은 소심하다는 혈액형 테스트와 유사한 수준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에 강의를 올리던 시점에 내 공부는 MBTI에서 각각의 특성을 외워 말하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의도만은 순수했습니다. 모래밭에서 콩알을 줍던 기분으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체계화된 정보를 전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 매력적인 공부를 많은 사람이 어렵지 않게 접근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에서 학생들과 수업할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강의당 하나의 학습지를 만들어 강의했습니다. 그래서 유튜브 채널 이름도 <하루한장, 명리>입니다.


열심히 유튜브에 강의를 올리다가, 고서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일었습니다. 지금껏 나는 코끼리 코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다란 튜브 같은 것이라고 확신하며 떠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공부가 조금 더 신뢰를 바탕으로 정교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여, 잘 이어 나가던 유튜브 강의를 일순간에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명리 공부는 심오하고 어렵습니다. 30년, 40년 공부하시고 상담해 온 선생님들께서도 자신을 소개할 때 ‘술사(術士)’라 자칭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학자(學者)’인 냥 떠들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에 근거한 자신감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한숨이 나옵니다. 지나친 자신감으로 유튜브 영상을 찍어 올린 것에, 새삼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현대 서적만 접하였지, 역학 관련 필독서라 불리는 책들을 진지하게 독파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판의 대상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면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 고서를 비판부터 하였습니다. 고서와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명리학이 현대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오만함을 보였습니다. 또 상담을 통한 확인과 검증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무료 상담 채팅방을 개설하여 익명으로 상담을 이어오긴 하였으나, 그 정도의 경험만으로 무언가를 확신하며 이야기한 것에 대하여 반성의 마음이 밀려들었습니다.


모래밭에서 콩알을 찾는 기분으로 공부를 해왔었는데, 나 역시 여기 서서 모래알들을 흩날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공부에 대한 점검과 앞으로의 계획이 필요했습니다. 저명한 선생님들의 조언과 견해를 들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중독의 혼돈기’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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